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0화
‘이게 웬 떡이지?’
현우는 어색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꺼냈던 말이 이렇게 돌아오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금세 평정심을 되찾고 찾아 온 기회를 붙잡기 위해 노력했다.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 니까? 굉장히 흥미롭네요.”
휴고에게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내 기 위해 노력했다.
휴고는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의 얘 기에 집중하는 현우의 모습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탱이도 마농의 품에서 나와 현우에게 안겨 있었다.
탱이 역시 휴고의 얘기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마리오네뜨 일족에게 대대로 내려 오는 책 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 니다.”
휴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책을 읽듯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 마계의 일부를 지배하는 마왕들 이 흑마법사를 현혹했다. 그들이 원 하는 것을 주겠노라 약속했다. 그 대가로 그들의 중간계 진입에 가장 방해가 되는 루오스 제국의 황족들 과 아카데미를 졸업한 일부 인재들 의 처리를 요구했다. 멍청한 흑마법 사들은 마족들의 달콤한 거짓에 속 아 넘어갔다. 그 결과 대륙에 마족 이 강림했고 종국에는 드래곤이 개 입해 혼란에 빠진 대륙을 정리했다.
‘흔한 스토리네.’
흔하디흔한 스토리 라인이었다.
어느 가상현실 게임에도 있을 법한 얘기였다.
참신함은 없었다.
그러나 궁금함은 생겼다.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당연히 강했 겠지. 특히 론달은…. 근데 황족들은 왜?’
아카데미 졸업생들이 강하리라는 것은 직접 경험했기에 잘 알았다.
현우 자신이야 별다른 어려움이 없 이 클리어했다.
크레센트문의 다른 선수들에게는 전혀 쉽지 않았다.
단계마다 고비였고 고난의 연속이 었다.
“아카데미야 제가 직접 경험해봤으 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족 들이 그렇게 강했습니까? 마족들이 경계할 만큼?”
휴고는 현우의 질문에 감았던 두 눈을 떴다.
그러고는 그가 아는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문헌에 남아 있는 바로는 아카데 미는 본래 황족들을 위한 교육 기관 이었습니다. 그들은 제국 이전의 신 화시대 종족이던 거인족의 후예들입 니다. 정확히는 혼혈이라고 해야 할 까요? 그러나 본래의 혈통보다 강 한. 그런 신기한 종족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거인족?’
거인족.
익숙한 이름이었다.
플레이어 중에서는 그 누구보다 현 우가 잘 알 이름이기도 했다
“혹시 그 거인족이 5미터가 넘는 덩치고 주술사와 족장이 있는 그 거 인족 말입니까? 아르페리움을 성지 로 하는.”
현우는 과거 거인족 던전을 깼던 기억을 되살려 말했다.
마지막 남은 거인 반지를 얻었던 그곳.
“아시나요? 거인족에 관해 아는 인 간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 는데…. 심지어 모험가가 그것을….” 휴고는 정말 놀란 눈치였다.
현우의 입에서 거인족에 관한 정보 가 나올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이 반지 도 거인족들이 쓰던 것이고요. 거인 족 주술사가 반지를 보고서는 성물 이라고 했습니다.”
현우는 건틀렛을 벗고 그의 손을 들어 올렸다.
휴고가 보기 편하도록.
그런 그의 손가락에는 비슷하게 생 긴 반지 세 개가 있었다.
신화시대의 거인 세트.
휴고는 정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인족의 성물이라니.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휴고는 현우가 내민 손을 유심히 살폈다.
“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 까? 그것만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거인족과 관련된 내용 이 적힌 문헌을 가져오겠습니다.”
한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휴고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돌아온 휴고의 손에는 고 풍스러운 갈색 표지의 두꺼운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여기…. 거인족의 성물에 관해 적 혀 있습니다.”
휴고는 가져온 책을 펼쳤다.
그가 펼친 곳에는 그림들이 몇 장 그려져 있었고 그 밑에 빼곡히 설명 이 적혀 있었다.
“직접 보시겠습니까?”
휴고는 현우가 보기 쉽게 책을 돌 린 후에 현우의 앞으로 밀었다.
현우는 첫 번째 그림부터 차근차근 눈으로 훑었다.
‘흠…. 이게 처음 얻은 반지인가?’
가장 위쪽에 있는 그림은 투박한 무늬가 그려진 반지였다.
그림 밑에는 친절하게도 반지의 이 름과 설명이 적혀 있었다.
[거인의 형상을 담은 반지]
거인족의 성물 중 하나인 ‘용기’의 일 부. 세 개의 반지가 모여 한 개의 성물 을 이룬다. 반지의 안에 거인족의 형상 을 채워 넣었다.
‘아이템 이름이 똑같은데 설명이 조금 다르네?’
아이템 이름은 그대로였다.
현우의 아이템창이 있는 것과 동일 했다.
그런데 설명이 살짝 달랐다.
‘성물의 일부?’
어떤 것 중 하나라는 말은 어떤 것이 복수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한 개뿐인 물건에 저런 수식어를 붙이지는 않으니까.
‘다른 것도 있었나?’
현우는 빠르게 눈을 움직여 다음으 로 넘어갔다.
두 번째 그림은 그저 거무튀튀한 반지 였다.
이 역시 현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었다.
[거인의 영혼을 담은 반지]
거인족의 성물 중 하나인 ‘용기’의 일 부. 세 개의 반지가 모여 한 개의 성물 을 이룬다. 반지의 안에 거인족의 영혼 을 불어넣었다.
세 번째는 두 가지가 합쳐진 듯한 모습이었다.
거무튀튀한 반지에 알 수 없는 무 늬가 새겨진 반지.
[거인의 근원을 담은 반지]
거인족의 성물 중 하나인 ‘용기’의 일 부. 세 개의 반지가 모여 한 개의 성물 을 이룬다. 거인의 근원을 담았다. 여기까지는 현우가 아는 내용이었 다.
그 밑의 그림부터는 현우 역시 처 음 보는 것이었다.
새로운 그림은 팔찌였다.
팔찌는 새하얀 색에 줄을 꼬아놓은 것처럼 생겼다.
거기에 불규칙한 검은 줄무늬가 새 겨져 있었다.
[하늘의 지혜]
거인족의 성물 중 하나인 ‘지혜’. 거인 족의 드넓은 지혜를 상징한다. 주로 주 술사의 우두머리가 지니고 있다.
설명까지 모두 읽은 현우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나타났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에픽의 냄새가 풍겼다.
또 한 번의 스펙 상승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근데…. 주술사들이 쓰던 거면….’
“애매하네....”
현우는 그도 모르는 사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애매? 혹시 그림과 가지고 계신 반지가 같지 않으십니까?” 현우의 말을 들은 휴고가 조심스럽 게 물었다.
현우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아닙니다, 말이 잘못 튀어나왔네 요. 그림의 반지는 제가 가지고 있 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럼 정말 거인족의 성물을 수습 한 것이군요. 놀랍습니다….”
휴고의 말은 거기서 끝났다.
뒤에 이어져야 할 뭔가가 없었다.
‘퀘스트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이 정도 얘기가 진행됐으면, 예의 상으로라도 퀘스트가 뜨는 게 인지 상정이 었다.
결국 목이 마른 현우가 우물을 팠 다.
“혹시 그 문헌에 이 팔찌가 있을 만한 곳이 적혀 있지 않나요? 탱이 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서요. 저야 이 반지 세 개면 충분하니까요.”
약간 입에 발린 소리도 했다.
나는 전혀 욕심이 없다.
다만 탱이에게 선물하고 싶다.
이건 내가 갖는 게 아니라 당신의 자식인 탱이에게 줄 선물이다.
이런 뜻을 돌려서 말했다.
‘뭐…. 나한테 쓸모가 없으면 당연 히 주겠지만.’ 물론 현우에게 필요한 옵션이 있다 면, 그가 끼고 있는 팔지를 빼서 주 는 한이 있더라도 성물은 현우 자신 이 사용할 생각이었다.
“글쎄요…. 신화시대의 기록은 저 희 일족에도 거의 없어서….”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부정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게 아니면, 다른 거라도.’
“그럼 루오스 제국의 흔적이 남아 있을 만한 곳은 혹시 아십니까? 가 령 황궁의 위치라든지….”
현우는 끈질기게 물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먹이를 문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 다.
“루오스 제국의 황궁 위치는 다행 히도 적혀 있습니다. 다만…. 현재의 기준으로는 어디인지는 확실히 모르 겠습니다.”
휴고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현우는 그 어느 때보다 고개를 세 차게 흔들었다.
저건 미안해하지 않아도 됐다.
왜?
‘내가 찾아가면 되지. 퀘스트 아니, 실마리만 던져줘도 땡큐지.’
그러니까 대답만 해주면 됐다.
나머지는 현우가 할 일이었다.
“대충 아는 것만 말해주시면 됩니 다. 자세한 건 제가 직접 찾겠습니 다. 그래야 탱이에게 줄 때 보람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현우는 계속해서 휴고를 졸랐다.
휴고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이제는 그의 옆에 있는 마농이 나섰다.
“그냥 말해줘요. 어차피 우리 아이 의 선물이라는데. 아니면 당신이 구 해올 거예요? 도시락 싸줄 테니까 갔다 올래요?”
마농은 조곤조곤 쏘아붙였다.
그러나 기세만큼은 강렬했다.
금방이라도 휴고를 어떻게 할 기세 였다.
모성애는 그만큼 무서웠다.
“아니…. 말해주는 건 어렵지 않다 니까? 근데 괜히 고생만 시키는 건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그랬어.”
휴고는 마농에게 양손을 흔들며 말 했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문헌에 적힌 루오스 제국의 수도는 북쪽 빙하지 대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지도는 필 사해 드리겠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 이 흘러 지형의 변화가 있어 정확하 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현우는 빙긋 웃었다.
왜 휴고가 망설였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기준에서 그 정도면 지극히 호조건이 었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워낙에 헤매는 것에는 도가 튼 현 우였다.
지도 같은 것 없이도 잘만 돌아다 녔다.
“괜찮습니다. 그 정도면 정말 좋습 니다. 지도만 있으면 됩니다.”
“그럼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주시 면, 바로 그려 드리겠습니다.”
***
“탱이야, 근데 이렇게 바로 가도 돼? 조금 더 있다 가지. 왜 이렇게 서둘러?”
현우는 다급하게 떠날 것을 재촉하 는 탱이 때문에 붕붕섬을 빠져나왔 다.
휴고에게서 지도를 건네받자마자 나온 셈이었다.
‘레온 미어한테도 들리는 건데.’ 붕붕섬에 있는 드래곤, 레온 미어 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드래곤은 언제나 큰 퀘스트를 제공 해 주는 좋은 공급원이었다.
당연히 가끔은 얼굴을 비치면 좋았 다.
“조금 후면 밥 먹을 때다. 하마터 면 밥을 먹고 을 뻔했다. 나한테 고 마워해라, 주인 놈아.”
탱이는 공포가 뒤섞인 눈으로 현우 를 쳐다봤다.
“그렇게 밥 먹는 게 싫어?”
“주인 놈이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 렇다. 아까 아빠의 표정을 보지 못 했나. 도시락을 싸준다고 하니 금방 이라도 죽을 것처럼 굴었다.”
아까의 비밀이 풀렸다.
휴고는 마농의 재촉에 당황한 것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주겠다는 말 한 마디에 당황한 것이었다.
“정말 맛없나 보구나.”
“그렇다. 사실 나는 잘 몰랐다. 주 인 놈을 만난 후에야 알게 됐다. 엄 마가 주는 밥이 맛이 없다는 사실 을. 식사 시간만 되면 왜 아빠가 슬 쩍 사라졌는지를.”
말을 마친 탱이는 현우의 품에 뛰 어들었다.
현우는 탱이를 조심스럽게 받아들 었다.
“근데 이제 빙하지대로 가면 고기 못 구워 먹을 텐데. 괜찮겠어?”
그러고는 탱이에게 은근한 목소리 로 속삭였다.
“안 된다. 우선 요리부터 사서 가 야 한다.”
탱이가 현우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칭얼댔다.
“그래, 가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