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너무?”
황제가 현우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그는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게 비록 눈꼬리는 내려가지 않고 입꼬리만 올라간 형태라 할지라도.
“너무 쉽다. 이 말이었습니다. 너무 쉬운 명이셨습니다.”
현우는 황제의 눈가에 스치듯 지나 간 스산한 기운을 읽고는 재빨리 말 을 바꿨다.
‘답정너야, 뭐야?’
현우는 속으로 잔뜩 툴툴거리는 것 으로 황제에 대한 불만을 삭였다.
“쉽다라... 후작에게는 무슨 좋은 방 법이라도 있나? 그리 단언할 정도로.”
황제는 명쾌한 현우의 대답에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둘러대지?’
현우는 웃고 있는 얼굴과 다르게 속 이 타들어 가는 심정이었다.
황제의 기세에 황급히 둘러대기는 했 으나 딱히 생각해둔 것이 없었기 때문 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생각할 시간이 주어 지지도 않았다.
즉석에서 임기응변식으로 내뱉은 것 에 불과하니까.
‘아! 일단 팔 사람부터 다 팔아보자.’ 현우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머 릿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입 밖 으로 꺼냈다.
“블레이크 공작이 도와준다면…. 발 레르를 그 자리에 끌어내는 것도 불 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현우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요 한 블레이크였다.
황제와 더불어 또 하나의 인간 출신 마왕.
“블레이크 공작? 그게 무슨 얘기지?” 황제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사실 그도 현우에게 말한 것이 말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 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얘기를 내놓을 지....’
하지만 매번 이렇게 흥미로울 만한 말을 해대니 알면서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재미가 있으니까.
“블레이크 공작이 모습을 드러내면 발레르도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폐 하.”
“자세히, 자세히 설명해봐. 서두는 필요 없다.”
현우는 새빨간 혀로 입술을 적시고 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제가 폐하의 명을 받아 전쟁을 일 으키기 전에는 마계를 떠돌아다녔습 니다. 그때 우연처럼 발레르를 만났 고 그가 절 블레이크 공작에게 안내 했습니다.”
현우는 과거의 이야기를 풀기 시작 했다.
이는 황제에게 정확한 얘기를 전해 주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머리를 굴릴 시간이 필요했기에 때문 이기도 했다.
“블레이크 공작에게 절 안내한 발레 르는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만 남 때는 블레이크 공작이 마왕이 된 이후였습니다. 그때의 저는 폐하께서 내리신 명을 수행하기 위해 블레이크 공작을 찾았을 때였습니다.”
이어진 현우의 말에서 황제는 뭔가 를 깨달았는지 눈을 빛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군.’
발레르와 블레이크 공작이 싸웠다든 가 하는 일은 아닐 터였다.
그랬다면 발레르가 현우와 평화롭게 얘기를 나눌 사이가 아니었을 테니까.
“혹시 둘이 무슨 약속이라도 했나? 가령.... 도시에서 나오지 말라든지.” 현우는 황제의 추측에 기겁했다.
황제는 단순한 상황 설명만으로 사 실에 거의 근접한 추측을 내놓은 것 이었다.
‘진짜, 제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들여 다보는, 뭐 그런 건가?’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날 발레 르는 전쟁을 용인하는 조건 중 하나로 블레이크 공작의 전쟁 불참을 요구했 습니다.”
“왜? 발레르가 블레이크 공작의 참 전을 막은 것이지?”
“블레이크 공작은 강합니다. 발레르
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마왕도 블레 이크 공작을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발레르의 입장 에서는 굳이 변수를 한 가지 더 만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한 얘기였다.
요한 블레이크에게 죽은 마왕인 르 볼레는 본인 소유의 도시 내부에서, 마력석의 마력까지 전부 끌어다 쓰고 도 처절한 패배를 당했다.
그것을 아는 발레르가 굳이 요한 블 레이크라는 위험 요소를 놔둘 리는 없 었다.
‘요한 블레이크가 아닌 어지간한 실 력자 한둘쯤은 처리할 수 있다는 생 각이었겠지만….’
아쉽게도 황제나 르브론은 어중간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발레르에 필적하는 괴물 들이었다.
“그래서…. 블레이크 공작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그것을 따지기 위해 서라도 발레르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 다. 그런 말인가?”
황제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 며 대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발레르는 이미 폐하의 무력이 어느 정 도인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블레이 크 공작이라는 실력자가 합류하는 것 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슨 수 를 써서라도 막을 겁니다.”
즉석에서 생각난 대로 막 내뱉은 말 이지만,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 다.
발레르의 목적은 다른 마왕들을 쳐내 고 그 자리를 자신이 얻는 것이지 인 간들에게 마계를 내주는 게 아니었으 니까.
‘바쁘겠네.’
아무래도 알포레 전투 이후에도 쉴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요한 블레이크가 있는 곳은 현우밖 에 모르고 또 안다고 해서 갈 수 있 는 곳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떼로 다니면 모를까.’ 길드 단위로는 절대 불가능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들은 황제의 인내심이 몇 번이고 바닥을 내려친 후에야 요한 블레이크 에게 닿을 수 있을 터였다.
“이번 원정이 끝나거든…. 후작은 블 레이크 공작을 불러오라. 오랜만에 그 의 얼굴이 보고 싶구나.”
황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얼굴이 보고 싶기는…. 혼자 놀고 있는 꼴을 못 보는 것이겠지….”
황제의 말을 들은 르브론이 중얼거 렸다.
“블레이크 공작은 공작의 스승이 아 닌가. 공작은 스승이 보고 싶지 않은 가 보지?”
“그 얼굴이라면, 진작 봤으니 괜찮습 니다.”
“진작 보았다라…. 그럼 그대가 가겠 나? 후작 대신.”
“잘 다녀오너라. 꼭 모시고 와야 한 다.”
르브론은 현우의 어깨를 툭툭 두드 리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아주 급격한 태세 전환이었다.
“블레이크 공작을 잘 모셔 오겠습니 다.”
현우가 그런 르브론의 손길을 느끼 며 고개를 끄덕거렸을 때.
현우의 눈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올 랐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또 한 번의 뒤통수]
황제는 발'레르마저 죽이고 싶다. 발레르 를 전장에 소환하기 위해 요한 블레이크 를 데려오자.
등급 : MS
조건 : 요한 블레이크와의 만남 0/1, 요한 블레이크와 황제의 만남 0/1.
보상 : 경험치, 황실 기여도, ????의 선물.
누구도 받지 못하는 오로지 현우만 받을 수 있는 퀘스트가 생성됐다.
‘이번 퀘스트는 좋다, 좋아.’
퀘스트창을 읽어내린 현우의 얼굴에 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경험치와 황실 기여도만을 주던 이 전 메인 시나리오와는 다르게 누군지 모를 이의 선물이 보상 칸에 떡 하니 이름을 올려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꼭 데려오겠습니다.”
현우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수십 미터가 넘는 성벽이 무너져 내 렸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마족과 마수들 이 벌떼처럼 튀어나왔다.
그렇지만 이미 기세는 넘어간 이후 였다.
마족과 마수들은 가두리 양식장의 물 고기처럼 나오는 족족 플레이어들의 경험치가 되었다.
알포레에 남아 있는 귀족들은 아무 도 없었다.
그들은 애당초에 성벽 밖에서 현우 를 비롯한 일부 플레이어들에게 모조 리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귀족이 없으니 변수도 없었다.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진 학살이 끝나 고 더 이상 알포레에 남아 있는 마족 과 마수들이 없었다.
[알포레 함락 1/1]
플레이어들이 텅 빈 알포레에 진입 하자 퀘스트의 종지부를 알리는 메시 지창이 떠올랐다.
[1차 원정의 끝을 클리어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황실 기여도 132,998을 획득했습니다.]
플레이어들은 퀘스트의 종결 메시지 를 보고는 제각각 모여 정산을 시작 했다.
얻은 아이템을 모으고 제각각 기준 에 맞춰 얻은 아이템을 분배했다.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이번 마계 원정에 참여한 그대들의 수고를 잊지 않을 것이다.”
허공에 떠오른 황제가 플레이어들을 향해 연설을 시작했다.
“1차 원정은 이것으로 분명 끝이 났 다. 그대들은 모두 가고자 하는 곳으 로 가도 좋다. 하지만...”
황제의 말이 잠시 끊겼다.
황제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플레이 어들을 모두 한 번씩 살폈다.
그러고는 그들의 시선이 모두 모였 음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말을 이어 나 갔다.
“이곳에 남아 최후의 전투에 참여하 는 이들에게는 나름의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황제의 몸이 천천히 지상을 향해 하 강했다.
5,000이 넘는 플레이어의 두 눈이 황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메인 시나리오가 이게 끝이 아니었 어?”
“하나가 더 남았다고?”
“퀘스트에는 분명 끝이라고 하지 않 았나?”
플레이어들은 제각각 얘기를 나눴다.
그들로서는 처음 듣는 얘기였던 것 이었다.
이는 현우의 재빠른 행동이 낳은 결 과였다.
현우는 실시간 스트리밍 시에 송출되 는 소리를 껐다가 켠 경험이 수없이 많았다.
발레르와 황제.
둘과 나눴던 대화는 스트리밍에 송 출되지 않았다.
그저 어항 속의 금붕어처럼 입술만 벙긋거렸을 뿐이었다.
현장에 있던 이들 역시 발레르가 소 리치는 말만 들었을 뿐 황제나 현우 가 낮게 말하는 소리까지는 듣지 못 했다.
그들 사이의 거리가 결코 가깝지 않 았기 때문이었다.
테라마스의 거대한 위용에 놀란 플 레이어들이 뒤로 물러났고 오로지 황 제와 현우만 그 현장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일단 좋은 게 좋은 거 아 냐? 이런 전쟁 한 번이면 레벨도 올 리고 보상도 더 챙기는 건데.”
“전부 다 같이 빠지는 게 아니면 무 조건 남아야지. 시청자들 빼앗긴다.”
“일단 정확한 일정부터 알아야 할 텐데.... 너무 빠르면 보급 부대가 오 기 전에 시작할 테니까.”
마계 전쟁에 참여한 길드들은 전투 마다 막대한 양의 물약을 소모하고 있 었다.
그리고 그 소모된 양을 채우기 위해 저마다 보급 부대를 운영했는데 마냥 결과가 좋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단일 길드로도 충분히 보급이 가능 했다.
하지만 점점 에토노와의 거리가 멀 어지면서 혼자서는 에토노 근처를 빠 져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마족과 마수들이 계속해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한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세 개.
계속해서 길드들이 몸집을 불려 보 급 부대의 덩치를 키웠다.
하지만 그래도 이동 속도가 계속해 서 줄었다.
본대라고 할 수 있는 원정대와의 전 력 차가 워낙에 컸기 때문이었다.
“다음 보급까지 대략 2주가 남았어.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급을 받아야 해.”
체력과 마력 회복 물약이 없는 전 투는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뒤에서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어야 할지도 몰랐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황제의 말을 가 지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현우는 스트 리밍을 종료하고 구석진 곳으로 숨어 들었다.
“귀환.”
[블랑 귀환석을 사용합니다.]
[블랑으로 이동합니다.]
[현재 남은 사용 횟수 : 5/6]
[충전까지 남은 시간은 5시간 59분 59 초입니다.]
알포레에서 블랑으로.
귀환석이라는 고급 아이템을 사용해 순식간에 이동했다.
현우는 익숙한 정경을 뒤로하고 블 랑의 중앙에 위치한 성으로 움직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블레이크 공작 님.”
성벽을 넘고 은밀하게 허공을 뛰어 도착한 곳에는 블랑의 주인이자 현우 가 찾던 당사자인 요한 블레이크가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로고….”
요한 블레이크는 침대에 누워 현우 를 맞이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