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2화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만남이 예정 된 수요일.
현우는 아침 댓바람부터 울리는 벨 소리에 신경질을 잔뜩 부리며 전화 를 받았다.
“여보세요?”
현우의 잔뜩 잠긴 목소리에 상대방 은 당황했는지 사과를 했다.
- 음…. 한국의 시간은 아침이군 요. 제가 실수했네요. 몇 시간 뒤에 전화해야 했는데….
현우는 스마트폰으로부터 들려오는 영어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케일?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큰일이라도 난 건 아니겠죠?”
-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상의할 게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상의요? 스폰 문제도 끝이 났고. 당분간 아카데미를 할 생각도 없는 데요? 무슨 일정이라도 있나요?”
케일의 말에 현우는 곰곰이 생각했 다.
자신이 벌여 놓은 일이 있는가.
아니면 니케가 자신에게 부탁할 만 한 일이 있는가.
혹 내가 사고를 쳤나?
요즘 현우의 생활은 운동하기 위한 외출이 아니면 집에서 텔레비전 시 청과 아레나뿐이었다.
하다못해 커뮤니티에 글 한 줄 쓰 는 일도 없었다.
“전 사고도 치지 않았는데요?”
현우의 엉뚱한 말에 케일이 웃었 다.
- 그런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저희에게 제보했습니다. 골목대장에 게 도움을 요청하면서요.
‘제보? 이건 또 무슨….’ 현우로서는 어이가 없는 소리였다. 제보라니.
자신이 검사나 경찰도 아닌데 제보 가 웬 말인가.
“제보? 제보라니요?”
- 한국 내에 있는 프로 구단 선수 라고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구단 내의 비리에 대해 제보해 왔습니다.
“근데 그것을 왜 제게 했다고 합니 까?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리인 지….”
- 제 생각에는 미스터 강이 한국 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기 때문이 아 니겠냐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이번 스트리밍을 통해 긍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 다.
“끄응….”
현우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조금 아니라 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뭐라고 남들의 제보까지 받 아가며 남을 돕는다는 말인가.
‘난 그냥 일개 스트리머일 뿐인데.’ 현우는 한순간에 짜증이 확 솟구치 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니케에 대한 옅 은 반감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니케의 뜻은 뭡니까? 제게 연락한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 언급 하고 스트리밍에서 다뤘으면 좋겠다 는 뜻입니까?”
현우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전화상이기는 하지만 사회 경험이 풍부한 케일이 현우가 보인 감정을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케일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 저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조금 더 생각해야 했는데…. 이번 일은 사과드리 겠습니 다.
“괜찮습니다. 뭐, 절 위해서 그랬다 고 생각합니다.”
- 아침부터 연락해서 죄송했습니 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현우는 케일과 통화가 끝난 뒤 스 마트폰을 침대에 휙 던졌다.
‘내가 뭐라고. 나한테 제보를 해.’ 현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자신은 그저 돈을 위해 스트리밍을 하는 일개 스트리머다.
공익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사람이 라는 말이었다.
한참을 허공을 응시하던 현우는 이 내 눈을 감았다.
“젠장.”
아침부터 생각이 복잡했다.
케일이 했던 말 때문인지 현우는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회원님,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시 네요? 요새 프로그램이 좀 편한가 보죠? 다음 수업부터는 한 단계 강 도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런….’
트레이너의 말에 현우는 속으로 욕 을 내뱉었다.
흡사 래퍼라도 된 것처럼 쉬지 않 고 속사포로 쏘아댔다.
“아닙니다. 오늘만 그런 겁니다. 오 늘만. 굳이 프로그램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현우의 변명에도 트레이너는 요지 부동이 었다.
“보통 이 정도에 한 번씩은 다들 바꿉니다. 회원님도 이제는 바꿀 때 가 됐습니다. 루틴 다시 짜겠습니다. 다음 수업부터는 4분할입니다. 어깨 부터 시작해 보죠. 오늘은 수고 많 으셨습니다.”
트레이너는 그 말만 남긴 채 사라 져 버렸다.
이미 몇 달간 현우를 겪어본 탓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는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려 결국에는 현우의 뜻 대로 일이 이뤄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씨….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 게 없어.”
순간 짜증이 솟구친 현우는 괜한 수건만 두들겼다.
집에 돌아온 현우는 아레나에 접속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거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5분, 10분, 30분, 1시간….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이제는 영찬과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할 때가 다가왔 다.
영찬은 아직도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현우를 불렀다.
“야!!! 뭐해? 준비 안 해? 오랜만 에 애들 보는데 그렇게 하고 나가 게‘?”
영찬의 고함에 현우는 그제야 정신 이 드는지 반쯤은 영혼이 사라진 표 정으로 대답했다.
“어? 어… 나가야지. 준비해야지.”
현우는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자 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영찬이 중얼거렸다.
“저 새끼가 미쳤나? 왜 저러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영찬이 아는 지금의 현우는 승승장 구 그 자체였다.
하루가 멀다고 채널에 구독자들이 늘고 스트리밍의 시청자들이 늘었 다.
그것은 곧 돈.
통장에도 돈이 미친 듯한 속도로 쌓이는 중이었다.
게다가 꾸준한 운동으로 몸도 좋아 졌다.
더는 집안의 빚도 남아 있지 않았 다.
언뜻 듣기로는 현우 아버님의 병세 도 호전되는 중이라고 들었다.
“근데 뭐가 문제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던 영찬은 현우에게 한 번 물 어나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사이 현우가 옷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나왔다.
머리는 깔끔한 포마드 스타일이었 고 베이지색의 면바지에 흰 셔츠를 입었다.
평범한 스타일링이었지만, 밑바탕 이 다르니 상당히 멋지게만 보였다.
영찬은 그런 현우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부러운 놈.’
정말 저런 인간에게도 고민이란 게 있는 걸까.
♦ ♦♦
현우는 붉은색의 포르쉐, 희망이를 타고 도로를 달리자 하루 동안 자신 을 괴롭혔던 잡념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좋다.”
현우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음 을 깨달았다.
조금 더 달리지 못한 것이 아쉬 웠다.
영찬 역시 자신의 차를 끌고 왔기 에 두 사람은 약속 장소의 앞에서 다시 만났다.
“여기냐?”
현우는 구겨진 바지를 펴는 영찬을 향해 물었다.
“어, 여기 맞다.”
약속 장소는 잘 차려입은 두 사람 과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다.
대학가 근처의 삼겹살집이었다.
“넌 잘도 이런 곳을 잡았다?”
약속 장소를 본 현우는 실실 웃었 삼겹살에 소주.
현우가 가장 좋아하는 조합 중 하 나였다.
과거 집안이 망하기 전, 그러니까 군 입대 전에도 항상 현우는 삼겹살 에 소주를 좋아했다.
“좋냐? 너 때문에 여기 잡은 거 아니다. 애들이 형편이 안 되니까 그런 거지.”
영찬과 현우를 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대학생 신분이었다.
친구들은 이제 막 전역을 한 복학 생들과 아직 군대에 가지 않은 불쌍 한 현역 판정이 난 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금전적 여유가 없고 제대로 된 돈벌이도 없다는 뜻이었다.
“잘했다. 근데 우리가 뭐 언제는 비싼 곳이라도 간 것처럼 말한다? 어차피 맨날 삼겹살, 곱창, 순댓국 이런 것만 먹었는데.”
“그렇긴 하네.”
“근데 다른 애들은? 벌써 들어가 있는 거야?”
“그래, 먼저 온 놈들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어. 우린 그냥 들어가면 돼.”
현재 시각은 5시 30분.
저녁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 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게 안에는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현우는 내부를 둘러보더니 영찬을 향해 물었다.
“야? 아무도 없는데?”
“2층에 가면 방 있어. 거기에 있을 걸‘?”
현우는 영찬의 답에 고개를 끄덕이 고는 걸음을 옮겼다.
영찬을 따라 들어간 방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들이었다.
이들은 벌써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는지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말하는 것을 멈추고 모두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왔냐?”
“그래, 내가 오늘은 보기 힘든 얼 굴도 모셨다.”
영찬 역시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 라봤다.
영찬의 뒤에서 나타난 현우가 약간 은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얼마나 어색했는지 현우는 뒷목이 쭈뼛 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이다. 새끼들아.”
하지만 이미 술을 몇 잔씩 마신 친구들은 현우처럼 어색해하지 않았 다.
“내가 네 새끼냐? 우리 엄마 새끼 지. 오늘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귀 한 얼굴을 봤는데.”
“제대했으면 연락부터 했어야지. 섭섭하다. 현우야. 영찬이랑만 노 냐‘?”
“하여튼 얼굴이나 자주 비춰라. 남 자 새끼가 뭐 비싸다고 그렇게 아끼 냐?”
고등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돌려 말 하기란 없었다.
직진.
그리고 직진.
아우토반을 달리는 머슬카처럼 시 원하게 질렀다.
“알았다, 그동안은 개인적으로 사 정이 있어서 바빴는데. 이제는 좀 나아졌다. 자주 볼 수 있을 거다.”
친구들에게 현우의 말은 이미 안중 에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친구들은 현우와 영찬을 빈자리에 앉히고 술잔을 건 넸다.
“받아, 일단 받고 말해.”
동글동글한 인상의 남자, 정세훈이 현우에 소주를 따랐다.
“세훈아, 요새 뭐 하고 지내냐?” 현우는 술을 받으며 물었다.
상당히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그랬기에 더 반가운 얼굴이기도 했 다.
“나야 복학해서 학교 다니지. 너는 복학 안 했어?”
“내년이나 내후년에 복학하려고. 지금은 좀 그렇다.”
“그래? 부럽다. 나도 내년에 복학 할걸. 요새 아레나 때문에 학점 빵 구나서 큰일이다. 전부 드랍하고 재 수강해야 할 것 같아.”
정세훈은 심각한 내용과는 달리 환 하게 웃으며 술을 마셨다.
현우는 정세훈을 보며 같이 웃었 다.
‘이게 친구지.’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게 웃으면서 말할 내용은 아닌 것 같은데? 아레나는 얼마나 했는 데‘?”
현우의 촌철살인에 정세훈은 급소 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브루투스에게 찔린 카이사르 의 표정과 같았다.
“묻지 마. 심각하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세훈은 금세 낄낄거렸다.
아레나 얘기를 하자 퍽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이 형님의 레벨이 180이라는 거 아니냐. 내 주변에서 나보다 높은 사람 못 봤다?”
“180레벨이면 높네. 이건 빵꾸가 아니라 그냥 박격포로 두들겨 맞았 겠는데?”
“새끼, 쓸데없이 예리하네. 너는? 넌 아레나 안 하냐? 너 게임 잘했 잖아? 게임 하나는 기가 막혔지. 우 리 현우.”
정세훈이 징그럽게 달라붙자 현우 는 정세훈의 팔을 쳐내고 역으로 정 세훈의 목을 조였다.
“내가 언제 너보다 낮은 거 본 적 있나? 나야 당연히 3차 전직 끝났 지.”
현우의 말을 들은 정세훈의 눈매가 악동처럼 휘었다.
재미있는 놀잇감을 발견한 표정이 었다.
현우는 그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 감이 들었다.
“어이, 친구님들. 여기 좀 보소.”
정세훈의 외침에 중구난방 떠들던 이들이 모두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친구들을 응시하던 정세훈이 모두의 눈이 자 신에게 몰린 것을 깨닫고는 말을 이 었다.
“여기 우리의 비싼 친구 강현우 씨 가 아레나 3차 전직을 하셨다고 합 니다. 이거 완전 폐인 아닙니까? 친 구들은 나 몰라라 하고 아레나에만 인생을 쏟는 이 친구를. 우리는 어 떻게 해야 합니까.”
현우는 정세훈의 선동에 당혹스러 운 표정을 지었다.
“나 말고 영찬이도 3차 전직했다. 나만 한 거 아니다.”
하지만 이미 선동당한 친구들에게 현우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현우의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응징하자!!!”
영찬 등이 현우를 향해 다가오던 그 순간 한 남자가 방문을 열고 들 어왔다.
“다들 모여 있었네?”
뜨거웠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