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1 화
“폐하, 이것은 고도의 전략입니다.” 현우는 당황하지 않고 황제를 향해 몸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전략? 그게 무슨 말이지?”
황제는 한번 지껄여 보라는 듯한 얼 굴로 대답했다.
현우는 그런 황제의 표정에 태연하 게 웃어 보였다.
“지금 발레르와 싸우셨다면, 고작 마 왕 한 명과 싸우시는 겁니다. 다음 마 왕이 언제 나타날지는 누구도 모를 일입니다.”
황제는 잠자코 현우의 설명을 들었 다.
“하지만 조금만 더 인내하신다면, 최 소한 셋 이상의 마왕과 싸울 수가 있 습니다.”
본디 마계의 마왕은 총 일곱이었다.
그런데 다마노스가 황제의 손에 죽 었고 갈리야는 캘리오락스의 손에 구 슬로 변했다.
그래서 남은 마왕은 총 다섯.
그중 한 명은 르브론과 황제의 스승 인 요한 블레이크였다.
약속의 당사자인 발레르까지 싸우면 넷이고, 그렇지 않아도 셋이 남는다.
“그렇지, 그렇게 흘러가게 되는 것 이지.”
황제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현우의 독단적인 행동을 막 지 않은 것이었다.
발레르와 이 자리에서 싸우는 것은 좋았다.
그러나 이번 한 번의 전투로 끝을 맺기에는 심중의 욕망이 너무나도 컸 다.
“다른 얘기는 잠시 후에 나눠야 할 것 같사옵니다, 폐하.” 현우는 주변에서 꿈틀거리는 기척들 을 느끼고는 허리춤에 있는 현천도의 손잡이에 오른손을 올렸다.
“포식자가 사라지니 날뛸 수밖에.”
황제는 현우의 말에 담긴 의미를 알 아차렸다.
벌판의 전투는 테라마스와 함께 등 장한 발레르 때문에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었다.
그 둘의 존재감에 마족과 마수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바닥을 기었다.
공포의 존재가 사라지자 마수와 마 족들이 다시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 당 연했다.
“다들 전투 준비하세요!!!”
현우는 몸을 돌려 랭커들을 향해 소 리를 질렀다.
발레르가 나타나 전투가 멈추자 랭 커들은 자연스럽게 체력과 마력을 회 복했다.
죽은 몇몇 플레이어를 제외하고는 처음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었다.
‘황제가 빠지는 순간, 전투가 시작된 다.’
발레르와 테라마스가 사라졌음에도 마족과 마수들이 당장 달려들지 않은 이유는 현우의 앞에 서 있는 황제 덕 분이었다.
황제가 흩뿌리는 기세에 눌려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이었다.
‘캘리오락스…. 확실히 비슷한 점이 있군.’
황제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현우를 보며 캘리오 락스를 떠올렸다.
분명 둘은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한쪽은 태양과 같은 느낌이고 다른 한쪽은 미약한 성냥과 같은 느낌이었 지만.
본질은 비슷했다.
‘단순히 몇 번 만난 수준이 아닌 데….’
현우에게서 느껴지는 마력.
그리고 캘리오락스가 갈리야를 향해 내뿜었던 마력.
분명히 같은 마력이었다.
별일 없이 몇 번 만난 것만으로는 절대 저렇게 같은 마력을 지닐 수가 없었다.
무언가 비밀이 있을 게 분명했다.
‘나중에 그렇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 다는 건가….’
이건 좋은 소식이었다.
현우의 능력이 좋아질수록 황제에게 도 좋게 작용할 테니까.
“그러니…빠르게 자랐으면 좋겠어.
빠르게….”
황제가 현우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수 처치 9,751/???]
[마족 처치 21,495/???]
[마족 귀족 처치 30/3이
벌판이 피로 물들었다.
검푸른 풀들이 새빨갛게 보일 정도 였다.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 들뿐이었다.
마족과 마수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 다.
“끝이다!!!”
현우는 현천도를 인벤토리에 집어넣 고 반듯한 바위의 위에 올라가 그대 로 누웠다.
지겹고 힘든 사냥이었다.
5천에 가까운 플레이어들이 남은 마 족과 마수를 상대로 사냥을 시작했지 만, 그들은 금세 나가떨어졌다.
마력 회복 물약이라는 이름의 보조 배터리를 달고 있는 몇몇 플레이어들 만이 그 자리를 지켜가며 사냥을 계 속했다.
당연히 남은 마족과 마수들이 그들 에게 몰렸다.
그나마 희소식이었던 것은 황제와 르브론이 마력이 고갈된 플레이어들 을 향해 달려드는 마족과 마수들을 대신 잡아준 것이었다.
‘나만 혼자 남아서 개처럼 뛰었어.’
결국 끝까지 남아 분투를 펼친 것은 현우 혼자였다.
현우가 마력 회복 물약을 뿌렸다고 는 하나 물약이 그들의 정신력까지는 회복시켜 주지는 못했다.
랭커들도 사람이었다, 사람.
무한한 사냥은 불가능했다.
물론 토끼나 고블린을 잡는 수준의 사냥이면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사냥 이 가능했다.
그것은 선을 넘지 않는 행위.
정말 사냥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족과 마수들을 잡는 것은 그들의 정신력을 계속해서 갉아먹는 행위였다.
이것은 사냥보다는 전투.
그들의 실력을 올리기 위한 훈련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우에게는 여기까지도 사냥 이었다.
특히 스탯이 오르고 고은호와 유리 의 버프를 받은 지금은 정말 사냥이 었다.
마력을 주입해 이리저리 휘두르기만 하면 마족과 마수들이 쓰러져 나갔다.
다만 거대한 물결처럼 보일 정도로 사냥감의 수가 많았던 것이 함정이었 을뿐.
현우의 몸 위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 났다.
르브론이 었다.
“수고했다. 이런 쪽에도 강점이 있 었네. 미처 알지 못했다.”
르브론은 현우의 옆에 그대로 주저 앉았다.
르브론은 현우의 전투를 보며 감탄 했다.
현우의 전투는 뛰어났다.
강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는 게 대단 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싸우면서도, 한 치 의 흐트러짐 없이 처음의 모습을 유 지하는 것.
그게 르브론이 감탄한 점이었다.
“아티팩트를 믿고 날뛰는 기사단 녀 석들도 이렇게 싸워야 할 텐데 말이 지.” 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 며 몸을 일으켰다.
“제국 제일의 기사단이 부족하면, 도대체 어느 기사단이 마음에 드십 니까?”
현우는 마족과 마수들이 전멸한 상 황에서 스트리밍을 꺼버렸기에 편한 얼굴로 르브론과 대화를 나눴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것이지. 내가 키웠다고 해도. 그리고 네가 언제까지 나 기사단장으로 있을 수는 없을 테 니. 또 다른 후계자도 필요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또 다른 후계자라니 요?”
이번에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다른 후계자라니.
“혹시 이제 와서 저를 버리려는 생각 이십니까? 어떻게 스승님이 제게….”
현우는 배신당한 표정을 지으며 르 브론을 흘겨봤다.
그에 르브론은 가볍게 현우의 뒤통 수를 휘갈기는 것으로 대신 답했다.
“키온 기사단장이 되면, 제도에 계속 해서 머물러 있어야 한다. 황명과 같 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네 가 그럴 수 있겠느냐?”
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수 없었다.
애초에 뒹굴뒹굴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은 현실의 얘기였 다.
아레나에서는 뒹굴뒹굴하는 순간 다 른 사람들에게 추격을 당하고 종국에 는 도태되고 만다.
한순간도 멈춰 있고 싶은 마음이 없 었다.
‘즐기는 건 나중에 즐겨도 돼.’
현우의 그런 반응에 르브론이 옅은 미소를 띄웠다.
“다른 제자를 키운다고 한들 처음 은 너다. 어차피 지금부터 제자를 키 운다고 해서 기사단장이 될 정도까지 가르치려면 시간이 부족해. 다음 기 사단장은…. 일단 대충….” 르브론의 말을 들은 현우가 또 한 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르브론을 쳐다봤다.
르브론도 황제와 똑같았다.
‘제국 제일 기사단장 자리를 비워 두 겠다니….’
이어진 르브론의 설명은 정말 어처 구니가 없었다.
제자를 키우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 린다.
그러니 현재 키온 기사단의 부단장 에게 기사단장 대행을 맡기고 대륙을 떠돌며 차기 기사단장에 어울리는 재 능을 가진 아이를 찾아보겠다는 말이
었다.
“허락은 떨어졌습니까? 폐하께서 쉽 사리 넘어가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르브론의 계획에서 가장 큰 장애물 이자 난제가 바로 황제였다.
황제가 르브론이 홀로 대륙을 유람 하는 꼴을 두고 볼 리가 없었기 때 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얘기가 끝이 났다. 괜 히 내가 마계에 온 줄 아느냐?”
르브론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 조건이 있었습니까? 저는 전 혀 몰랐는데….”
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했다.
‘저렇게 투덜대면서도 따라온 이유 가 그거였나?’
그런 조건이라면 르브론이 투덜대면 서도 황제를 쫓아다니는 것도 이해가 됐다.
“얼른 가보거라. 저쪽에서 널 찾는 모양이다.”
한참을 대화를 나누던 르브론이 손 가락을 들어 플레이어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현우와 르브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다들 저만 보네요. 쑥스 럽게.”
그것을 본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르브론은 점점 멀어지는 현우의 뒷 모습을 보고는 현우가 들었으면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을 말을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제자야.”
현우에게 르브론이 했던 말은 거짓 말이었다.
황제가 르브론에게 자유를 약속한 것은 마계에 오기 전이 아니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얘기였다.
발레르가 나타나기 10분 전.
황제와 르브론은 멀찍이서 현우를 비롯한 플레이어들이 벌이는 전투를 관망하고 있었다.
“제자 녀석을 키온 기사단장의 자리 에 앉히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 다.”
르브론은 초점이 사라지기 직전의 눈으로 전장을 살피는 황제에게 넌지 시 말을 걸었다.
“흐음…. 그렇겠지. 후작이 강하다고 는 하나 본질은 모험가. 키온 기사단 장이 되어 제도에 머무르는 게 성에 찰 리가 있나.”
황제가 대수롭지 않게 르브론의 말 에 대답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폐하. 대행이 라지만, 황제의 자리와 키온 기사단장 의 직을 동시에 맡을 수가 있겠습니 까.”
이어진 르브론의 말에 황제의 얼굴 이 굳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강현우 후작이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는 건가?”
“글쎄요…. 저 녀석이 그럴 마음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강제로 황제의 자리에 앉을 수는 있지 않겠 습니까, 폐하?”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황제는 오른손을 들어 얼굴을 몇 차 례 꾹꾹 누르고는 르브론을 향해 몸 을 돌렸다.
“원하는 게 뭐지?”
“원하는 것이라…. 제가 그런 게 어 디 있겠습니까? 누가 까라면 까는 빌 어먹을 공작인데 말입니다.”
르브론이 피식 웃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제국의 황제와 공작이라는 지위에 얽매이지 않았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음모를 꾸미는 악당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니 내게 이런 말을 한 것일 테지. 어서 말해. 마음이 바 뀌기 전에. 어차피 지금 나선다고 해 도 막지 못할 테니. 나는 상관없어.”
황제의 말투가 달라졌다.
그도 아는 것이었다.
이제는 황제와 공작으로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 같은 스승 아래에서 훈련 받던 때와 같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훈련을 덜 받을 수 있 을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바로 그 시절과 같이.
“키온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을 단장 대리로 내세우고 대륙을 돌아다니고 싶습니다. 물론 단순한 유람은 아닙 니다. 차기 기사단장의 재목을 찾기 위한 고행입니다.”
황제는 물 흐르듯 나오는 르브론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알았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곧장 옥 새를 찍어주지. 그러니…. 앞으로는 공작도 나를 도와야겠어.”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 다.
르브론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황제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부디 못난 스승을 용서하지 마라, 제자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