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2화
“후…. 후….”
현우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시고 건 물의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진 입 했다.
‘어떻게든 잘도 꾸며놨군.’
이곳은 황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건물이었다.
마치 제도에 있는 궁을 그대로 옮 겨 놓은 듯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소장권!개를 사용했습니다. 현우는 느릿한 걸음으로 통로를 지 나쳤다.
에토노에 있지만, 제도에 있는 기 분이 들었다.
통로의 끝 그리고 거대한 공간의 시작에서 멈춰선 현우는 매우 신기 한 광경과 마주쳤다.
‘이게 무슨….’
황제가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런 황제의 곁에는 오만 가지 색 의 마력이 모여들고 흩어지기를 반 복했다.
그러는 동안에 마력끼리 부딪치기 도 하고 심지어는 터지기도 했다.
소장권!개를 사용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 건축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내가 느낀 게 저거였나 본데….’
하지만 이쯤 되자 궁금해지는 게 있었다.
황제는 왜 도대체 이런 짓을 하는 가.
그것도 지금.
현우는 황제의 기행이 멈출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황제의 몸이 권좌에 안착했다.
“재깍재깍 달려오는 게 아주 보기 가 좋아.”
황제는 현우를 보며 웃었다.
‘저게 말이야 방구야.’
현우는 그런 황제에게 쓴웃음으로 대응했다.
황제의 말이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으 로 생각해 빨리 달려왔습니다.”
현우는 입가에 침을 스윽 바른 채 아무 말이나 마구 던져댔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그쯤 흐}지. 후작을 부른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 라….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다.”
황제는 현우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 었다.
현우의 말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탁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폐하. 얼른 명을 내리시지요.”
“그렇다니 마음 편하게 부탁을 하 지. 조만간 본격적인 전쟁을 벌일 생각이다.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제가 무슨 역할을 맡으면 되겠습 니까, 폐하?”
현우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제 드디어 시작이었다.
‘다행히 아레나 위크까지 버티기는 했네.’
어느 정도 예상한 바였다.
현우의 마음은 준비가 끝이 났다.
아레나 위크 동안에 전쟁이 벌어지 지 않은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 웠다.
“지난번 마왕과의 전투로 깨달은 게 몇 가지 있다. 마왕들과 더 많은 전투가 필요하다. 그들을 전장에 끌 어내기 위해서는 위기감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현우는 황제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들었다.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경청했다.
“이걸 받아라.”
황제는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현우에게 날 렸다.
작은 유리구슬이 현우의 품으로 날 아들었다.
현우는 날아온 유리구슬을 가볍게 낚아챘다.
“자동으로 주변의 지형을 기억하는 아티팩트다. 거기에 최대한 많은 곳 을 담아오라.”
유리구슬의 정체는 아티팩트였다.
자동으로 주변의 지형을 저장하는 기능을 가진 일종의 지도나 다름없 었다.
-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마계 지도 제작]
황제는 마계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다. 그의 바람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마계의 지도가 필요하다. 황제를 대신해 마계의 지도를 만들자.
등급 : MS
조건 : 마계의 도시 기록 0/10, 황제 에게 유리구슬 건네기 0/1.
보상 : 경험치, 황실 기여도.
‘쉽다, 쉬워.’ 현우는 고개를 숙인 채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황제의 퀘스트는 현우에게는 너무 나 쉬웠다.
현우에게는 이미 마계의 지도가 들 려 있었으니까.
‘이게 이렇게 큰 도움이 되네.’
현우는 요한 블레이크에게 발레르 의 지도를 받았다.
지금보다 한참 이전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도시의 위치는 동일했다.
바뀐 것은 도시의 주인에 대한 정 보였다.
‘한국에 돌아갈 때까지는 퀘스트에 집중해야지.’
그렇다고 해서 퀘스트를 빠르게 해 치울 생각은 없었다.
그럴 능력이 있지도 않았지만.
‘도시 사이가 어지간히 멀어야지.’
에토노에 가장 가까운 도시들을 돌 아다니는 것만 해도 최소한 한 달은 넘게 걸릴 듯했다.
‘근데 그 시간 동안 황제가 가만히 에토노에 처박혀 있겠다고?’
현우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의문 이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튀어 나갈 것 같은 황 제가 한 달이라는 긴 시간을 참는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전쟁은 벌어 지지 않는 것입니까?”
황제가 현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고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현우 에게 되물었다.
“어떨 것 같은가?”
현우는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소신이 돌아오는 것과는 상관없이 전쟁은 시작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잘 아는군? 하지만 당장은 아니 야. 에토노에서 활동하는 모험가들 의 수가 생각보다 적어. 그들이 돌 아오면 바로 시작해야지. 안 그런가, 후작?”
황제도 알고 있었다.
적지 않은 숫자의 모험가들이 자리 를 비웠다는 것을.
그래서 평소보다 에토노 주변에 돌 아다니는 마족과 마수들의 수가 많 다는 것을.
‘그럼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확인 하고 가자.’
현우의 궁금증은 아직 끝나지 않았 어찌 보면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이 었다.
“마지막으로 여쭤볼 것이 있습니 다, 폐하.”
“후작은 뭐가 궁금하지?”
“폐하께서는 직접 전장에 나가실 생각이십니까?”
현우의 마지막 질문은 바로 황제의 전쟁 참여 유무였다.
‘황제가 나오면 편하기는 할 텐 데….’
황제는 확실한 전력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그 것을 원하지 않을 터였다.
황제가 싸우는 만큼 그들이 얻을 보상이 줄어드는 것이니까.
“당연한 것을 어찌 왜 묻는지 모르 겠군.”
“당연하다 하시면….”
“전장에 나가지 않으면 직접 마계 에 온 이유가 없지 않나. 하지만 처 음부터 나가지는 않을 것이야. 후작 이 돌아오면 그때 전장에 합류할 것 이다.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마계 침 공 전쟁의 시작이니.”
현우는 황제의 선택을 이해했다.
황제가 전쟁에 참여하는 순간 전쟁 은 확실히 기운다.
황제의 참전은 곧 르브론의 참전이 었다.
확실한 비대칭 전력이 둘이나 끼어 들고 거기에 현우도 손을 보태면, 분명 플레이어들이 주축이 된 병력 들보다 압도적인 위력을 보일 게 분 명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도시를 밀어 버 리고 마왕들을 전장에 끌어내겠다는 뜻이겠지.’
“그럼 최대한 빠르게 돌아와야겠습 니다. 폐하를 이런 곳에 오래 기다 리게 해서는 안 될 테니 말입니다.”
현우는 유리구슬을 인벤토리에 집 어넣고 슬슬 건물을 빠져나갈 준비 를 했다.
“후작이 그렇게 말하니 기다리겠다.” 현우는 황제의 말을 듣고 재빨리 건물에서 빠져나갔다.
“과연 어느 도시를 알아올지…. 기 대가 되는군…. 그곳에 닿았으면 좋 겠는데 말이야….”
황제는 현우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뜻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황제와 헤어진 현우는 곧장 에토노 의 성벽을 넘었다.
그러고는 미친 듯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손에 두루마리를 든 채로.
‘굉장히 애매하네.’
현우는 달리면서 발레르의 지도를 확인했다.
‘에토노에서 가까운 도시 열 개를 골라야 하는데….’
동선이 애매했다.
도시는 에토노를 중심으로 규칙적 으로 위치한 게 아니었다.
위치가 모두 제각각이었다.
가장 짧은 시간 내에 10개의 도시 를 돌기 위해서는 도시를 잘 선택해 야 했다.
마계에 존재하는 72개의 도시 중 에서 에토노를 제외하고 총 10개의 도시를 도는 동선을 짜야 한다는 소 리였다.
‘일단 칼레아 백작의 도시와 가르 시아 자작의 펜은 확정이고.’
두 도시는 10개의 도시 안에 무조 건 들어가야 했다.
에토노에서 가장 가깝기도 했고 일 단 발레르가 점령을 허락한 도시들 이었기 때문이었다.
‘쿠에르도 넣는다. 어쩔 수 없어.’
지금은 비어 있으며 한때 요한 블 레이크가 다스렸던 도시, 쿠에르 역 시 현우의 선택지에 이름을 올렸다. 이유는 뻔했다.
가까워서.
‘나머지 일곱 개를 정하는 게 문제 인데….’
나머지가 문제였다.
전부 비슷하게 멀었다.
그 격차가 아주 모호했다.
어디가 가깝고 멀고를 따지기가 힘 들었다.
‘그래도 최대한 에토노를 중심으로 원형을 그려야 하는데….’
그래야 수비 범위가 최소한으로 줄 어들었다.
현우 자신이 편하자고 최단거리로 도시를 골라 점령한다면 최악의 경 우에는 모든 도시를 따로따로 수비 해야 하는 경우까지도 생길 수가 있 었다.
‘진짜 거지 같은 건 이거지.’
가르시아의 도시인 펜 같은 경우에 는 현우에게 귀환석이 있었다.
하지만 귀환석은 아무짝에도 쓸모 가 없었다.
유리구슬에 펜의 위치는 입력됐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중간에 어떤 지형이 있는지.
어떻게 가야 펜이 나오는지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럼 그게 지도로써 의미가 있 나….’
그렇게 되면 그냥 종이에 점을 찍 어둔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뛰자, 뛰어.”
현우는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재 촉했다.
현우의 모습이 금세 점이 되어 사 라졌다.
지이이이잉.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가득 찬 서재 에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진동은 나무를 타고 더욱 거세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중년의 남성은 진동하는 스마트폰을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평온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와는 달 리 스마트폰 너머로는 무척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정 이사’, 지금 진짜 큰일 났어!!!
스피커를 깨부술 듯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중년 남성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니. 박 차장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늦은 밤에 이렇게 급하 게 전화를 주시다니….”
중년 남성은 상대의 다급한 목소리 에도 편안하게 대답했다.
짜증이 난 것을 절대 목소리에 드 러내지 않았다.
- 지금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야. 지금 당신 앞으로 영장이 청구됐어.
이번에는 중년 남성도 마냥 편안하 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영장 청구.
그 말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가벼이 넘길 수가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장 청 구라니요? 누가요?”
- 반부패부의 김준식이라고, 이번 에 총장이 된 김영균이 아주 아끼는 녀석이야. 놈이 영장을 쳤어.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김준식과 김 영균을 잘 아는 듯했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에게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것에서, 두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거나 그들과 반대되 는 파벌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반부패부?’
중년 남성이 쓰고 있던 안경을 거 칠게 벗었다.
반부패부는 일반인들과 크게 부딪 히지 않는 부서였다.
그들은 직접 수사를 하지는 않는 다.
다만 특별수사를 지휘하고 감독하 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 이들이 왜 나한테 영장을?’
중년 남성은 현재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금 통화 상대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이유가 뭐랍니까?”
- 업무상 횡령 및 배임이라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물린 것 같아. 늙은이들 자금줄이 걸린 모양이야.
“그건 이미 끝난 일 아닙니까? 협 회 쪽 인사들과 직접 뛰던 선수들이 줄줄이 묶여간 것으로 끝이 난 것 아닙니까?”
-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어. 하 지만 확실한 건 여의도 늙은이들은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사 실이지. 제 몸 사리기에는 누구보다 뛰어난 자들이니.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 까?”
- 일단 출두 요청이 오면 아무런 반항도 하지 말고 바로 나가. 제대 로 된 사정은 내가 알아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저는 박 차장님만 믿 고 있겠습니다.”
중년 남성, 정철호는 통화를 종료 했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그는 빠르게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