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12화
현우와 라쿤의 전투를 지켜보는 관 중들과 중계진들은 아무런 말도 하 지 못한 채 그저 숨을 죽였다.
그들은 이번 아레나 위크를 통틀 어, 이런 격전을 처음 목격했다.
이전의 경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 준이었다.
라쿤과 현우의 공방.
둘 사이의 전투는 다른 플레이어들 과는 아득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있 었다.
도저히 같은 아레나에서 벌이는 전 투라고 봐주기 힘들 정도였다.
그리고 더 큰 이유는, 이미 크레센 트문을 제외한 나머지 팀들이 거의 일방적인 농락을 당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라쿤과 제대로 공방을 나누는 사람 이 없었다.
마치 현우와 PVP를 했을 때처럼 그냥 밀리기만 했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했다.
라쿤의 도끼질 한 번이면 혼비백산 한 채로 도망치기 바쁜 선수들도 있 었으니까.
그러니 당연하게도 스크린을 통해 보여줄 만한 레이드 타임 어택 경기 는 크레센트문뿐이었다.
다른 팀들을 보여주는 것은 그 팀 들에 대한 능욕이나 다름없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엄청난 수준 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단순 한 공격 한 번에도 무수히 많은 의 도가 담겨 있습니다.”
“강현우 선수와 다른 선수들 사이 의 실력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납니 다. 만약 강현우 선수가 라쿤을 잡 는 데 성공한다면, 이는 정말 완벽 한 피날레가 될 겁니다.” “설사 잡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누 구보다 높은 위치에서 누구보다 화 려하게 은퇴식을 하겠죠. 이미 짧은 전투만으로도 골목대장은 자신이 왜 과거에도 최고였고 현재에도 최고인 지 증명했습니다. 그는 아마 미래에 서도 최고일 겁니다.”
중계진들은 현우를 칭찬했다.
아니, 찬양했다.
중계진의 눈에 비쳐진 현우는 신이 었다.
전투의 신.
진실로 밀리갓이라는 이름이 아깝 지가 않았다.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는 게 현우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 순간 스크린에서 현우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제니스의 선수들 이 채웠다.
제니스의 선수들은 대부분이 바닥 에 누워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린 채로.
간신히 로그아웃은 면했지만 그뿐 이었다.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는 선수는 딱 둘뿐이었다.
카렐린과 세르게이.
제니스의 에이스들만이 대지에 우 뚝 서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겨우였다.
두 명 역시 전신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누가 저딴 괴물을 만난 거야? 역 시 골목대장이겠지?”
카렐린은 말도 안 되는 무력을 소 유한 라쿤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면 서도 보스 몬스터의 데이터를 제공 한 선수를 추측했다.
“아마. 분명히 그렇겠지. 근데 저런 괴물을 어떻게 잡은 거지? 아니 지…. 어떻게 죽지 않은 거지?” 세르게이는 의문이 생겼다.
현우는 누구나 아는 노 데스 플레 이어 였다.
아레나를 플레이하면서 단 한 번도 죽지 않은.
그것은 PVP든 사냥이든 어떤 부분 이든 모든 것을 다 합친 것이었다.
‘그의 성격상 거짓을 말하고 다닐 리도 없을 텐데….’
세르게이가 현우의 절친한 친구거 나 하지는 않았지만, 스트리밍이나 아레나 위크 등에서 보인 현우의 모 습만으로도 성격을 대강은 알 수 있 있다.
현우는 굳이 자신을 과장해 드러내 거나 허세를 부리지 않았다.
있는 것만 정확히 내세웠다.
다만 그게 너무도 엄청나 모두가 허세로 여기고 넘기는 게 마음이 편 할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밀리갓을 제외 한 나머지 팀들은 우리랑 비슷한 꼴 이겠군. 허허….”
세르게이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 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음을 앞둔 것 o
‘도대체 어떻게 싸워야 할지 감조 차 잡히지 않잖아.’
눈앞의 오크는 진심으로 괴물이었 다.
2미터에 가까운 크기의 도끼를 마 치 나뭇가지 휘두르듯 휘둘렀다.
도끼를 느리게 휘두르는 것 같지 만, 결국 오크의 앞쪽에서 맞부딪혔 다.
그리고 그 반발력을 이기지 못해 서, 튕겨 나가고 체력이 깎이는 게 지금까지의 레이드였다.
“그나마 우리는 움직일 수라도 있 지. 나머지는 가만히 서서 당했잖 아.”
카렐린은 몇 분 사이에 벌어졌던 참사를 떠올렸다.
붉은 기운, 투기에 휩쓸려 몸의 제 어권을 잃은 팀원들은 라쿤의 도끼 에 그대로 두들겨 맞았다.
라쿤은 절대 쉽게 죽이지 않았다.
강기도 만들지 않은 채로 도끼를 휘둘렀다.
그것도 도끼의 자루로 때렸다.
그런 공격에도 사제나 마법사들은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꺽꺽대 며 바닥을 굴렀다.
지금까지도.
“도대체 이 괴물을 어떻게 잡으라 는 거야!!!”
카렐린이 절규하며 라쿤을 향해 달 렸다.
최후의 발악이었다.
***
현우의 상황은 다른 팀들에 비하면 무척 좋았다.
싸울 순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좋다는 뜻이지 실제로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주인 놈아, 잘 좀 싸워봐라. 아조 씨가 봐주는데도 그게 뭐냐.”
탱이는 전투에 참여했다.
행동이 아니라 말로.
그나마도 전력을 북돋워 주는 게 아니라 깎아 먹는 수준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과일을 씹어먹으며 현우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탱이는 라쿤이 보여주는 전투에서 그가 본신의 무력을 모두 꺼내지 않 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정확하게는 원래의 라쿤을 있는 그 대로 복사한 몬스터가 아니라는 것 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렇다면 현우를 크게 걱정할 필요 는 없었다.
이제 이기고 지는 것은 순전히 현 우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이거 끝나면 무조건 꿀밤 다 섯 대다.’
현우는 아레나 위크가 끝나면 기억 도 못 할 탱이에게 이를 갈았다.
아레나 위크에 소환되는 탱이는 실 제 탱이와는 약간 달랐다.
진짜 아레나 속에 있는 탱이의 기 억을 복사해서 만든 것이 이곳, 아 레나 위크에 소환되는 탱이었기 때
문이었다.
즉, 진짜 탱이에게는 아레나의 기 억만 있고 아레나 위크의 기억은 없 다는 소리였다.
“어디에 정신을 파느냐!!! 싸울 때 한눈을 팔면 크게 다친다는 것을 모 르느냐?!!”
부우우우우웅!
라쿤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 고 현우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휘둘 렀다.
어지간한 성인 얼굴만 한 주먹은 공간을 터트리며 현우에게 다가왔 다.
‘오우야.’
현우는 기겁한 얼굴로 다리를 벌려 몸을 낮췄다.
라쿤의 주먹이 현우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정말 조금의 차이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그대로 라쿤의 주 먹에 몸을 내줬을 것이었다.
현우는 그저 피하지만은 않았다.
라쿤과 가까워진 것은 현우에게도 기회라고 볼 수 있었다.
현우의 건틀렛 위로 보랏빛 건틀렛 이 덧씌워졌다.
현우는 날카로운 돌기가 솟아 있는 보랏빛 건틀렛을 뻗었다.
쾅!!!
하지만 현우를 맞이하는 것은 라쿤 의 주먹이었다.
어느새 라쿤이 주먹을 뻗어 현우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이런 건 아주 좋아. 근접 전투에 서 방어는 곧 공격과도 같지.”
라쿤은 현우를 칭찬했다.
하지만 칭찬과는 별개로 라쿤의 주 먹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라쿤의 오른쪽 어깨가 뒤로 살짝 밀려났다.
그것을 본 현우가 온몸에 감각을 일깨웠다.
그러고는 두 눈을 라쿤의 어깨에 집중했다.
저것은 준비 동작이었다.
오른쪽 주먹을 내뻗겠다는 것을 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인 것은 오른손이 아니 라 왼쪽 손이었다.
‘왼손?!!’
펑!!!
현우의 얼굴에 라쿤의 주먹이 적중 했다.
왼손이 움직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 상하지 못한 현우는 두 눈을 뜨고 주먹에 맞은 것이었다.
“간단한 허초인데…. 이런 거에도 속나?”
라쿤이 현우에게 느물거렸다.
덩치에 맞지 않는 유들거림이었다.
하지만 현우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생각보다 안 아픕니다만? 시원하 네요. 안마용으로 딱 맞습니다.”
현우의 말에 라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도 느꼈다.
타격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걸 그사이에 훔쳐 배우다니…. 대단한 재능이야. 아주 위험한걸?”
현우는 라쿤에게 당했던 것을 어느 정도 비슷하게 따라 했다.
라쿤의 녹색 막처럼 상대에게 충격 을 되돌려주지는 못했지만, 피해 자 체를 크게 상쇄했다.
마치 몬스터들이 몸에 마력을 둘러 피해를 감소시키는 것처럼.
어설픈 시도였지만, 현우가 착용한 ‘공허한 드래곤’의 세트 효과인 공 허의 의지가 현우의 그러한 시도를 보정했다.
“좋은 건 나눠야지요. 그래야 좋은 세상 아니겠습니까?”
현우는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러고는 현천도를 다시 세게 꼬나 쥐었다.
‘이건 뭐 답이 안 보이네.’
버프를 쓰지 않고 싸우니 제대로 싸우는 게 불가능했다.
가까스로 반격을 날리거나 무의미 한 마력과 심력 소모를 하는 게 전 부였다.
라쿤이 레이드 보스라는 것을 감안 하면, 분명 현우보다 체력과 마력이 막대할 터였다.
‘어차피 우리 팀이 1등이야…., 현우는 선택했다.
다른 팀들은 보나 마나 전부 탈락 했을 터였다.
눈앞의 라쿤을 상대로 버텨낼 스펙 을 지닌 이들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전부 다 끌어 쓴다.’
솔직히 패배해도 상관없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싸우는 것만으 로도 큰 실력 상승이 있을 터였다.
‘거인의 힘, 거인의 기상, 거인의 근원, 갈망하는 자.’
버프를 끌어모았다.
그러고는 라쿤을 향해서 디버프를 걸었다.
‘봉인, 드래곤 피어.’
봉인과 드래곤 피어는 라쿤에게 먹 혀들었다.
본래 라쿤이라면 먹혀들지 않았을 것이었으나 레이드 타임 어택 수준 에 맞게 약해진 상태의 복제 라쿤이 었기에 마계 드래곤의 격 앞에서 무 너진 것이었다.
“흠…. 꽤 성가신 물건을 가지고 있군. 좋지. 그런 것을 잘 쓰는 것 도 좋은 방법이지.”
라쿤은 당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앵앵거리는 파리를 대하는 듯한 태 도였다.
‘두 가지 다 제대로 먹히지는 않았 나본데.’
현우는 라쿤의 태도에서 봉인과 드 래곤 피어의 효과가 제대로 먹혀들 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괴물은 저런 상태가 되어도 괴물이 었다.
그래도 낙심할 필요는 없었다.
이전보다는 상황이 많이 나아졌으 니까.
“이기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하겠습 니까.”
현우가 현천도를 들고 라쿤에게 짓 쳐 들었다.
라쿤은 피식 웃으며 하얀 손잡이의 도끼를 휘둘렀다.
그 순간 대기가 무거워졌다.
라쿤의 마력이 대기를 지배하기 시 작한 것이었다.
그 사이로 라쿤의 초록색 강기만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현우도 피하지 않았다.
현우는 마력을 가득 담아 현천도를 휘둘렀다.
콰아아앙!!!
강기가 서로 충돌하자 당연하게도 폭음이 터지고 충격파가 주위를 휩 쓸었다.
현우는 그 사이를 유유히 뚫고 라 쿤에게 계속해서 다가갔다.
라쿤은 도끼를 든 채로 가만히 현 우를 지켜보았다.
그러던 라쿤이 어느 순간 단숨에 도끼를 내리찍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콰아아아앙!!!
라쿤의 도끼 아래에 현천도를 맞대 고 버티는 현우가 있었다.
현우의 발밑은 30센티 이상 꺼져 들어갔다.
라쿤이 쏟아부은 막대한 힘을 흘린 결과였다.
‘진짜 이 괴물!’
현우는 그의 움직임을 예상이라도 한 듯한 라쿤을 보며 혀를 찼다.
어이가 없는 괴물이었다.
‘이번에는 한 방 먹인다.’
현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땅을 강하게 박차며 현천도를 위쪽 으로 들어올렸다.
버프로 인해 강화된 힘은 라쿤의 도끼를 밀어내기에 충분했다.
부우우우웅!!!
라쿤은 현우가 밀어내는 힘을 부드 럽게 이용해 다시금 도끼를 내리찍 었다.
그러던 라쿤의 도끼가 급격하게 움 직임을 멈췄다.
그런 그의 도끼 앞에는 보랏빛 곰 이 나타나 있었다.
현우는 라쿤이 멈춘 틈을 놓치지 않고 주먹을 휘둘러 라쿤의 복부를 타격했다.
“흥, 속았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