소설리스트

라노벨 속 악역이 되었다-17화 (18/42)

제 17화

17.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

그런 생각을 하던 것도 잠시.

나는 거실에서 얌전히 기다리지 못하고 부엌으로 나왔다. 자기만 믿고 있으라는 화나비가 괜스레 불안해서였다.

발소리는 죽이고, 숨까지 참아가면서 걸음을 옮겼다. 이러니까 무슨 물건 훔치러 온 도둑이라도 된 기분인데….

“비도 오고 하니까, 전으로 할까? 아냐, 저녁으로 먹기엔 뭔가 부족한 감이 있어.”

그리 슬쩍 엿본 결과, 화나비는 커다란 밀폐 용기를 앞에다 올려놓은 채 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뭘 만들려고 하는 건지는 몰라도, 김치를 이용한 요리라는 건 알겠다.

김치라. 괴짜 끼가 있는 화나비 치고 무난한 선택지였다. 한국인치고 김치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드무니까 말이다. 학교 급식만 봐도 김치가 빠지는 식단이 없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요리 학원에 다닌데다 선생님에게 칭찬까지 받을 정도. 거기에 더해 메인 재료는 요리 망치기가 더 힘든 김치다.

이 정도쯤 되면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겠지 싶었다. 그렇지만 상대는 화나비. 방심하고 있다가 카운터 펀치를 맞는 건 사양이었기에, 나는 일부러 인기척을 내었다.

“뭐해?”

“어, 시우씨. 거실에서 기다리시라니까 왜 오셨어요?”

너 못 미더워서, 라고 할 수는 없었으니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뭐 하려는지 궁금해서 와봤지. 김치네?”

“네. 김치 싫어하시는 건 아니죠?”

호불호를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호에 가깝다. 그래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좋아하지. 근데 뭐 하려고?”

“마침 그거 고민 중이었는데, 잘됐네요. 시우씨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겠다. 혹시 찌개랑 전 중에서 뭐가 더 좋으세요?”

“전도 할 줄 알아?”

조리법이 간단해 보여서 쉬운 요리라고 아는 경향이 있는데, 간단한 만큼 맛내기 어려운 게 또 전이었다. 그건 자취 경력이 거의 10년 가까이 되는 내가 보증한다.

“다른 것도 할 줄 아는데, 재료가 다 떨어져서요. 이 시간에 나가서 뭘 사 올 수도 없고. 이럴 줄 알았으면 장 봐올 걸 그랬어요.”

화나비의 말대로 현재 시각은 밤 8시를 넘어가는 늦은 오후. 웬만한 마트는 문 닫았을 시간이었고, 편의점은 열려있겠으나 거기서 찬거리 사면 바가지 쓴다.

“그러면 김치찌개가 낫지 않을까.”

“그래요. 그게 낫겠네요.”

그렇게 오늘의 저녁은 김치찌개로 확정된 것 같다. 내 의견에 고개를 끄덕여 동의한 화나비는 곧장 요리를 시작했다.

가타부타 않고 냉장고로 가서 대파를 꺼내더니, 도마에 올려놓은 다음 꽤 익숙한 손동작으로 대파를 어슷 썰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않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요리하는데 뒤에서 이래라저래라 해봐야 훈장질밖에 안 된다.

“….”

그런데 그 순간, 그냥 지켜보고만 있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하는 법을 아예 몰랐으면 또 몰라, 아는데도 그냥 관망만 하는 건 도둑놈 심보가 아닌가 싶다.

“화나비, 내가 좀 도와줄까?”

“네? 시우씨, 요리도 할 줄 아세요?”

화나비는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입장이 역전된듯한 물음이었다. 그만큼 자기 요리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근데 나도 어디 가서 요리로 빠지지는 않는다. 그냥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자취를 시작한 시절부터 요리는 다 내 몫이었다. 언제까지고 세끼 전부를 사 먹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식비를 줄여보려고 간단한 요리들을 배웠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간단한 건 할 줄 알지.”

“…진짜요? 그냥 해보시는 말 아니죠?”

화나비는 영 못 미덥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야 그렇겠지. 재벌 집안에서 귀하게 자랐을 거 뻔해 보이는 놈이 요리할 줄 안다고 하면, 나라도 안 믿을 것 같다.

“진짜지 그럼. 내 성적 보면 몰라?”

“요리랑 성적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원래 수학 잘하면 요리도 잘해.”

화나비는 내 단언이 짐짓 황당하게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미간을 좁히면서, 동시에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시는데. 내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수학과 요리의 공통적인 핵심은 숫자다. 당장 요리의 기본이 되는 계량부터가 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요리는 곧 수학이라고도 하겠다.

“어휴, 시우씨를 누가 말려. 알겠어요. 그러면…. 두부나 좀 썰어주세요.”

초등학생도 할 수 있는 부분을 맡기는 걸 보니, 말은 없어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게 분명했다. 나중에 내가 직접 요리를 해주든가 해야겠구만. 그리 다짐한 나는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여기다 대고 뭐라고 해봐야 괜히 말만 길어진다.

“그래, 칼은 어디 있어?”

“제 오른쪽 서랍장 열어보시면 있어요.”

“오케이.”

앞서 말했듯, 두부 써는 건 유치원생도 할 수 있을 만큼 쉽다.

먼저 가로로 반을 나누고, 그다음 세로로 잘게 썬다. 그렇게 잘라낸 두부 조각의 크기는 약 2cm 정도. 입 작은 사람도 한입에 쏙 넣을 수 있을 만큼의 크기가 된다.

“다 끝났어.”

“벌써요? 어디 봐봐요.”

어린 자녀 숙제 검사하듯이 말한 화나비가 도마 위의 결과물을 살폈다.

누가 봐도 분명 별거 아닌 게 분명한데, 그녀의 얼굴에는 곧 놀라움이 번졌다.

“생각보다 잘 써셨네요? 제가 어느 정도로 썰라고 크기까지는 말 안 한 것 같은데.”

“그걸 뭐 꼭 말해야 아나.”

요리법을 알 필요도 없이, 상식 박혀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알았어요. 믿어 드릴게요. 요리 잘하시는 거 맞네.”

“…이거만 보고 어떻게 알아?”

“꼭 다 봐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내가 했던 말이 되돌아오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화나비는 그런 나를 그대로 지나쳐가더니만, 곧 냄비를 비롯한 다른 음식재료들을 이것저것 꺼내왔다.

도마 옆에 놓인 것들은 고추기름, 식용유, 돼지고기…. 두부 썰었으니까 이제 물이랑 김치만 넣고 끓이면 되겠다 싶었던 내 생각보다 훨씬 본격적이다.

“이거 다 넣으려고?”

“네. 당연하죠. 김치찌갠데.”

아무래도 요리 학원 다녔다는 이야기는 진짜였던 것 같다.

근데 요즘 요리 학원에서는 김치찌개 끓이는 법도 알려 주는 건가. 뭐 요리 학원 수업을 들어본 적이 있어야 알지. 내가 다녔던 학원은 어릴 때 다녔던 웅변학원밖에 없다.

“그러면 다 되면 제가 부를 테니까요, 시우씨는 이제 가서 쉬고 계셔도 돼요. ”

“더 도울 거 없어? 어째 공짜로 얻어먹는 거 같아서 좀 그런데.”

내가 상전도 아닌데, 요리시켜놓고 나만 쉬고 있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런 뜻에서 물어보았더니, 화나비는 짐짓 한쪽 눈을 깜빡여 보였다.

…시기적절하지 않은, 귀여운 윙크였다.

“…어?”

귀엽긴 한데, 갑자기 왜? 얼떨떨해져서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뜻밖의 일격을 당한 터라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 것이다. 그래서 눈으로만 물었다.

화나비는 내가 아닌 냄비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공짜로 해 드리는 거 아니에요. 이거 제가 시우씨한테 드리는 뇌물이에요.”

“이게 뇌물이라고?”

오 만원 이하니까 김영란 법에는 안 걸리겠네. 뭐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만큼 화나비의 윙크에 놀랐다는 것이다. 괜히 심장이 두근댄다.

“시우씨가 공부 가르쳐 주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저 좀 잘 봐달라는 뜻이죠.”

“…아.”

그런 의미에서라면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행동이었다. 순간적으로 내가 체득했던 공부 노하우를 다 퍼줄 뻔 했으니까.

“아무튼요. 계속 그렇게 서 계실 거에요? 저 요리하는데 방해되는 데요.”

“어, 어. 알았어.”

화나비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요리하는데 뒤에서 지켜보면 괜히 방해만 된다.

얼추 납득한 나는 얼결에 거실로 돌아왔고, 소파에 엉덩이까지 붙이고 나서야 내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두근.

심장이 아직도 두근거린다.

어째서일까.

“…부정맥인가?”

병원 한번 가봐야겠네.

*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식사가 끝났다.

“시우씨, 맛은 어떠셨어요?”

-달그락.

식기세척기가 있어도 간단한 설거지는 마치고 넣어야 한다. 그래서 싱크대에 물을 틀어놓고 밑설거지를 하는 내 옆에서, 돌연 화나비가 이런 질문을 해왔다.

그에 나는 힐끗 옆을 보았다. 화나비는 과도로 사과를 깎는 중이었다. 칼 쓰면서 딴 데 보면 위험한데.

“왜 자꾸 물어본 걸 또 물어봐.”

공짜로 식사 대접받은 주제에 이런 태도로 나올 게 아니었지만, 오늘에 한해서는 그럴 만했다. 같은 질문을 한 번도 아니고 거의 열 번도 넘게 물어온다.

아니, 열 번이 아닌가. 거의 밥 한술 뜰 때마다 물었으니까, 이미 스무 번도 넘었지 않았나 싶다. 이쯤 되면 부처가 아닌 이상 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저 가족 말고 누구한테 요리 해주는 거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어떠셨는데요? 맛있죠?”

“어, 맛있었다니까.”

“진짜요? 진짜 진짜?”

“그래, 진짜 진짜로.”

“그거 진짜죠? 진짜 진짜 진짜요?”

이게 지금 나랑 말장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순간 열이 뻗쳐서 물을 확 끼얹을 뻔했다.

“앗, 차가워!”

아니…. 이미 정신을 차렸을 땐 물을 끼얹은 이후였다.

물론 설거지하던 물을 엎었다는 소리는 아니고, 물 나오는 수도꼭지를 손으로 막아서 수압을 세게 만들어 물을 뿌리는, 학창시절에 수돗가에서 많이 했었던 장난의 일종이었다.

“시우씨, 지금 저한테 물 뿌리신 거에요?!”

“아, 미안. 실수했다.”

“아닌데, 완전 일부러 하신 거 같은데?”

“내가 너한테 물을 왜 뿌려. 네가 무슨 꽃이야?”

“왜요, 꽃은 맞잖아요?”

“…뭐요?”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새삼 상대를 보았다.

뭐, 사실 따지고 보면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화나비의 외모가 뛰어난 건 엄연한 진실이었다.

눈도 되게 크고, 이목구비가 단정하긴 하다. 키도 내가 워낙에 커서 그렇지, 화나비 정도면 성인 여자 평균 키에 해당한다.

즉 유별난 성격 말고는 꿀리는 게 없다-. 이 말이라, 수상할 정도로 예쁜 여자가 많은 청하고 안에서도 줄 세우면 아마 세 손가락에 꼽지 않을까 싶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자기 입으로 자기 자신을 꽃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또 머리털 나고 처음 본다.

이걸 자존심이 높다고 해야 해, 아니면 자만심이 가득하다고 해야 해? 진지하게 고민 좀 해보려는데, 문득 화나비가 제 얼굴을 붉혔다.

“잠시만요. 시우씨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으신 것 같은데, 제 말뜻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무슨 오해.”

달그락, 애초에 사용한 식기가 몇 개 없었기에 밑설거지가 거의 끝나간다. 무심하게 받아치는 내 옆에서 화나비는 구구절절 설명을 해왔다.

“시우씨, 제 이름. 아니 제 성이 뭐에요?”

“뭐더라. 섭씨였나.”

“장난치지 말구요! 저 지금 진지하게 묻는 거에요.”

섭씨 - 화씨. 내 회심의 아재 개그였는데, 아무래도 화나비는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아쉽게 됐다.

“화씨지.”

“네, 화씨죠. 그럼 무슨 화자 쓰는지 혹시 아세요?”

“나야 모르지.”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열댓 가지다. 그림 화(畵)자, 불 화(火)자, 재앙 화(過)자….

근데 사람 성씨에 이런 한자를 쓰지는 않을 것이고, 그럼 예상 가능한 후보군은 상당히 좁혀진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방금 화나비가 언급했던 꽃, 그리고 화나비의 성인 꽃 화(花)자. 두 단어가 맞물려 돌아가며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꽃 화(花)자 써?”

“네! 이제 아시겠죠,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툭 던진 말에 화나비가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나는 그제야 그녀가 했었던 말의 뜻이 이해가 되었다.

과연, 화나비가 자기 자신을 꽃이라고 칭한 이유는 자기 성씨가 화(花)라서 그랬던 것이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는 가벼운 말장난의 일종이다.

“모르겠는데.”

“네에?”

하지만 나는 일부러 모른 척했다. 그편이 더 재미있을 거 같거든.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안심한 기색이 퍼지고 있었던 화나비의 얼굴에서 다시금 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왜, 왜 모르시는데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는 눈치가 없다. 그래서 모른다.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화나비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내 오른팔을 붙잡았다.

그러더니만 그대로 흔들흔들, 어찌나 억울하신지, 아예 내 팔을 붙잡고 흔들기까지 한다.

“왜, 왜 몰라요? 왜, 왜? 제가 설명해 드려요?”

“설명할 필요가 있나. 그냥 네 자신감이 넘친다는 소리잖아? 너 예쁜 거 맞아.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 보기 좋은데 뭐.”

“아니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진짜 억울하네! 보세요, 시우씨. 제가 한 말의 뜻은요…!”

“알았으니까, 이거 좀 놔봐. 나 설거지해야 해.”

“저 머리에 꽃단 여자 되게 생겼는데, 지금 설거지가 중요해요?!”

“설거지는 항상 제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안 그러면 기름때 달라붙거든. 잘 떼어지지도 않는데 냄새는 어찌나 독한지, 이래서 설거지거리는 쌓아두면 안 되는 것이다.

“시우씨, 솔직히 말해 봐요. 사실 눈치채셨죠? 아니, 눈치채셨을 거야. 저한테 일부러 그러는 거죠?”

“모른다니까 그러네.”

“아, 진짜! 왜 이걸 모르는 거냐고요. 왜, 왜에!”

셔츠 단추 다 뜯어버릴 기세로 나를 흔드는 화나비. 나는 그녀의 귀여운 반응을 보며 웃어버리고 말았다. 참아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참아진다.

“시우씨, 설마 지금 웃으신 거에요?”

“아뇨, 아닌데요.”

“아니기는요…! 지금 저 보고 웃었잖아요. 시우씨, 지금까지 저 놀린 거죠?”

“아니라니까 그러네….”

“으, 진짜. 또 모른 척하고…! 이제 저도 몰라요. 뒷정리는 시우씨가 알아서 다 하세요. 흥이다!”

정말 화났는지, 사과 깎다 말고 어디론가 가버린다. 나는 그런 화나비의 뒤에다 대고 소리쳤다.

“화나비, 어디 가는데?”

“아, 몰라요! 묻지 마세요. 저 공부 안 할 거에요. 유급되든가 말든가. 까짓 거 학교 1년 더 다니죠 뭐.”

결국, 달래는데 애 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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