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7화
‘여전히 아름다워.’
현우는 한결같은 아름다움을 간직 하고 있는 붕붕섬을 보고 탄성을 터 트렸다.
녹음이 우거지고 파랗다 못해 하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지나다니는 자 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정화 되는 것 같았다.
‘칙칙한 마계에 있다 와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 그전에 있던 곳이 마계라 더욱 대 비되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황량한 벌판이나 폐허는 아 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의 색이 대체로 어두웠다.
밝고 아름다운 붕붕섬과는 정반대 였다.
‘탱이라도 불러서 쉬고 싶기는 하 지만….’
그렇게 된다면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다.
분명 밥이라도 먹자고 조를 것이고 자신은 그 애원엔 넘어갈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안 부르면 삐치겠지?’
현우는 어쩔 수 없이 탱이를 불렀 다.
최근에 탱이에게 소홀했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탱이야, 뭐하니?”
현우는 노래를 부르듯 리듬을 넣어 탱이를 소환했다.
“응? 주인?!!”
탱이가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현우 를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소환된 탱이는 손에 무 언가를 쥐고 있었다.
“밥 먹고 있었구나?” 탱이의 손에 들린 것은 반쯤 먹은 돼지고기 꼬치였다.
“그… 그렇다. 밥을 먹고 있었다. 근데.... 여기엔 무슨 일이냐.”
탱이는 낯익은 붕붕섬의 풍경을 보 며 물었다.
“그 동굴에 볼일이 있어서. 왜?”
“좋아서 그런다, 좋아서.”
탱이가 꼬치를 우적우적 씹으며 현 우에게 다가와 몸을 비볐다.
“어떻게 가서 계속 밥을 먹을래? 굳이 네가 여기 있을 필요는 없으니 까….”
현우가 탱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탱이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지금 현우가 가는 건 전투가 아니 라 대화를 나누러 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붕붕섬에 왔는데 내가 어 떻게 가냐, 주인 놈아. 그런 말 하 지 마라.”
탱이는 어느새 나무막대밖에 남지 않은 꼬치를 그대로 아공간에 집어 넣고는 현우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래, 그럼 같이 가자.”
현우는 탱이를 안고 땅을 박찼다.
이제 동굴이 멀지 않았다.
붕붕섬 중앙 동굴 깊숙한 곳에 있 는 검은색의 남성, 레온 미어는 동 굴 한편에 있는 웅덩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웅덩이는 대략 지름이 1미터가 겨 우 넘을 정도로 작았다.
하지만 찰랑거릴 정도로 물로 가득 했다.
‘모험가들의 성장이 어느 정도 올 라왔어.’
웅덩이에 있는 물은 형형색색의 그 림을 그리고 있었다.
웅덩이에 비친 수많은 사람들은 거 대한 괴물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레온 미어가 보는 것은 모험가 즉, 플레이어들의 레이드였다.
발터 산맥 근처에서 이뤄지는 보스 레이드는 모조리 관찰하고 있었다.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
플레이어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레 온 미어의 기대감도 덩달아 상승했 다.
그가 맡은 역할에서 탈피하기 위해 서는 모험가들의 성장이 필수적이었 기 때문이었다.
“응?”
그 순간 레온 미어의 신경을 거슬 리게 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동굴에 침입했다.’
기척의 주인은 동굴이 익숙하다는 듯 거침없이 움직였다.
최하급 마수, 로멜론을 단숨에 찢 어발기고 레온 미어가 있는 동굴의 안쪽으로 질주했다.
‘그 인간이군….’
레온 미어는 달려오는 기척의 주인 이 누군지 알아챘다.
강현우.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끼친 모험 가.
‘괴물의 제자.’
무슨 수를 쓴 것인지 황궁의 괴물 과 비슷한 수준이었던 또 다른 괴물 이 한순간에 더욱 강해졌다.
레온 미어는 그것이 현우와 관련이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정체되어 있던 기 운이 순식간에 늘어날 수가 없기 때 문이었다.
‘덕분에 일족의 걱정이 더욱 늘었 지….’
그 때문에 일족 어르신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을 생각하자 레온 미어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 을 느꼈다.
탱자탱자 놀던 양반들이 허둥지둥 뛰어다니는 꼴을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었다.
“레온 미어 님? 어디에 계십니 까?!!!”
그 순간 멀리서 그 모험가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레온 미어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쪽으로 와. 난 더 안쪽에 있으 니까.”
♦ ** “며칠 만에 다시 뵙는 것 같습니 다, 레온 미어 님.”
현우의 말에 레온 미어가 옅은 미 소를 지었다.
“그런 것 같긴 하네. 그건 다 자네 가 너무 많이 찾아와서 그런 것이 지. 애인도 아니고 말이야…. 너무 잦아. 조금 줄일 필요가 있어.”
레온 미어가 농담을 흘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전혀 농담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너무 그렇게 꺼리지는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정말 레온 미어 님께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현우는 그런 것을 전혀 신 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내게? 내게 도움이 된다고?”
현우의 말에 레온 미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던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현 우를 쳐다봤다.
레온 미어는 말이 아닌 얼굴로 현 우를 재촉했다.
“마계는 중간계 침공을 하지 않을 겁니다. 레온 미어 님이 제 부탁을 들어주신다면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지?”
레온 미어의 표정이 또 한 번 변 화했다.
세상 진지한 표정이었다.
“침공 가능성이 아예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레온 미어 님은 혹시 마 계의 세력 구도에 관해서 알고 계십 니까?”
“일곱 명의 마왕이 있고 72개의 도시를 놓고 세력 다툼을 한다는 것 쯤은 알고 있지.”
“그럼 얘기가 편하겠습니다. 얼마 전까지 마계의 세력 구도는 팽팽했 습니다. 중간계 침공을 주장하는 강 경파 마왕 셋, 그럴 바에는 마계의 숙적인 신계를 침공하자는 마왕이 셋. 그리고 형식상 중립을 표방하는 마왕이 하나. 이들은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현우는 마계의 전반적인 상황을 설 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차후에 할 부탁을 위해 던 지는 떡밥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모르는 레온 미어는 잠자코 현우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최근에 그 구도가 무너졌 습니다. 강경파 마왕 중 한 명이 휘 하의 귀족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죠. 새로운 마왕은 중간계 침공을 탐탁 지 않아 했습니다.”
“그래서 마계에서 중간계 침공을 하지 않는다?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당연합니다. 아직도 마왕 두 명이 중간계 침공을 부르짖고 있으니까 요. 그들에게는 명분도 있습니다. 마 계의 전력이 너무 팽창되어 있다. 이것을 해소해야 마계의 균형이 유 지된다. 이 논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죠.”
“마계의 존속을 위해 마족과 마수 들의 숫자를 줄이겠다? 그 수단으로 중간계 침공을 선택했다 이건가?” 레온 미어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내가 이런 곳에 처박혀 있어야 했다니….’
레온 미어에게 저들의 사정은 조금 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계가 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 가.
‘망하면 더 좋지.’
“그래서 부탁이라는 건 뭐지?”
사정을 대략적으로 들은 레온 미어 는 이제 현우의 용건이 궁금해졌다.
“제 영지에 마계로 향하는 마법진 을 설치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 습니다.”
레온 미어는 오늘 정말 다채로운 표정을 지었다.
긴 세월을 사는 드래곤은 본래 감 정 표현이 무딘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현우 앞에만 서면 그런 것이 별 의미가 없었다.
현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마법진을? 그건 안 될 말이야. 내 가 해주고 싶어도 일족의 어르신들 이 반대할 게 분명해.”
레온 미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들어줄 수가 없는 부탁이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 그걸 말이라고 해? 명분도 없고 이득도 없다. 그렇다면 하지 않는 편이 좋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 는 레온 미어의 입장에선 이게 당연 한 답이었다.
“그래도 일단 제 생각이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들어는 주셔 야 하는 것 아닙니까?”
“들어는 주지. 하지만 마법진은 안 돼.”
레온 미어는 단호했다.
하지만 현우는 그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마왕 두 명이 도와준다는데 안 하 면 멍청이지.’
발레르와 요한 블레이크가 적극적 인 조력을 약속했다.
문제가 생기려야 생길 수가 없었 다.
“레온 미어 님이 만들어주신 마법 진을 통해 모험가들을 마계로 보낼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최하급 마족 과 마수들을 사냥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강경파들이 내세우던 명분이 사라지게 되고 중간계 침공은 일어 나지 않겠죠.”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뭐 그런 전략인 것 같은데….”
레온 미어가 말끝을 흐렸다.
저 계획이 성공적으로 실행되기 위 해서는 매우 안전한 땅이 필요했다.
마수와 마족들의 침입이 불가능한 지역이.
“마왕 둘이 저를 돕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간계 침공을 바라지 않습 니다. 그저 마계의 전력이 일정 수 준 이하로 내려오기만을 바라고 있 습니다.”
현우는 그제야 사실을 밝혔다.
그 말을 들은 레온 미어의 얼굴이 충격으로 굳었다.
현우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 었다.
‘마왕이 왜 인간을 돕지?’
그때 현우가 그런 레온 미어의 생 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말을 이었다.
“한 명은 저도 왜 돕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믿을 만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저와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밀접한 관계?”
“제 스승님의 스승님이십니다.”
“요한 블레이크….”
레온 미어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요한 블레이크.
그는 이름조차도 금기시되는 자였 다.
“놈이 마왕이라고? 하하…. 마왕이 라.... 아주 잘 어울리는군. 평생 그 자리에 눌러앉았으면 좋겠군, 그래.”
하지만 이내 레온 미어의 표정이 밝아졌다.
마왕이 되었다는 것은 움직임에 제 약이 생겼다는 것과 같다고 받아들 인 것이었다.
‘둘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나?’
현우는 요한 블레이크의 이름을 듣자마자 격하게 반응하는 레온 미어를 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거 렸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며 관심을 껐다.
그들 사이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이 순간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법진을 설치하 느냐 아니면 그렇지 못하느냐였다.
“이 정도면 나름 성공할 가능성이 큰 계획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레온 미어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우는 다시 한 번 은근한 목소리 로 물었다.
레온 미어의 입에서 이전과는 다른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왕의 도움이 있다면…. 분명 터 무니없는 계획은 아니다. 하지만 그 렇다고 해서 무작정 마계로 가는 마 법진을 그려줄 수는 없는 법. 여기 에 마왕의 약속을 받아와라. 그렇다 면 내가 그것을 가지고 일족의 어르 신들을 설득해보겠다.”
레온 미어는 현우에게 돌돌 말린 하얀 막대기를 내밀었다.
현우가 그것을 받아들자 눈앞에 메 시지창이 나타났다.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마왕의 약속]
마계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을 설치 하기 위해서는 드래곤의 도움이 필요하 다. 마왕들에게서 중간계를 침입하지 않 겠다는 약속을 받아 드래곤의 도움을 받자.
등급 : SSS+
조건 : 마왕의 서명 0/2, 서명을 레온 미어에게 전달하기 0/1
보상 : 경험치, 원하는 장소에 마계 이 동 마법진 설치.
드디어 현우가 원하는 퀘스트가 나 타났다.
“알겠습니다, 제가 금방 서명을 받 아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현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 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