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0화
프로리그의 PVP는 모두가 같은 조 건에서 기량을 겨뤘다.
데이터상으로는 어떤 차이도 없었다.
아이템, 스탯의 총량, 스킬.
모든 것이 같았다.
다른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이 가진 실력.
부우웅!!!
헬 나이트의 적색 장검이 깔끔한 궤적을 그렸다.
깔끔했지만, 가볍지는 않았다.
묵직한 일격이었다.
탐색전치고는 꽤 과하다고 생각될 수준의 공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프로 무대의 기본이 었다.
어차피 체력과 마력은 경기마다 리 셋된다.
아낄 필요가 없었다.
캉!!!
컹스맨의 검고 긴 장검이 적색 장 검을 그대로 튕겨냈다.
컹스맨 역시 시작부터 최선을 다했다. 평소의 복면투왕에 있을 쇼맨십은 아예 없었다.
헬 나이트의 검을 튕긴 직후, 컹스 맨은 땅을 강하게 박차고 헬 나이트 에게 쏜살처럼 다가갔다.
동시에 쏟아지는 벼락같은 검격.
강기는 솟아 있지 않지만, 마력은 실려 있었다.
당연히 위력도 엄청났다.
쾅!!
헬 나이트가 비스듬하게 움직인 컹 스맨의 검을 막아내자 폭음이 터졌다.
마력끼리 충돌한 결과였다.
두 사람은 조금도 쉬지 않고 계속 해서 부딪쳤다.
보는 이들조차 숨 쉬는 것을 잊을 정도로 치열했다.
- 흥미진진하네.
- 이게 진짜 PVP지. 한국 리그는 너 무 수준이 떨어져.
- 우리나라도. 일본도 그냥 쓰레기임.
- 미국이랑 유럽이 그나마 재밌는 데….
- 이런 경기는 아레나 위크에서나 보 겠지? 벌써 기대된다.
시청자들도 넋을 놓고 전투를 감상 했다.
오래간만에 보는 수준 높은 전투였 다.
투기장에서 마스터 랭커들의 스트 리밍도 분명 수준이 높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늘의 전투처럼 치열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기본적인 스펙 차이가 있었고 마음가짐의 차이가 있었기 에.
“누가 이길 것 같으십니까?”
영찬은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복면 투사, 이세계의 용사에게 물었다.
“빨간 놈이 져. 검은 놈이 이긴다. 그게 맞다.”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헬 나이트가 지고 컹스맨이 이긴다 는 말.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런데 왜 반말을….”
영찬이 물었다.
혹시 현우일까 싶어서.
“…콘셉트입니다.”
이세계 용사는 한참을 쉬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여기 용사의 말에 동의한다.”
그때 용사 옆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복면투사, 고대 제국의 황제가 끼어들었다.
영찬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자 황제가 짧은 말을 덧붙였 다.
“저도 콘셉트입니다….”
영찬은 고개를 숙인 뒤, 인상을 썼 다.
완전히 똥 밟은 기분이었다.
‘아… 이거 완전 하….’
평소 출연자들보다 수십 배는 더 이상한 사람들만 모인 것 같았다.
아니, 모였다.
그런 이들만 모였다.
하지만 그 안목과 실력만은 진짜였 는지 전투는 점점 컹스맨에게 유리 하게 흘러갔다.
정확하게는 그가 그렇게 만들고 있 었다.
컹스맨이 쏘아낸 검은 강기가 헬 나이트의 전면부를 때렸다.
쾅!!!
헬 나이트의 붉은 강기가 가까스로 검은 강기를 요격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을 터였다.
그랬으면 바로 그의 패배가 선언되 었을 것이고.
헬 나이트는 잠깐, 아주 잠깐이라 도 상황을 냉정하게 살필 여유가 필 요했다.
그러나 헬 나이트에게 숨 돌릴 시 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컹스맨 역시 그것을 잘 알고 있었 고 집요하게 노렸기 때문이었다.
쐑!!
컹스맨의 장검이 헬 나이트의 어깨 를 노리고 찔러왔다.
캉!
헬 나이트가 한발 물러서며 컹스맨 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한계에 달한 것 처럼 보였다.
아니, 한계였다.
“끝났네.”
“저게 프로리그의 PVP와 복면투왕 이 다른 점인데…. 신경이 너무 한 곳에만 쏠렸네.”
용사와 황제는 첫 경기가 끝났음을 단언했다.
헬 나이트의 위치는 연무장의 끝. 위태위태하게 걸쳐 있는 상태였다.
장외패도 패배인 만큼 헬 나이트는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순간 용사가 헛바람을 집어삼켰 다.
두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벌어 졌다.
헬 나이트가 기지를 발휘했다.
반대로 말하면, 컹스맨의 방심이 불러온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컹스맨의 하단으 로 돌진해 컹스맨의 몸을 뒤집어 버 렸다.
컹스맨의 머리는 정확히 바닥에 내 리꽂혔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려고 했 을 때는 이미 목 깊숙한 곳에 붉은 장검이 자리를 잡은 이후였다.
- 미쳤다, 미쳤어.
- 설계각 지려버렸고요.
- 아주 스무스하게 뒤집혔죠?
- 누군지 몰라도 컹스맨은 흑역사 제 대로 만들었네. 크크커크
첫 경기를 본 시청자들은 감탄 또 감탄이 었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다.
눈이 호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
았으니까.
“첫 경기는 지옥에서 돌아온 헬 나 이트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어느새 연무장의 위에 나타난 영찬 이 상황을 정리했다.
“마지막에 아주 멋있는 장면이 나 왔네요. 아마 복면투왕 역사에 길이 길이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찬의 말이 끝나자 컹스맨이 머쓱 한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허무하게 승리를 날렸다는 것을.
“오늘의 첫 승은 헬 나이트 님이 쟁 취했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갖고 다시 복면투왕을 시작하겠습니다.”
영찬의 말이 끝나자 복면투사들은 그들의 인벤토리에서 15인치 크기 의 사각 거울을 꺼냈다.
채팅창을 볼 수 있는 바로 그 거 울이었다.
- 님, 정체가 뭐임?
- 골목대장 아니져?
- 헬 나이트 정체가 누구일 거 같음?
- 근데 창피해서 어떻게 함? 거기서 그렇게 지네.
컹스맨의 채팅창이 가장 활발한 움 직임을 보였다.
그를 놀리는 채팅과 상대였던 헬 나이트의 정체를 묻는 채팅이 무수 히 많이 올라왔다.
컹스맨은 몇 번의 헛기침 후에 말 을 시작했다.
“음.... 솔직히 지금이라도 도망가 고 싶은데요. 골목대장 님이 오늘 나오신다고 해서 조금 더 참아보겠 습니다.”
컹스맨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아주 작 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제 생각에는 헬 나이트 님은 프랑 스의 에이케이 님 같습니다.”
- 에이케이?
- 내가 아는 그 에이케이?
컹스맨의 말 이후 채팅창은 수 배 르 불타올랐다.
그만큼 컹스맨이 언급한 그 이름이 갖는 파급력이 컸기 때문이었다.
에이케이.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근접 클래스 플레이어.
아레나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가상 현실 게임에서도 그는 프로게이머였 고 세계 최고 자리를 다투는 실력자 중의 실력자였다.
- 그럼 님은 누구임?
- 에이케이를 궁지로 몰아넣을 실력자 가 많지 않은데….
- 많지 않은 게 아니라 동급의 실력자 가 한 다섯 명도 안 될 듯 그 크 쿠 그.
“그건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컹스맨은 그의 정체를 묻는 채팅들 이 하나둘 다시 수면 위에 떠오르자 황급히 말을 돌렸다.
“휴식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는 두 번째 경기를 진행하겠습니다! 헬 나이트 님의 연승 도전을 저지하실 복면투사는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 길 바랍니다.”
영찬은 휴식으로 인해 느려졌던 스 트리밍 진행의 템포를 빠르게 가져 갔다.
분위기가 올라왔을 때 제대로 밀어 붙여야 했다.
‘그래야 TV로 봤을 때도 더 재미 있겠지.’
“없으십니까?”
영찬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제야 복면투사들이 하나둘 꼼지 락대기 시작했다.
그때 였다.
영찬이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말을 이었다.
“풉…. 이세계 용사 님이 도전하시 겠습니까?”
옆자리에 앉아 있던 황제에게 떠밀 려 용사가 억지로 연무대 위에 올라 왔다.
아니, 강제로 옮겨졌다.
“네? 네.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허공을 쳐다보는 황제를 째려보고는 영찬에 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습니다. 두 번째 경기는 1승에 성공하신 지옥에서 온 헬 나이트와 이세계를 구하고 돌아온 용사가 맞 붙습니다!!!”
영찬은 고함을 끝으로 다시 연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자연 스럽게 돌아갔다.
“이번에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황제 님?”
“헬 나이트가 집니다. 무조건 집니 다.”
황제는 영찬에게 반말하지 않았다. 영찬은 황제가 말한 내용보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왜 반말을 하지 않으십니까? 황제 님?”
“…해도 됩니까?”
황제가 영찬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물었다.
영찬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세요. 콘셉트가 확실해야 보시 는 분들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알겠다.”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왜 헬 나이트가 진다는 겁니까’?” 영찬은 이제야 그가 했던 말을 기 억해냈다.
“그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다. 부서 진 멘탈을 추스르기에 이곳은 전혀 좋은 환경이 아니지.”
영찬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 다.
수십 명의 스태프와 복면투사들이 앉아 있는 연무장.
‘멘탈을 케어해줄 사람이 없다.’
모두가 남이었다.
그렇다고 정체를 드러내고 얘기를 할 사람도 없다.
완전히 고립된 상태였다.
“재능으로 저 그뿐. 박살 난 상태인 용사를 물론 그 재능이 고.”
머저리를 이겼지만, 정신으로는 멀쩡한 이기기는 힘들겠지. 굉장하면 또 모르겠 황제는 정말 자신이 고대 제국의 황제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완벽한 몰입도였다.
‘이건 완벽한 혼….’ 그런 황제를 보는 영찬의 표정은 묘하게 변해갔다.
황제의 말대로 전투가 흘러갔다.
헬 나이트는 1경기를 치른 동일인 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 방적으로 당했다.
경기 내내 용사의 공격을 받아내기 만 하다 끝이 났다.
허무한 경기였다.
반전이 있던 1경기와는 완전히 달 랐다.
“다음 경기는 누가 나갈지 몰라도 꽤 힘들겠어. 기세를 제대로 탔어. 평소 이상의 실력을 보여줄지도….”
황제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영찬은 연무대의 위로 올라갔다.
‘용사가 계속 이긴다는 소린가?’
“헬 나이트의 전진은 여기까지였습 니다. 새로운 도전자, 이세계에서 돌 아온 용사의 연승을 막으실 분은 무 대로 올라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영찬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무대 위로 사람이 올라왔다.
헬 나이트와 상반되는 옷차림을 한 사람.
천상에서 내려온 화이트 윙이었다.
“제가 도전하겠습니다.”
그는 호기롭게 도전했다.
정말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가면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느껴졌다.
“그럼 3경기는 1승 0패의 돌아온 용사와 0승 0패의 천상의 화이트 윙이 맞붙습니다!!!”
영찬이 힘차게 소리를 지르고 연무 대에서 내려왔다.
이제는 익숙한 자리를 향해.
영찬은 황제의 옆에서 세 번째 경 기 역시 관람했다.
이번에는 치열했다.
화이트 윙은 2경기에서 보인 용사 의 패턴을 보고 짧은 시간에 노림수 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것은 먹혀들지 않았다. 기세가 오른 용사는 절정의 기량으 로 화이트 윙의 노림수를 정석으로 파훼했다.
“역시 용사가 이겼군.”
황제가 휴식 시간을 공표하고 돌아 온 영찬에게 은근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영찬도 가만있지 않았다.
황제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직접 나가실 생각은 없습니까? 벌 써 2승입니다. 세 번만 더 이기면, 용사가 복면투왕이 되고 맙니다.”
“그럼 본인이 한번 나갈까? 애송이 의 기세는 언제나 꺾을 수 있지.”
황제는 너무나 쉽게 영찬의 도발에 걸려들었다.
“다음 경기에 그럼 바로 나오시는 겁니다?”
영찬이 미소를 애써 참으며 말했 다.
“그냥 지금 올라가지.”
그 말을 끝내곤 정말로 움직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연무대 위로 터벅 터벅 걸음을 옮겼다.
“다음은 내가 도전하겠다!!!”
사위가 순식간에 정적으로 물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