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우주의 그것처럼 새카만 도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움직였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현천도의 궤적이 허공을 뒤덮었다.
그에 따라 파랗고 붉은 궤적들 역 시 나타났다.
“읍!!!”
캉!!!캉!!! 캉!!!
현우의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비욘 과 마쓰모토의 입에서는 앓는 소리 가 절로 흘러나왔다.
참을 수가 없었다.
경쾌하게 휘둘러지는 도에 담긴 위 력은 단단한 둔기로 내려치는 것으 로 착각할 정도로 묵직했다.
‘그래도 슬슬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의외로 공격 방식이 단순했다.
현재 투기장 랭킹 1위이자 불패의 플레이어라기에는 그 수준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워낙에 높은 스탯과 공격력 탓에 자신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있 는 것이었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아.”
“동감입니다. 이런 수준의 플레이 어는 마스터에도 널렸죠.”
잠깐 골목대장에게서 멀어진 두 사 람이 속삭였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볕을 발견한 것 같았다.
물론 오늘 자신들은 죽는다.
그러나 다음에 만났을 때는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얻을 수 있었다.
“영상 촬영은 하고 계시죠? 전 진 작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비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그러했다.
팀 헬리가 도망친 그 순간부터 영 상 촬영에 돌입했었다.
“물론. 최대한 뽑을 수 있는 만큼 뽑고 죽는다. 그럼 후회는 적겠지.”
두 사람은 잠깐의 전투였지만, 그 사이에 꽤 친해졌다.
이는 골목대장이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함으로써 얻은 유대감이었다.
“그럼 다시 가시죠. 아끼는 것 없 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마쓰모토의 말에도 역시 비욘은 고개를 주억였다.
지금의 굴욕은 중요하지 않다.
후에 갚을 수 있느냐가 중요할 뿐.
“이번에는 내가 먼저 가겠다.”
비욘은 그 말을 남긴 뒤. 골목대장 을 향해 뛰었다.
비욘은 지금까지 숨겨둔 비장의 한 수를 생각했다.
그에게는 우연히 클리어한 인던에 서 얻은 버프형 스킬이 있었다.
‘파멸의 람.’
파멸의 람은 좋은 버프 스킬이었 다. 몇 분간이기는 하지만, 모든 스 탯이 두 배가 되니까.
하지만 스킬의 지속 시간이 끝난 이후 한 시간 동안 스탯이 절반으로 떨어지는 리스크가 있기에 확실한 상황에서만 사용해야 할 스킬이었 다.
[파멸의 람을 사용했습니다.]
[모든 스탯이 상승합니다.]
‘이걸로 버틸 수는 있다.’
모든 스탯이 두 배가 된 지금이라 면, 골목대장의 공격을 버틸 수 있 을 것 같았다.
아니, 무조건 비텼다. 그리고 이 생각이 얼마나 자만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기까지는 채 1분 도 걸리지 않았다.
쾅!!!
튕겨 나가는 검과 함께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깨져 나갔다.
골목대장의 공격은 지독하게도 강 력 했다.
부딪친 뒤에야 깨달았다.
골목대장은 지금까지 강기는커녕 도기조차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 으
골목대장의 도에 일렁이는 검은 불 길은 흡사 지옥의 불길처럼 자신의 강기를 잡아먹었다.
게다가 그 강기는 비욘 자신의 강 기만 집어 먹은 것이 아니었다.
비욘 그 자체를 삼켜버렸다.
샤악!!!
검은 강기로 둘러싸인 현천도가 무 방비한 상태로 놓인 비욘의 몸을 가 르고 지나갔다.
촤아!!!
비욘의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지며 사방에 피가 봄날의 꽃처럼 흩날렸 다.
그 모습을 본 마쓰모토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의 공방이었다.
그것만으로 비욘의 검이 날아갔고 골목대장의 도에 몸을 허락했다.
‘저건 정말 미쳤다.’
그 순간 이미 커질 대로 커져 있 던 마쓰모토의 두 눈이 더욱 커졌 다.
그의 눈앞에 골목대장이 유령처럼 나타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골목대장의 도가 세상을 이등분할 기세로 내리쳐졌다.
쾅!!!
마쓰모토는 기적적으로 검을 들어 골목대장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운은 거기까지였다.
챙!
손아귀의 힘이 풀려 검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마쓰모토는 다급하게 고개를 숙였 다.
그러나 급한 마음 탓인지 손이 덜 덜 떨려 와 검을 제대로 집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마쓰모토가 검을 집고는 고 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을 가득 채운 것은 검은 불길이 일렁이는 골목대장의 도였다.
촤아!!!
잘린 마쓰모토의 목으로부터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으아!!! 끝났다. 탱이야, 나와. 아 이템 줍자.”
이제는 즐거운 루팅 타임이었다.
***
탱이가 신나게 아이템들을 줍는 사 이 현우는 한쪽 나무에 몸을 기대 반쯤 누웠다.
‘속이 시원하네.’ 현우는 몇 주간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자신의 실수 아닌 실수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래도 잘 정리돼서 다행이긴 하 네.’
마노 길드는 진짜 스파이였다.
패트릭이 간간이 보내준 정보 덕분 에 더 쉽게 정리한 감도 있었다.
파이브 스타와 제니스 길드의 동선 이라든지 계획 등등을 수시로 보내 주었다.
‘마노는 어쩔 수 없이 같이 가야겠 고. 나머지 둘은 완전히 끝.’
이는 당연한 얘기였다.
결과적으로 마노는 자신들이 배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거기에 그들을 이 판에 끌어들인 것이 자신이니 그에 대한 책임을 져 야 했다.
그리고 파이브 스타와 제니스는 아 예 끝이었다.
적어도 이번 메인 시나리오가 끝나 기 전에는 절대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을 터였다.
‘오늘 죽은 이들만 최소 스물은 되 지.’ 거기에 현재 현우의 악행 수치는
0이었다.
이 말은 곧, 현우의 손에 죽은 두 길드의 플레이어 중에 살인자의 표 식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는 뜻과 직 결되 었다.
그 순간 현우가 무슨 생각을 했는 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잘 먹혔겠지?’
오늘 현우는 상대의 강기를 튕겨 내는 기예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컨 트롤을 보여주지 않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 골목대장이 강력한 것은 컨트롤이 아니라 높은 스탯과 아이템 탓이다.
이런 소문을 낸 이유는 간단했다.
가까이는 저들에게 희망이라는 이 름의 떡밥을 던진 것이고 멀게는 프 로게이머로 데뷔했을 때를 위해서였 다.
프로리그의 PVP는 모두가 동일한 스탯 포인트를 가지고 겨뤘다.
단지 분배의 차이였지, 절대치는 같았다.
그렇기에 선수 개개인의 실력이 더 욱 빛을 발하는 것이다.
이 영상을 보고 소문을 들은 이들 은 현우에 대한 선입견을 품을 것이 다.
하지만 현우는 데뷔 경기에서 그 선입견을 제대로 깨부수게 될 것이 었다.
‘드라마지, 드라마.’
“캬! 취한다. 취해.”
현우는 스스로 설계한 그림에 감탄 했다.
현우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을 무 렵, 탱이는 열심히 두 길드의 플레 이어들이 드랍한 아이템들을 줍고 있었다.
“이건 내 거, 이건 주인 놈 거, 이 것도 주인 놈 거….”
탱이는 현우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으로 아 이템을 슬쩍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아이템을 주 워 현우의 앞에 던지기 시작했다.
“주인 놈아, 다 주웠다. 확인해라.”
현우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한가득 모인 아이템을 보며 놀랐다.
실제로 보니 그 양이 꽤 많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많은가? 탱이가 떨어진 것은 전부 주워왔다.”
탱이는 찔리는 것이 있어 현우의 말을 오해하고는 자신을 스스로 변 론했다.
하지만 현우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 했다.
눈앞의 아이템들에 정신이 팔려 탱 이에게 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 다.
“이게 다 얼마야….” 아이템 하나하나가 모두 레어 이상 이었다.
간혹 유니크 아이템도 모습을 보였 다.
다만 현우가 착용한 아이템에 비해 성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착용할 생 각은 없었다.
‘일단 주변에 팔고 나머지는 니케 에 맡겨야지.’
굳이 현우가 발품을 팔아가며 아이 템을 팔 필요가 없었다.
그냥 매니지먼트인 니케에 맡기면 편했다.
본래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매니지
먼트이기도 했으니까.
***
현우는 새로 산 안마 의자에 지친 몸을 묻었다.
이 안마 의자는 PT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져 이제는 단순한 휴식 으로는 다음 PT 전까지 제대로 몸 이 풀리지 않을 지경이었기에 새로 산 것이었다.
하지만 발터 산맥과 골목대장 아카 데미 등으로 바빠 정작 구매한 현우 는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영찬만 사용하는 것이 그간의 현실이었다.
현우는 온몸을 두들기는 기분 좋은 진동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아, 좋다.”
거실을 지나가던 영찬이 그 모습을 우연히 보고 다가왔다.
“이제 쓰냐? 얼굴이 괜찮아 보이는 게 일이 잘 풀렸나 본데?”
“그거? 그거야 잘 됐지. 다 조져버 렸다. 일단 마스터들은 전부 죽인 것 같고. 나머지 떨거지들도 절반은 죽였어.”
“그럼 당분간 보기 힘들겠는데? 스 트리밍이야 모르겠지만, 발터 산맥 에서는 못 보겠다.”
“그렇지. 내가 얻은 아이템이 몇 갠데. 한 40〜50개는 될걸? 저기 테 이블에 리스트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보내줄 테니까.”
영찬은 현우의 말에 황급히 거실 중앙의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이걸 다 얻었다고? 미쳤다. 미쳤 어.”
종이에 적힌 아이템 리스트를 본 영찬의 소감이었다.
말 그대로 미쳤다.
언뜻 봐도 현재 경매장에서 구하기 가 쉽지 않은 성능의 아이템들이 수 십 개나 적혀 있었다.
여기에 적힌 아이템들만 팔아도 족 히 수십억은 나올 것 같았다.
‘이걸 빼앗겼으니 열불이 터져서 잠도 안 오겠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동정마저 들었 다.
이런 값비싼 아이템들이 털렸으니 어찌 잠이 올까.
“그럼 나는 반지로 두 개만 줘. 이 거랑 이거.”
영찬은 현우의 앞에 종이를 들이밀 며 두 개의 이름을 가리켰다.
영찬이 가리킨 아이템은 자신이 착 용한 아이템보다 좋은 성능의 아이 템들이 었다.
“그래? 그럼 대가는 치러야지?”
현우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오케이 표시를 만들었다.
하지만 공짜로 줄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친구라지만, 이런 거래는 철저해야 했다.
“대가?”
현우의 말에 영찬이 고개를 갸웃거 렸다.
‘돈을 달라는 건가?’
“돈이라면 줄게. 얼마 보내줘?”
영찬 역시 친한 사이일수록 금전 거래는 확실해야 한다는 주의가 있 기에 현우의 말에 조금도 거부감이 없었다.
“무슨 개소리야? 내가 너한테 돈을 왜 받아? 미쳤냐? 오늘 약 안 먹었 냐?”
“그럼 뭔데?”
영찬은 현우의 말에 내심 감동했 다.
저 말은 곧 자신에게 두 아이템을 선물한다는 뜻이 아닌가.
‘새끼, 철들었네.’
그 순간 영찬의 감동을 산산이 부 수는 현우의 말이 들려왔다.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반 년간 설거지하기, 아니면 반 년간 청소하 기. 어떤 걸 고를 테냐. 영찬아.”
현우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올 라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가.
“…설거지를 하겠다.”
영찬이 이를 빠득 갈고는 자신의 방으로 발을 세게 구르며 걸어갔다.
그 순간이었다.
현우가 안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참, 영찬아. 내가 잊은 게 있어.”
영찬은 현우의 말에 본능적으로 고 개를 돌렸다.
현우는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 기 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뭔데?”
영찬은 불안함을 애써 감추며 입을 열었다.
“거래 수수료는 치킨 두 마리다. 요새 양파 올라간 그 치킨 맛있더 라. 그거랑 후라이드랑 시켰으니까 오면 돈 내고. 알았지? 세팅도 해 놓고. 난 씻고 나올 테니까.” 말을 끝낸 현우가 화장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강현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