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1 화
“우리…. 밥 먹고 나서는 뭐하죠?” 현우가 머뭇거리다 꺼낸 질문은 레 이나의 맥을 빠지게 했다.
무슨 대단한 질문을 할 것처럼 하 더니 결국 묻는 게 이런 것이었다.
“음…. 숙소 구경이라도 할래요? 딱히 보여드릴 건 없지만….”
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숙소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 었다.
그저 할 말이 없어 아무런 말이나 내던진 것에 불과했다.
‘아, 내가 실수를 한 게 분명한 데….’
현우는 레이나의 표정을 보고 직감 했다.
그가 분명히 실수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했을지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했을까….’
현우가 자책하는 사이 레이나가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내가 잘못한 건가….’
현우는 레이나가 사라진 자리를 보 자 입맛이 썼다.
잠시 후, 사라졌던 레이나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의 손에는 커다란 접시가 들려 있었다.
접시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 는 컵 두 개와 케이크가 올려져 있 었다.
현우는 그것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받았다.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레이나가 금방이라도 접시를 엎을 것 같았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케이크는 한두 조각이 아니라 박스 로 두 개였다.
두 판이라는 뜻이었다.
‘케이크에 원수라도 졌나….’
현우가 접시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 자 레이나가 입을 열었다.
“따듯한 걸 좋아하는지 차가운 걸 좋아하는지 몰라 일단 에스프레소로 가져왔어요. 어떻게 마실래요?”
“전 차갑게요. 물이랑 얼음 많이 넣어서요. 쓴 거. 안 좋아하거든요.” 현우의 대답에 레이나가 방 한쪽에 있는 냉장고를 열어 얼음을 잔뜩 푸 고 생수병도 꺼내왔다.
“저도 아이스가 좋아요.”
레이나가 커다란 컵에 얼음을 붓고 물을 따르는 사이 현우는 접시 위에 올려진 상자를 개봉했다.
‘치즈 케이크랑 딸기 케이크네….’
상자 안에는 그렇게 크지 않은 크 기의 케이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현우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였고 다른 하나는 현우가 그 리 선호하지 않는 딸기 케이크였다.
‘원래 얼마 안 먹기는 하지만….’
물론 현우가 원래 빵과 케이크 같 은 디저트류를 즐기지 않았기에 저 정도면 충분하고도 남았다.
“레이나는 내일부터 어떻게 지낼 생각인가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다시 대화를 이 어 나갔다.
“이틀 정도는 그냥 쉬려고요. 그간 너무 아레나에만 집중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떠날 거예요. 두 달 동 안 여기에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 까....”
뉴욕 워리어즈는 앞으로 두 달 동 안 공식적인 휴가를 갖는다. 너무 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년 중 대부분을 아레나 리그 준비 에 힘 쏟은 것을 생각하면 이것도 꽤 짧은 것이었다.
“그래요? 하긴 사람이 쉬기는 해야 지.”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식은 반드시 취해야 했다.
리그 도중에도 하루 이틀 정도는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리그가 진행되는 사이에 있는 휴식과 정말 마음 편히 쉬는 게 같을 리가 없었 다.
‘근데 솔직히 그냥 게임하는 게 쉬 는 거지, 뭐.’
현우는 딱히 휴식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현우에게는 아레나를 하고 스트리 밍을 하는 게 곧 휴식이었다.
어떠한 목표도 없고 신경 쓸 것도 없이 그저 마냥 재미있게 노는 것.
그게 곧 휴식이었다.
“아레나에서 뭐 막히거나 힘든 건 없나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마계에서 사냥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고….”
레이나는 케이크를 절반으로 잘라 그것을 고스란히 그녀의 접시로 옮 겨 담았다.
“이틀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레 이나, 일주일 안에는 무조건 파티가 다 모여 있어야 해요.”
현우는 레이나에게 당장 오늘 밤부 터 생길지도 모르는 변화를 예고했 다.
이건 누구에게도 해주지 않았던 말 이었다.
김석중에게조차 아직 하지 않았다.
‘호텔로 돌아가서 말하기는 하겠지 만….’
지금 당장 알고 있는 것은 레이나 뿐이었다.
“메인 시나리오예요? 무슨 일이라 도 있나요?”
케이크를 크게 떠먹던 레이나가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사실 지금 메인 시나리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현우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메인 시나리오를 구경 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마왕이나 황제를 만날 수가 없으 니, 퀘스트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 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에요. 근데 제가 지금 진행 중인 퀘스트가 있는데…. 그것만 끝이 나면 곧장 전쟁이 시작됩니다. 마계에 있는 모 든 플레이어들이 모여서 치르는 전 쟁이.”
“전쟁이요…?”
레이나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현우는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 았다.
눈빛과 표정은 진지한데 입에 잔뜩 집어넣은 케이크 때문에 볼이 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마치 햄스터처럼.
“크음….”
현우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레 이나가 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 이 켰다.
쓰디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표정 관리에 성공한 현우가 말을 이었다.
“황제가 마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 일 겁니다. 수많은 성을 공략하고 마족과 마수들을 상대로 싸워야 할 거예요.”
“화려하겠네요.”
“엄청나겠죠.”
레이나는 현우를 보며 웃었다.
언뜻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현우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 고 생각하고 천천히 해보자는 생각 을 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지금부터….’
두 달.
레이나는 그녀에게 주어진 휴가 기 간인 두 달 안에 결과를 볼 생각이 었다.
무조건.
현우는 결국 레이나와 저녁 식사까 지 마친 후에야 호텔로 돌아왔다.
레이나는 현우를 쉽사리 보내주지 않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와인 세 병 을 깨끗이 비운 후에야 겨우 현우를 놓아주었던 것이다.
“어우야….”
현우는 자신의 몸이 아주 약간, 마 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끼고 는 호텔 로비에 있는 의자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손 가락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케일이.... 아직 호텔에 있으려나?’ 현우는 케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어볼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케일, 지금 호텔인가요?]
답은 금세 왔다.
현우가 메시지를 보낸 지 얼마 지 나지 않아 스마트폰이 떨렸다.
[네, 크레센트문 선수들과 진행한 면담 이 이제 막 끝났습니다. 미스터 강은 어 디십니까?]
현우는 다시 스마트폰을 꾹꾹 눌렀 다.
[호텔 로비에 있습니다. 잠깐 만날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더 빨리 답장이 왔다.
현우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케일 의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엘리베이터입니다. 제가 가겠습 니다.]
현우는 케일의 대답을 보고 스마트 폰을 코트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 다.
그러고는 다리를 꼰 채로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미스터 강?”
케일은 어느새 현우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빨리 왔네요, 케일.”
현우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로 대답했다.
“술을 얼마나 마신 겁니까? 냄새가 꽤 심하네요.”
“와인 조금 마셨습니다. 참 그게 아니라…. 제이미 무어 씨는 어디 있죠? 그분을 뵙고 싶은데….”
“보스 말입니까? 지금 진 쉬종 님 과 함께 계신 거로….”
“형님이랑요? 어디에요?”
현우는 제이미가 김석중과 함께 있 다는 것을 듣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가까이 계십니다. 이 호텔 라운지 에 계시니까요.”
“그래요? 그럼 가죠.”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우는 살짝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균형을 잡 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 다.
“지금 가면 안 되는데….”
케일은 작게 중얼거리고는 현우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내가 어떻게 도망쳤는데….’
케일은 크레센트문과의 면담이 끝 나면, 라운지로 올라오라는 제이미 무어의 말을 무시하고 집에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현우로 인해 불가능 한 일이 되어버렸다.
띵
현우와 케일은 케일이 타고 온 엘 리베이터를 그대로 타고 다시 올라 갔다.
“이런 곳도 있었네요.”
현우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감탄 했다.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바닥에 깔린 타일이나 조각상, 벽 면의 장식 등.
무엇 하나 고급스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층이라 그런지 바깥 풍경도 잘 보이고.’
심지어는 야경도 잘 보였다.
뉴욕의 야경이 어떤 것인지 정말 잘 느껴졌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미스터 강.”
케일은 현우보다 먼저 내려 라운지 에 있는 호텔 직원에게 제이미 무어 가 있는 룸의 위치를 물었다.
제이미 무어와 케일은 이 호텔에 같이 온 일이 몇 번 있었기에 호텔 직원이 그것을 기억하고는 케일에게 제이미 무어의 위치를 알려줬다.
“어서 가죠.”
현우는 케일이 걸어가는 곳을 따라 걸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고급 스러운 홀을 지나 케일은 어떤 문 앞에 섰다.
“보스, 저 케일입니다. 들어가도 되 겠습니까?”
케일이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안쪽에서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문을 연 사내는 제이미 무어가 아 니라 떡 벌어진 어깨를 지닌 사내, 김석중이었다.
“뭐여? 부라더네? 여긴 어떻게 알 고 온 거시여?”
김석중은 현우를 반갑게 맞이했다.
“제이미 무어를 만나러 왔습니다, 형님.”
현우는 그런 김석중에게 손을 흔들 었다.
“제이미? 어이, 제이미!!! 내 동상 이 널 보고 싶다는구먼?!!”
김석중이 대뜸 고개를 뒤로 돌리고 소리쳤다.
그것을 본 현우가 피식 웃었다.
김석중의 말에 담긴 의도를 알아챘 기 때문이었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형님.”
현우가 김석중의 등을 떠밀며 룸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룸의 모습은 홀을 줄여 놓은 것 같았다.
다만, 바가 없고 그 자리를 높은 테이블이 차지하고 있다는 게 차이 였다.
“절 찾아오셨다고요? 무슨 일이라 도 있으십니까, 미스터 강?”
제이미 무어는 위스키가 가득 담긴 유리잔을 흔들며 현우를 맞이했다.
“일은 아니고 부탁이 좀 있습니 다.”
“부탁이요?”
현우의 뜬금없는 말에 제이미 무어 가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되물 었다.
“예, 부탁입니다.”
“흐음….”
제이미 무어는 부탁이라는 현우의 말에 순간적으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남자가 하는 부탁이라.
그것은 결코 쉬운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부탁은 꼭 들어주셔야만 합니 다. 제이미 당신이 니케 매니지먼트 의 대표이고 제가 소속 스트리머인 이상.”
현우의 말이 더 거창해졌다.
무언가 엄청난 부탁이라도 할 것처 럼 말이다.
“그래서…. 도대체 부탁이란 게 뭡 니까, 미스터 강‘?”
제이미 무어가 초조한 표정으로 위 스키를 들이켰다.
“새롭게 시작하는 골목대장 아카데 미의 첫 번째 레슨생으로 참가해 주
시죠.”
현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예? 골목대장 아카데미?”
제이미 무어가 미묘한 표정으로 중 얼 거렸다.
미묘했다.
현우의 부탁은 너무나도 미묘했다.
‘쉬우면서도 동시에 어렵다.’
그가 속으로 생각했던 것과 같은
과한 부탁은 아니었다.
현우의 스트리밍에 나가는 것은 어 렵지 않았다.
오히려 쉬웠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몸치였다.
거기다 현재 그의 아레나 레벨은 채 10레벨도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골목대장 아카데미에 나 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나가겠습니다. 골목대장의 부탁인 데…. 제가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제이미 무어는 이내 현우의 부탁을 승낙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가 현우로 인해 얻은 것들은 너 무나 많았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남들은 못 나가서 안달인 것을…. 저렇게 고민을 하고 쳐 자빠졌 누….”
김석중이 그런 제이미 무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내가 특별 선생으로 꼭 출연해야 겠어.’
그는 벌써 제이미 무어의 전신을 두들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