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1 화
“검은돈?’’
황제가 못 믿겠다는 듯 현우에게 되물었다.
검은돈이라는 말을 그의 바로 앞에 서 듣기는 처음이었다.
“예, 검은돈 말입니다.”
현우가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말했다.
“그게 제국의 황제인 나한테 필요 하다고 생각하나?”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제국의 창고가 부유한 것은 사실 이나 폐하께서도 그 돈을 사용하실 때에는 꽤 큰 저항에 부딪히시는 것 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우도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이 억지나 다름없다는 것을.
누가 황제에게 그렇게 딴지를 걸겠 는가.
지닌 목숨이 두 개가 아니고서는.
“형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백작이 모르지는 않을 텐데?”
“그냥 한번 넘어가 달라는 것을 폐 하께서 혹시 모르시지는 않으시겠지 요?”
현우는 유들유들하게 황제의 말을 받아쳤다.
그런 것과는 달리 속은 바싹 타들 어 가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안전한 곳이고 어디부 터가 데드라인인지 알 수 없었기 때 문이었다.
하지만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번 일은 분명 황제의 마음에 들 것이었다.
왜?
‘재밌는 일이니까.’
이미 현우의 행동은 황제의 흥미를 끌었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지. 수중에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이 니.”
황제에게서 긍정적인 답이 나왔다.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계획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드래곤의 도움을 받아 프니스에 마계로 이동할 수 있는 마법진을 만 들었습니다.”
“잠깐, 어디로 가는 마법진?” 황제가 대번에 현우의 말을 잘라먹 었다.
마계.
그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분명 현 우의 입에서 마계로 가는 마법진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돈이 문제가 아니군. 진짜배기는 그거였어.”
“안 됩니다, 폐하. 마계는 아직 위 험한 곳. 폐하께서 가시기에는 불안 정한 지역입니다. 후에 모험가들이 어느 정도의 기반을 닦은 후에 가시 지요.”
현우는 마치 제국의 귀족 NPC들 이 할 법한 멘트를 날리며 황제를 만류했다.
정말 지금이라도 황제가 프니스로 떠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농담이야, 농담. 설마 지금 당장 마계로 갈까.”
황제가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말했 다.
하지만 현우에게는 전혀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진짜 갈 것 같아서 그렇지….’
분명 황제는 당장에라도 튀어나갈 기세였다.
“그래서 그다음은?” 황제가 평소와 같은 얼굴로 현우를 재촉했다.
하지만 두 눈에 서린 묘한 열기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다.
“마법진에 믿음직스러운 이를 파견 해주시면 모험가들에게 마법진 이용 료를 거둘 생각입니다.”
“얼마나 거둘 생각이지?”
“마법진을 이용하는 모험가들의 평 균 수준이 높은 편이니 명당 100골 드 정도를 거둘 생각입니다.”
“그럼 분배는? 전부를 바칠 생각은 아닐 테니.”
“마음 같아서는 그러고 싶지만…. 저도 영지를 꾸려야 하니… 삼을 드 리겠습니다.”
현우의 계획은 칠 대 삼 분배였다.
현우가 70퍼센트를 갖고 황제에게 30퍼센트를 상납하는.
하지만 그것을 황제가 용납할 리가 없었다.
“삼?”
“ 예‘?”
“ 삼‘?”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삼?”
“칠....”
황제는 정확히 세 번을 더 물었다.
그러자 비율이 뒤바뀌어 현우에게 남는 게 삼이 되었다.
놀라운 반전이었다.
‘너무 조금 받는 것 같기는 하지 만....’
그래도 좋았다.
이걸로 플레이어들에게서 돈을 합 법적으로 받아낼 수 있었으니까.
현우가 프니스의 NPC를 앞세워 돈을 받아낸다면 누군가가 의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우가 아닌 황제가 보낸 NPC가 돈을 걷는다면 얘기가 달라 진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책임자를 파견해주지. 명분은…. 마계 선발대 의 역할은 매우 중요해 아무나 갈 수가 없다. 정 가고 싶으면 100골드 를 낼 수 있는 모험가만이 간다.”
현우가 끄덕였다.
저런 이유까지 덧붙인다면 환상적 이었다.
“그럼 돈은 어떻게….”
“골드 버그 상단을 통하라.”
“알겠습니다, 폐하. 그럼 담당자로 는 누가….”
“믿을 만한 자로 보내주지.”
“감사합니다, 폐하.”
현우가 황제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 고는 몸을 돌려 대전 밖으로 걷기 시작했다.
“폐하, 혹시 르브론 공작이 요새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을 들으셨습니 까?”
대전을 빠져나가던 현우가 돌연 멈 춰 서서 황제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는데? 언제 부터 자리를 비웠지? 이유는?”
황제는 정말 처음 듣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하나뿐인 제자가 마계에 가는 것 을 걱정해 따라갔다고 합니다.”
이어진 현우의 말에 황제가 박장대 소를 터트렸다.
“좋아, 좋아!!! 그런 이유라면 제도 를 비울 만해! 그렇게 알고 있지.”
현우는 크게 웃는 황제를 뒤로하고 르브론의 저택을 향해 이동했다.
“스승님, 연약한 제자가 왔습니 다!”
늘 르브론이 있는 연무장에 도착한 현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알았으니 조용히 하고 그만 들어 와라.”
진중한 르브론의 목소리가 연무장 밖에 서 있는 현우의 귓가에 울렸 다.
“스승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현우는 르브론을 향해 90도로 허 리를 숙였다.
그런 인사를 받은 르브론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현우가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이놈이 뭘 잘못 먹었나?’
“오늘은 또 무슨 소리를 하러 온
게냐. 별일이 아니면 얼른 가라.”
왠지 모르게 본능을 자극하는 불안 감에 르브론은 현우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현우는 순순히 따르지 않았 다.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 니까.
“블레이크 공작님을 뵈었습니다.”
“사부님을?”
단단하게 굳어 있던 르브론 공작의 얼굴이 깨져나갔다.
그만큼 현우가 요한 블레이크를 만 났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다.
“블레이크 공작님은 마계에 계셨습 니다. 우연히 마계에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뵐 수 있었습니다.”
“마계에서? 거참 어쩐지 소식이 없 다 싶었는데…. 결국 또 사고를 쳤 어.”
르브론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 다.
요한 블레이크는 무슨 수를 써도 찾을 수 없었다.
마계에 있었으니 못 찾는 게 당연 했다.
“지금은 꽤 높은 지위에 오르신 상 태입니다. 대륙에 있으실 때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마왕의 위에는 마신밖에 없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스마 제국에서 블레이크 공작의 위로는 황제밖에 없었으니까.
“어디서든 크게 한자리할 양반이 니…. 걱정하지는 않는다.”
걱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르브 론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떠올라 있 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스승님….”
두근.
르브론의 심장이 평소보다 유난히 크게 뛰었다.
“왜‘?”
“같이 좀 가주셔야겠습니다.”
“어디를 말이냐…?”
르브론은 현우가 말하는 곳이 어디 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애써 부정하고 있었 다.
“마계 말입니다. 블레이크 공작님 께서 스승님을 매우 보고 싶어 하십 니다.”
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르브론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풍처럼 일 어났다.
그것을 느낀 현우가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스승님께 가르쳐주실 게 있다고 하셨습니다.”
르브론의 몸에서 흘러나오려던 기 운이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마치 기운이 뻗어 나왔던 것이 환 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양반이 뭔가를 창안한 모양이 군….”
보통 가르침을 받는 것은 어느 수 준까지 였다.
르브론 정도의 수준이 되면 누군가 의 가르침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현천마공을 익힌 것처럼 어떤 새로 운 돌파구가 생기는 것이면 또 몰랐 다.
“한번 보여드릴까요? 저는 이미 배 웠습니다.”
르브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그의 스승인 요한 블레이크가 무엇을 만들었을지.
현우는 마력을 끌어올리고 마령의 모습을 강하게 떠올렸다.
그러자 현우의 등 뒤로 검붉은 곰 이 나타났다.
완벽한 형체를 갖춘 곰은 르브론을 향해 앞발을 흔들었다.
“배웠다는 것이 그거냐?”
르브론은 마령을 정확히 꿰뚫어 보 았다.
마령이 가진 효과가 무엇인지.
다만 마령을 생성하는 법은 알지 못했다.
“그냥 마령의 모습을 상상하고 마 력을 움직이면 되던데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만드 는 게 아니다. 네 녀석은 그게 쉽다 고 말하지만, 그건 모두가 그 양반 이 기반을 닦아놓은 덕이다.” 르브론이 현우를 타박했다.
그저 마령의 형상을 상상하며 마력 을 운용하면 된다는 어처구니가 없 는 답을 내놓은 현우였다.
“어쩔 수 없이 마계를 한번 들러야 하겠구나.”
르브론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 를 떨궜다.
“지금 가시겠습니까, 스승님?”
현우는 그런 르브론의 앞에서 얄밉 게 말을 걸었다.
“가야지, 간다.”
르브론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오빠, 현우 오빠는 아직도 안 나 왔어? 지금 시각이 몇 신데 여태 큐브 속에 있어?”
- 나야 모르지. 그놈이 무슨 짓을 하는지. 그걸 알면 내가 걔 스토커 지.
유리는 차오르는 답답함에 괜한 영 찬만 다그쳤다.
현우에게 연락이 닿지 않고 있었 다.
보통 때라면 지금 즈음 연습실에서 만나 경기에 관해 얘기를 나누며 늦 은 점심을 먹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현우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직 아레나를 플 레이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유리의 얼굴에 걱정이 떠나지 않던 그때 였다.
영찬의 목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넘어왔다.
- 야, 나왔다. 잠깐만…. 스피커 모드로 해놓을 테니까 알아서 들어.
“알았어, 오빠.”
유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조금이라 도 놓칠세라 통화 볼륨을 최대로 높 였다.
- 야, 왜 이제 나와? 잠은 잤냐? 밥은 먹었어? 그냥 씻고 가게?
영찬이 유리와 통화할 때와는 다르 게 정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 로 물었다.
■ 지금 몇 신데? 벌써 두 시냐? 씻고 가야겠다.
현우의 목소리에서는 피곤함이 느 껴 졌다.
느릿하고 힘이 없는 목소리.
누가 들어도 밤을 새우고 난 뒤의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 도대체 밤새 뭘 한 거야?
영찬이 물었다.
그도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벌였기에 다음 날 경기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아 레나에 집중했는가.
- 뭐 그냥 급하게 처리할 게 있어 서. 경기 전에 끝내려다 보니까. 조 금 무리했다.
현우의 말이 이어졌다.
유리는 말만 들었을 뿐인데 현우의 모습이 상상됐다.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겠 지.’
그게 현우의 버릇이었으니까.
“지금 형이랑 통….”
그 순간 이훈이 유리가 있는 방의 문을 노크하고 들어왔다.
유리가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입술 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이훈은 조용히 유리의 옆으로 다가 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오는 통화에 집중했다.
- 뭐했는지 안 가르쳐줄 거야? 혹 시 프니스에 빛이 난 거 그거랑 관 련 있냐? 지금 경비병이랑 기사들이 지키고 있다며?
“맞아, 현우 형 영지에 뭐가 생겼 다며?”
영찬의 말을 들은 이훈이 작게 속 삭였다.
스피커 모드에서는 작은 소리도 상 대방에게 크게 전달되기 때문이었 다.
“근데 그걸 안 가르쳐줘. 우리 오 빠한테도.”
유리 역시 매우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현우가 영찬의 말에 대답 했다.
- 먼저 알면 재미없잖아? 오늘 경 기 끝나고 스트리밍에서 전부 가르
쳐줄게. 내가 밤새 준비한 게 뭔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