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한국에서 마지막 경기야. 마지막 까지 방심하지 마.”
현우는 스테이지의 뒤에서 다른 선 수들을 향해 말했다.
“우리가 언제 방심했다고 그래? 든 든한 주장님을 믿는 거지.”
써니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스테이지에 오를 때가 되자 대기실 과는 다른 감정이 생겨났다. 그녀는 무척이나 감상에 젖어 있었 다.
‘내가 정말 여기까지 오다니….’
근 몇 달간의 시간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현우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부터 스 트리밍에 출연해 구박당했던 일.
그 후에 현우를 스트리밍에 초대했 던 일.
그리고….
현우에게서 프로게이머로 스카우트 를 받은 일까지.
물론 그 이후로도 많은 일들이 있 었다.
크레센트문에 합류하고 나서는 모 든 일이 순탄히 풀렸다.
개인 스트리밍은 말할 것도 없었고 평생 제자리일 것만 같던 게임 실력 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이 모든 게 다 눈앞의 현우 덕분 이었다.
“고마워요.”
써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요?”
현우는 써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써니는 그런 현우에게 그저 옅은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현우가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으 려던 순간 캐스터, 장준형의 목소리 가 아레나 스타디움에 울려 퍼졌다.
“드디어 마지막 경기입니다. 윈터 리그의 대미를 장식할 경기는 바 로!!! 크레센트문과 미노 다이러스 입니다!!! 모두 박수로 맞이해주세 요!!!”
‘뭐라고 한 거지?’
현우는 써니가 한 말이 궁금했으나 물어볼 시간이 없었다.
당장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야 했으 니까.
‘나중에 묻지, 뭐.’ 현우는 가장 먼저 스테이지 위로 올라가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와아아아아!!!
골목대장!!!!
무패우승!!!
관객들은 현우를 열렬히 반겼다.
장준형의 외침보다 족히 몇 배는 더 큰 울림이 아레나 스타디움을 가 득 메웠다.
현우는 그런 관객들의 환영에 충분 히 호응했다.
빠르게 달려나가 스테이지의 끝에 서서 가장 앞줄에 앉은 관객들과 악 수를 나눴다.
“형님‘?”
현우는 관객들 중에서 낯익은 얼굴 을 발견했다.
김석중과 강중구.
그들이 현우의 손을 잡고 있었다.
“어여 끝내고 와야. 이 형님이 화 끈한 파티를 준비했으니께 말이여.”
김석중은 팔을 잡아당겨 현우를 그 의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힘을 내라는 듯 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최대한 빨리 끝내겠습니다. 서울 까지 와주셨는데 더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죠.” 현우는 뒤로 물러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그러고는 계속해서 이동하며 관객 들과 악수를 계속했다.
“크레센트문과 미노 다이러스의 주 장들께서는 공수를 정하기 위한 동 전 던지기를 하기 위한 자리로 이동 해주시기 바랍니다.”
현우가 악수를 멈춘 것은 장준형의 말이 나올 때까지였다.
스테이지 중앙으로 오라는 그의 말 에 현우는 아쉬워하는 관객들을 뒤 로하고 움직였다.
“먼저 고르세요. 제가 남는 걸 하 겠습니다.”
현우는 미노 다이러스의 주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유였다.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아량이기 도 했으며 잠시 후에 있을 충격적인 장면을 위한 선물이기도 했다.
“…배려해주신다면 거절하지는 않 겠습니다. 저흰 뒷면으로 하겠습니 다.”
통계적으로 동전 던지기는 뒷면이 더 많이 나왔다.
홀로그램 동전이지만, 묘하게 그런 경향이 있었다.
“그럼 전 앞면을 고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선택을 들은 스태프는 마이크에 대고 결과를 중계석에 전 달했다.
“크레센트문은 앞면을 선택했고 미 노 다이러스는 뒷면을 선택했습니 다.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크레센트 문이 수성을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 면, 공성을 하게 됩니다.”
장준형은 관객과 시청자들을 향해 양 팀의 선택을 알렸다.
장준형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홀로그램 동전이 움직였다.
빠르게 회전하던 동전이 멈췄다.
“뒷면!!! 동전은 뒷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미노 다이러스가 수성 을 맡고 크레센트문이 공성 역할입 니다!!!”
크레센트문에게는 썩 좋은 결과는 아니었지만, 현우를 비롯한 선수들 의 표정은 밝았다.
어차피 공성이든 수성이든 큰 상관 이 없었다.
“오늘도 형이 알아서 할 테니 까….”
윈터리그의 마지막이자 한국에서의 마지막 정식 무대 경기라는 이유로 현우는 모든 경기를 혼자 책임진다 고 사전에 얘기해둔 상태였다.
그러니 팀원들은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심정이었다.
“양 팀 선수들은 정해진 큐브로 이 동해주시기 바랍니다. 공성전은 정 확히 10분 후에 시작하겠습니다.”
크레센트문의 선수들은 돌아온 현 우를 향해 한마디씩 건넸다.
“마지막까지 양보라니…. 사실 수 성보다 공성을 하고 싶었던 것 아닙 니까?”
“그럴지도…. 우리 형이 사실 되게 관심받고 싶어 하잖아.”
“일이 잘 풀려서 스트리머지…. 관 종이었어 봐. 끔찍하다, 끔찍해.” 이훈은 현우가 스트리머가 아닌 관 심종자가 된 것을 상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는 것을 느꼈다.
‘ 어우야….’
마음을 먹으면 못할 일이 없는 관 심종자.
PVP는 예사고 보스 레이드, 사냥.
모든 것을 방해한다.
“진로가 잘 풀린 케이스라고 봐 야….”
딱!
현우의 손이 빠르게 이훈의 뒤통수 를 훔쳤다.
“헛소리 그만하고 큐브로 들어가기 나 해.”
이훈은 불로 지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지는 뒤통수를 꾹꾹 누르며 큐 브로 들어갔다.
“마지막... 마지막이란 말이지….”
큐브로 들어가기 전, 현우는 고개 를 돌려 아레나 스타디움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수만 명의 사람.
그들이 보내는 열정.
‘아직 끝은 아니야.’
현우는 큐브의 문을 열고 들어갔 다.
현우는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성벽 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진짜 별거 없네.’
미노 다이러스의 성벽은 평범했다.
보통의 성벽처럼 그저 돌로만 이뤄 져 있었다.
별다른 마법진이나 함정이 없어 보 였다.
그 위에 서 있는 병사들의 차림새 도 볼품없었다.
물론 절대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 다.
하지만 현우의 영지인 프니스와 비 교하면 심각할 정도로 차이가 있었 다.
‘영지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건가.’
이건 선수들의 책임도 있지만, 그 보다는 팀의 책임이 더 컸다.
프로게이머들은 온종일 스케줄이 있었다.
레벨 업을 위해 사냥을 나가고 PVP를 위해 또 다른 훈련을 한다.
하위권이니만큼 상위권 팀을 좇기 위해 더 바쁘게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근데 알게 뭐야? 자기들이 관리 소홀이지.’
현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 랐다.
현우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검붉 은 색 가면을 꺼내 얼굴에 덮었다.
“그럼 쉬고들 있어.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현우는 크레센트문의 선수들을 향 해 몸을 돌렸다.
“오늘 경기가 끝나면 파티가 준비 되어 있으니까 기대해.”
현우의 갑작스러운 통보에 다섯 명 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
그도 당연했다.
파티라니.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형님이 애써 준비하셨다니까. 나 중에 감사하다고 인사나 드려.”
할 말을 모두 끝낸 현우는 다시 몸을 돌려 미노 다이러스의 선수들 이 있을 성벽을 향해 움직였다.
‘일단 버프는 걸어줘야지.’
유리는 고개를 세차게 휘젓고는 현 우에게 그녀가 걸 수 있는 모든 버 프를 시전했다.
빠르게 달려가는 현우의 등으로 옅 은 빛이 스며들었다.
“어차피 우리 파티하려고 했잖아. 잘됐네.”
“그러게. 그분들, 생긴 건 험악하기 는 한데…. 좋으신 분들인 거 같아.”
“외모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지. 마음은 고우신 분들이야.”
‘병사들은 있으나 마나. 그럼….’
신경 써야 할 것은 미노 다이러스 의 열두 명이었다.
프니스의 기사단과 달리 미노 다이 러스의 NPC들은 그 수준이 형편없 었다.
신경을 쓰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 요소일 정도로.
‘버프도 받았고. 탱이만 있어도 충 분하겠네.’
단순히 그들뿐이라면, 현우는 충분 히 감당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그 두 배가 달려든다고 해도 이길 수 있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탱이야, 밥값 하자, 밥값.”
현우의 부름에 탱이가 화려한 빛으 로 화답하며 등장했다.
“탱이 등장!!!”
금빛 사이로 등장한 탱이는 현우의 품에 안겼다.
“왜 불렀냐, 주인 놈아.”
“왜 부르기는…. 네가 있어야지 내 가 힘이 나니까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탱이가 새로 얻은 스킬, ‘곰과 함 께 춤을’의 효과가 바로 그것이었으 니까.
“부끄럽게 그런 말을 직접 하면 어 떡하냐, 주인 놈아.”
하지만 탱이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 였다.
자신의 존재가 현우에게 큰 힘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그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탱이는 분명 현우에게 일종의 부적 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오늘은 그냥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어. 이거 다 먹기 전에 돌아올 테 니까.”
현우는 고기 꼬치가 정확히 다섯 개 놓여 있는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 았다.
“알았다, 주인 놈아. 천천히 먹으면 서 기다리겠다.”
탱이는 고기 꼬치로 향하는 몸을 겨우겨우 자제해 현우의 품 안에 남 아 있었다.
하지만 현우가 그런 움찔거림을 느 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일단 먹고 있어, 버프 주고. 진짜 금방 끝내고 올게.”
현우는 탱이를 꼬치 앞에 내려놓았 다.
그러고는 다시 성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금까지 뛴 것보다 몇 배는 빠른 움직임이었다.
“얼른 갔다 와라, 주인 놈아!”
탱이는 순식간에 점이 되어 사라진 현우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고스란히 아레 나 스타디움의 스크린에 송출되고 있었다.
현우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천군만마를 이끄는 장군처럼 당당 한 기세를 풍기며 성벽을 향해 내달 렸다.
“골목대장 혼자 왔어.”
“공격할까?”
“함정은 아니겠지?” 미노 다이러스 선수들은 홀로 나타 난 현우를 보고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금세 선수들의 머 릿속에서 사라졌다.
골목대장은 미노 다이러스보다 몇 수 위라고 평가받는 팀들을 상대로 도 혼자 싸웠다.
절대 동료들과 같이 싸우지 않았 다.
그런 골목대장이 이제 와서 함정을 준비할 리가 없었다.
“차근차근 싸워봐야 승산이 없어. 시작부터 폭풍처럼 몰아친다.” 미노 다이러스의 주장은 이길 확률 이 가장 높은 전략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모르는 것이 한 가 지 있었다.
가장 높은 확률이라고 해도 채 1 퍼센트가 되지 않는다는 것.
한마디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 o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얘기나 나 눌 시간이 있으신가 봅니다?”
어느새 성벽을 오른 현우가 돌무더 기 위에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었 다.
골목대장!”
“어떻게 여기에!”
“일단 공격해!!!”
미노 다이러스 선수들의 얼굴에 경 악이 떠올랐다.
그들은 곧장 자신들의 무기를 꺼내 현우에게 겨눴다.
검과 창을 든 근접 클래스들은 곧 장 현우를 덮쳤으며 지팡이를 든 마 법사는 현우에게 날릴 마법을 캐스 팅 했다.
채재재재쟁!!!
날카로운 금속성이 팝콘이 튀기는 것처럼 연달아 터졌다.
쾃iii
그와 동시에 현우를 덮쳤던 미노 다이러스의 선수들이 모조리 튕겨 나가 성벽에 부딪혔다.
“이거나 먹어라!!”
그사이 캐스팅을 마친 마법사 두 명의 마법이 현우에게 날아들었다.
마력을 잔뜩 머금은 화염의 창이었 다.
현우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현천도 를 가볍게 좌에서 우로 그었다.
썌애애애액!!!
허공에 검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선은 현천도의 끝에서부터 화염의 창을 지나 마법사들의 목까지 이어 져 있었다.
촤아아아!!!
마법사의 목에서 피가 꿀렁대며 흘 러나왔다.
“시간이 많지 않아, 시간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