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현우는 자연스럽게 콜로세움에 입 장했다.
광폭한 기세를 흩뿌리는 현우를 누 구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가 없었다.
괜히 건드렸다가 팔 하나가 날아간 다 하더라도 누구에게 하소연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계는 그런 곳이었으니까.
‘좋아, 이대로 에르갈 자작을 찾으 면 되겠어.’
현우는 힐끔거리는 시선조차 느껴지 지 않는 것에 굉장한 만족을 표했다.
‘진작 이렇게 다닐 걸 그랬나?’
현우는 감추고 다니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아레나를 시작한 이후로는 항상 정 체를 숨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 이러고 다니 는 미친놈이 있을 리가 없지.’
사실 있기는 있었다.
자신의 강함을 있는 대로 뿜어내는 이들이 없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런 이들 대부분이 실제로는
랭커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고 일부 도달한 이들조차도 때와 장소를 가 릴 줄은 알았다.
주변에 있는 플레이어들보다 자신 이 강하다는 판단이 섰을 때만 그렇 게 기세를 잔뜩 흘리고 다녔다.
“콜로세움을 처음 방문하신 것이라 면, 제가 약간의 도움을 드려도 되 겠습니까?”
그런 현우에게 한 마족이 조심스럽 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마족은 정말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정중할 수는 없 었다.
혹시라도 현우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까 하는 심경이 절절하게 겉으 로 드러났다.
“도움? 도움이라…. 좋지. 넌 내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지?”
현우는 오만한 눈빛으로 마족을 내 려다보며 말했다. 현우의 시선이 마 족에게 옮겨짐과 동시에 현우의 기 세 역시 마족에게 집중됐다.
“콜로세움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 엇이든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영지 전반적인 것 역시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마족은 강력한 기세를 애써 버텼 다.
두 발이 벌벌 떨림에도 말만큼은 절대 더듬지 않았다.
책잡힐 만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 다.
‘이쯤에서 기세를 거두고….’
“그래? 그건 참 만족스럽군.”
현우는 귀족의 페르소나를 뒤집어 쓰고 행동했다.
귀족으로 보일 법한 행동 양식을 상상해서 따랐다.
현우가 기세를 거두자 마족은 그제 야 살겠는지 들릴 듯 말 듯 한 옅 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자세를 고치고 현우 가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
무엇이 필요한지 먼저 묻지 않았 다.
“귀족들이 모여 있는 곳은 없나? 이곳은 냄새가 나서 말이지…. 당최 구경이란 걸 해볼 수가 없군.”
현우는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봐도 고고한 귀족이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특별석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에르갈 자작이 지금 콜로 세움에 있나?”
“예, 자작님은 지금 콜로세움에 계 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콜로세움 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계십니다.”
마족은 현우의 입에서 에르갈이라 는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조금 편한 얼굴을 했다.
그의 뒤에 있는 주인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눈앞의 귀족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 르겠지만, 마족의 기준에서 에르갈 자작은 엄청난 강자였다.
그런 주인이라면, 이 마족과도 충 분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 같았 다.
“자작님께 안내해드릴까요?”
마음에 여유가 생기자 입은 더욱 자유로워졌다.
이전에는 하지 못했던 행동도 할 수 있게 됐다.
“좋지, 에르갈 자작이라…. 말로만 듣던 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 는군.”
현우는 짐짓 호탕한 표정으로 웃으 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싸늘하게 식 어 있었다.
마족은 현우보다 몇 발자국 앞에서 먼저 걸었다.
현우는 고개를 정면에 고정한 채로 눈만 굴려 주변을 살폈다.
‘아예 처음 보는 곳인데….’
마족이 현우를 데리고 가는 길은 현우가 처음 보는 길이었다.
물론 현우도 에르갈의 콜로세움에 온 것이 이번이 고작 두 번째였다.
현우가 아는 길이 많을 리가 없었 다.
그러나 현우는 그가 아는 그 길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카이 박스 중 하나에 있을 거라 고 생각했는데….’
스카이 박스.
에르갈 자작은 그곳에 있지 않았 다.
예상이 빗겨 나갔다.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었다.
콜로세움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 러운 소재로 마감된 길.
그곳을 따라 걷고 있었다.
“역시 주인이 머무는 곳이라 이렇 게 꾸민 것인가? 콜로세움과 퍽 어 울리는군. 에르갈 자작에게 이런 취 향이 있는 줄은 상상조차 못 했어.”
현우는 비웃음을 띤 채로 말을 홀
렸다.
그러자 앞서 걸어가는 마족의 등이 살짝 떨렸다.
현우는 그런 마족의 반응을 즐겼 다.
하릴없이 걷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잠깐의 장난이었다.
‘나중에 이 영지를 얻은 다음에 잘 해주면 되겠지.’
지금 골려준 대가는 톡톡히 치를 생각이었다.
우선은 에르갈 자작을 죽이고 반지 를 빼앗는다.
그렇게 이 영지의 주인이 된 후에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면 괜찮을 거 라는 얕은 생각이었다.
“아직 멀었나? 쓸모없이 깊숙이 처 박혀 있어. 겁이 이렇게 많아서야 자작이라는 이름이 아깝군.”
현우의 연이은 비아냥에 마족은 입 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제는 그도 알았다.
저 비꼼은 진짜 에르갈 자작을 향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저 자신을 놀리는 것에 불과하다 는 걸 말이다.
“도착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문 안 쪽에 에르갈 자작님이 계십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그만 돌아가 봐. 혹 귀족들의 대화를 들을 셈인 가?”
마족은 고개를 빠르게 휘저었다.
절대 그럴 의도가 없다고 몸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마족은 꽁무니에 불이라도 붙은 것 처럼 올 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 로 사라졌다.
‘갔네.’
마족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을 확인한 현우는 탱이를 소환했다. 탱이가 새로 얻은 스킬의 효과를 받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싸울 테니까…. 처음부터 있는 게 나을 테지.’
“탱이야, 나와.”
탱이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한 빛 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과 흑색의 빛이 묘한 조화를 이루며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왔다.
“미친....”
현우의 입에서 자동으로 욕이 튀어 나왔다.
현우는 초인적인 의지로 중간에서 겨우겨우 끊었다.
이게 무슨 깽판인지 몰랐다.
현우는 빠르게 탱이의 주변에 마력 을 흩뿌렸다.
검붉은 마력으로 작은 반구를 생성 해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는 빛을 차 단했다.
“탱이야, 오늘은 조용히 나와야 한 다고 했지. 왜 그래?”
현우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로 탱이를 바라봤다.
“미안하다, 잊었다. 나쁜 놈을 혼내 줄 생각에 신이 났다. 진짜 미안하 다, 주인아.”
탱이는 고개를 들어 현우를 쳐다봤다.
탱이의 얼굴은 진심으로 미안한 표 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조용히 하고 등에 잘 업혀 있어. 소리 내거나 움직이면 안 되 는 거 알지?”
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부탁했다.
“알았다, 주인 놈아. 정말 조용히 있겠다.”
탱이는 자기만 믿으라는 듯 가슴을 두들기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현우의 등 뒤로 돌아가 땅을 박찼다.
날아오른 탱이는 현우의 어깨에 앞 발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읍!!!”
현우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겨우 참아냈다.
등에 느껴지는 묵직함이 남달랐다.
“야, 말은 하고 뛰어야지.”
“내 주인은 허약하지 않다고 믿었 다.”
탱이는 현우가 더는 반박할 수 없 는 말을 꺼냈다.
탱이는 현우의 등에 완전히 껌딱지 처럼 매달렸다.
앞발은 어깨에 걸치고 뒷발은 옆구 리에 걸쳤다.
앞에서 보면 현우의 옷에 황금색 털이 붙어 있는 정도로만 보였다.
“그럼 들어간다.”
현우는 에르갈 자작이 있을 공간을 향해 문을 밀었다.
‘ 없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현우의 눈 에는 에르갈 자작으로 보이는 마족 은 없었다.
여러 가구는 있었지만, 생명체 같 은 건 없는 듯했다.
그리고 공간은 무척 넓었다.
화려한 장식들과 가구가 배치되어 있어도, 전혀 좁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에르갈 자작은 어딨지?’
현우는 고개를 돌려 공간을 훑었 다.
마족은 분명 문 안쪽에 에르갈 자 작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문 안에는 에르갈 자작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여기 어디에 공간이 따로 있 다는 소린데….’
특별한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넓기는 했으나 어딘가로 이동할 만 한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걸었다.
혹시라도 있을 함정에 유의했다.
‘ 없다.’
이곳저곳을 뒤져도 쓸모없는 책이 나 가구들만이 있을 뿐 통로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궁!!!
뭔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식탁이 반으로 갈라지며 한 인영이 나타났 다.
나타난 인영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에르갈 자작이었다.
에르갈 자작은 현우를 알아보지 못 했다.
에르갈 자작과 갈등이 있었을 당시 현우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가면을 벗고 있는 지금 못 알아보 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옷차림도 비슷했지만, 또 달랐다.
지금은 탱이의 황금 털이 곳곳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검은색 일색이던 당시와 같은 느낌 을 받을 수 있을 수가 없었다.
“네놈은 누군데 남의 방을 제집 드 나들 듯 들어와 있는 게냐?!!!”
에르갈 자작은 콜로세움에 마련된 자신의 집무실에 서 있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단 호통은 쳐 놓았지만, 그의 머 리는 잠시 멈춘 상태였다.
‘일단 죽여야 하나? 나보다 강하면 어떡하지? 누가 보낸 놈이지?’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리에 휘몰아쳤 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우선 눈앞의 침입자를 죽이는 게 중요했다.
누가 보냈든 정체가 무엇이든 그것 은 중요하지 않았다.
콜로세움의 비밀을 안 것이 가장 중요했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그럼 죽어 라!!!”
에르갈 자작은 양손에 새카만 마력 을 태우며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공간이 넓다고는 하나 에르갈 자작 이 한 번 뛰었을 때 끝과 끝을 오 갈 정도에 불과했다.
에르갈 자작은 단 한 번의 도약으 로 현우의 눈앞에 나타나 검게 타오 르는 손톱을 휘둘렀다.
다섯 줄기의 마력이 현우를 덮쳤 다.
쾅!!!
어느새 현천도를 뽑은 현우가 눈앞 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냈다.
에르갈 자작은 정말 진심을 다할 생각인지 전신에서 강렬한 마력을 뽑아낸 상태였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정도로 강렬한 기세였다.
‘ 약해.’
하지만 현우의 눈에는 에르갈 자작 이 그렇게 강해 보이지 않았다.
원래 해볼 만하다고 느꼈었다.
지난번에도 도망친 이유는 에르갈 자작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수많은 마족과 마 수 때문이었다.
혹시나 생길 변수 때문에 도망간 것이었다.
‘이번에는 에르갈 자작 혼자뿐.’
하지만 이번에는 에르갈 자작과의 일대일 싸움이었다.
동등한 조건이었다.
아니, 현우가 더 유리했다.
현우에게는 탱이라는 조커가 있었 으니까.
푹!!!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색 얼음 창이 에르갈 자작의 복부를 관통했다.
“주인 놈아, 내가 맞췄다.”
검은 창의 주인은 탱이였다.
현우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탱이 는 에르갈 자작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아이스 마법으로 창을 생성 해 그대로 공격에 성공했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잡겠군.’
현우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 다.
철저히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 었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일이 계획한 대 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현우의 느긋함이 화를 불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