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7화
“너무 싱겁게 통과를 했네요.”
이종족들이 앙프라 숲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보던 현우는 늘어지게 하품 을 했다.
앙프라 숲을 지나치는 동안 별다른 사건과 사고가 없었다.
스트리밍은 애당초에 끝이 났다.
이종족들의 전투를 조금 보여주고, 라쿤과 가벼운 먹방을 진행한 게 전 부였다.
뭘 더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게 없었다.
몬스터들이 나타나 전투가 일어나면 숫자로 밀어붙였다.
‘라쿤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 게 제 일 임펙트가 있는 장면이었겠네.’
굳이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라쿤의 전투였다.
아레나 위크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싸하게 만들었던 라쿤의 진짜 무력이 단편적으 로나마 드러났었다.
라쿤은 가벼운 도끼질 한 번으로 수 백 그루의 나무를 베어내고 달려들 던 몬스터들의 상체와 하체를 분리 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났으니….’
그 이후로는 라쿤이 전투에 나서는 법이 없었다.
그가 나서기도 전에 몬스터들이 모 두 정리가 됐다.
1만이라는 숫자는 그만큼 거대한 것 이었다.
“그래도 사고가 나는 것보다는 지루 한 게 낫겠지. 이놈들 중에 하나라도 죽었으면, 몇몇 녀석들이 쫑알쫑알했 을 게 분명하니.”
라쿤이 치를 떨었다.
1만 명이나 되는 이종족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지루하고 귀찮았다.
수준은 또 얼마나 제각각인지 혼자 서는 절대 몬스터를 처치하지 못하는 녀석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이들은 이동할 때 신경 을 써줘야 했다.
심력 소모도 소모였지만, 이동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게 가장 짜증이 나 는 부분이었다.
항상 혼자거나 다칸과 움직였다.
거기에 칸쿤까지 더해도 셋이었다.
거기다 칸쿤과 라쿤은 거리낄 게 없 는 수준의 강자였다.
어디로 다니든 걸리적거리는 게 전 혀 없었다.
“미안하지만, 프니스로 가는 여정에 서 나는 빠지겠다. 자네가 수고를 좀 더 해야겠어.”
라쿤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현우 의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습니다. 저는 익숙합니다.”
현우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루오스 제국의 후예들을 끌고 다니 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현우는 비교적 약자들을 데리고 돌 아다니는 일에 익숙했다.
몇 차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 이다.
가장 큰 예가 바로 루오스 제국의 후예들을 데리고 대륙을 횡단한 것이 었다.
루오스 제국의 후예들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현우에 비하면 현저히 약 했고 현우는 그들을 배려하며 움직여 야 했다.
현우는 이런 짓을 한 번 더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눈앞이 핑핑 도는 느 낌이 었다.
‘아니지, 신계에서 다시 한번 더 해 야 하는구나….’
보모 역할은 현우의 앞에 몇 차례 나 펼쳐질 예정이었다.
하루.
앙프라 숲을 빠져나온 이종족들이 자신들이 지낼 터전의 위치를 정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이곳으로 하시겠습니까?”
현우가 지겹다는 얼굴로 물었다.
“재기는 엄청 재. 그냥 아무 데나 고 르고 살면 되지. 얼마나 좋은 곳에 살 려고 하는 거냐? 정령도 있어, 마법도 쓸 줄 알아. 드워프까지 있는데. 보자 보자 하니까. 끝을 모르네.” 라쿤이 현우의 옆에서 성질을 부렸 다.
이번에도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당 장 도끼를 휘두를 기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라쿤은 그저 검은 숲 강줄기 근처에 초원 늑대 부족의 마을을 만들었다.
따진 입지는 그것 하나였다.
당연히 이종족들이 온갖 조건을 따 져대며 계속해서 이동하는 게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이곳에 정착하겠습니다. 드워프들의 의견으로는 이곳이 최적의 입지라고 합니다.”
1만 이종족의 대표를 자처하는 엘 프가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얼른 공사부터 시작해. 먹을 것도 알아서 구하고. 농사도 지어야 지. 그리고 인간들과 교역할 물건을 부지런히 만들어 놓고. 도시가 완성 되면 인간들과 교역도 열심히 하라 고. 알았나? 대신 맞지는 마라. 아니 지, 맞았으면 상대를 죽여. 뒷감당은 연맹에서 한다.”
짜증만 내던 라쿤이 종국에는 이들 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줬다.
“라쿤 님 말이 맞습니다. 인간들이 이상한 짓을 하면 죽이세요. 대신 증 거는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증언 이 아니라 확실한 물증 말입니다. 물 증만 있다면 저도 여러분들의 손을 들어드리 겠습니 다.”
현우가 라쿤의 말을 거들었다.
현우는 어지간해서는 이종족의 편에 설 생각이었다.
배타적이기는 하지만 상명하복이 확 실한 이종족들이 라쿤이나 여타 대족 장들의 결정을 무시하고 행동할 확률 은 극히 낮기 때문이었다.
“그것참 고마운 얘기군.” 라쿤이 현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은 인간이 제일 잘 알지 않겠 습니까? 사고를 칠 가능성이 가장 큰 쪽입니다.”
이것은 확신이었다.
누군가는 사고를 분명히 치리라는 확 신.
늦은 밤, 현우는 기내용 캐리어에 짐 을 하나둘씩 챙기기 시작했다.
편안한 티셔츠와 바지부터 외출용 옷 까지 캐리어가 가득 찰 정도였다. 옷가지들로 빵빵해진 캐리어를 닫은 현우는 고개를 들고 방 안을 살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좌우로 돌린 현우 는 곧장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드르륵거리는 바퀴 소리에 놀란 영 찬이 고개를 돌려 현우의 방 쪽을 쳐 다봤다.
“뭐야? 너 어디 가냐?”
영찬은 반쯤 깐 귤을 그대로 쟁반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 다.
“휴가 간다. 겨울 휴가.”
현우는 쟁반에 놓인 귤 두어 개를 챙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휴가? 여행을 간다고? 갑자기?”
“너도 가는데. 나도 가야지.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잘 다녀와라. 난 바 빠서 먼저 갈게.”
현우는 영찬의 격한 반응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캐리어를 질질 끌며 현관 으로 움직였다.
“누구랑 가는데? 혼자 가? 아닌데… 저 새끼가 혼자 갈 스타일은 아닌 데….”
영찬이 현우의 등 뒤에 붙어 조잘댔 다.
지금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 는 얼굴이었다.
“너 님은 너 님 친구분들이랑 잘 다 녀오시고요. 전 갑니다.”
현우는 마지막까지도 영찬의 말을 무 시하며 오피스텔을 나섰다.
‘누구지, 진짜?’
홀로 오피스텔에 덩그러니 남겨진 영 찬은 입술을 질끈 씹으며 머리를 굴 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얼굴들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현우와 같이 여행을 갈 사람은 없 었다.
몰래카메라는 현재 진행 중이었으니 까.
‘ 레이나…?’
그 순간 영찬의 머릿속에 레이나의 이름이 떠올랐다.
며칠 전, 현우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 는 연락을 받았다던 그녀의 말도 함 께.
영찬은 매끄러운 오피스텔의 바닥을 박차고 빠르게 거실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소파에 놓여 있는 그의 스 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레이나?”
영찬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의 상대는 당연히 레이나였다.
- 영찬? 무슨 일이에요?
레이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묘하게 하이 톤이 었다.
평소보다도 더 높게 느껴졌다.
“혹시…. 그날 이후로 현우에게 또 연락받은 적 있어요?”
영찬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 그날이요? 아! 여행 말인가요?
“네, 여행 관련해서요.”
- 네, 두 번쯤 더 받은 것 같은데 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지금 어디 인지 물어봐도 되나요?” 질문을 던진 영찬이 침을 꼴깍 삼켰 다.
돌아올 레이나의 대답 여하에 따라 현우의 행방이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 다.
‘레이나도 아니면…. 그냥 본가에 갔 다고 봐야지.’
그냥 자존심이 상해 오피스텔을 나 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영찬의 가정은 곧장 폐 기됐다.
- 지금요? 지금 집인데요?
“혹시…. 현우랑 만나기로 했나요?”
- 네, 30분 정도 남았네요. 약속 시 각까지.
영찬은 터져 나오는 탄식을 겨우 참 으며 말을 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현우 녀석이 갑 자기 말도 없이 집을 나가서요. 혹시 레이나는 알까 싶어서 물어본 거예 요. 그럼 좋은 시간 되세요.”
영찬은 통화를 종료했다.
스마트폰이 영찬의 손에서 흘러내려 소파로 떨어졌다.
“부럽다….”
결국 영찬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 왔다.
몰래카메라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트렁크에 캐리어를 실은 현우는 차 에 기대어 서서 스마트폰으로 SNS 어플을 켜고 눈동자를 굴렸다.
현우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에서 레이나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작은 캐리어를 질질 끌고 왔다.
“오래 기다렸어요?”
레이나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현 우에게 다가와 물었다.
“아뇨, 저도 지금 막 나왔어요.”
현우는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 고는 레이나의 캐리어를 자동차의 트 렁크에 집어넣었다.
“얼른 출발하죠. 비행기 시간 생각 하면 빠듯해요.”
현우가 차에 올라타며 말했다.
시간이 빠듯했다.
마지막 비행기로 예약을 해놓기는 했지만, 그래도 최소한 일정 시간 이 전에는 공항에 도착해 모든 준비를 마쳐야 했다.
“알았어요. 빨리 가요.”
레이나가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추운 겨울임에도 뜨겁게 열 이 오른 것만 같은 두 뺨을 손바닥 으로 가렸다.
“감기 걸렸어요? 얼굴이 빨간 것 같 은데...?”
거울을 통해 레이나의 붉어진 얼굴 을 본 현우가 물었다.
“아니요, 따듯한 곳에 있다가 갑자 기 추운 곳으로 나와서 그런가 봐요. 전 괜찮아요.”
레이나는 뺨에 댔던 손을 내려 호 호 불었다.
춥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행 동이었다.
“춥긴 하죠?”
현우는 히터의 온도를 적당히 올려 주었다.
겨울밤 자동차 내부는 추웠다.
레이나가 춥다고 하는 것도 이해가 될 정도였다.
김포 공항으로 가는 동안에도 대화 는 끊기지 않았다.
서로의 근황을 주고받았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김포 공항에 도착했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은 이른 시각이 었다.
없던 여유가 조금은 생겨났다.
“다음 주에 돌아간다고 했죠?”
가볍게 체크인까지 마친 현우가 레 이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다음 주 수요일에요. 스프링 리 그를 준비해야 하니까요.”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이 금요일이니 정확히 5일 후 그녀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 을 실은 상태일 것이다.
“그럼 이번에 무리하는 것 아니에요? 이틀이나 쉬면 지장이 있을 텐데요.”
이번 제주도 여행은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낮까지.
대략 이틀이 조금 못 되는 시간을 제주도에서 보내게끔 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시간 동안에는 아레나를 할 수가 없었다.
스트리머인 현우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프로게이머가 직업인 레이 나에게는 나름대로 중요한 시간이었 다.
이틀을 쉰다고 해서 당장 남들과 유 의미한 차이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이 런 시간이 모여 조금씩 뒤처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일단 오늘은 제주도에 가서 저녁부 터 먹죠. 시간이 늦었으니까. 내일은 아침에 차를 렌트해서 느긋하게 관광 을 하고요.”
현우는 어떻게 움직일지 대강의 계 획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스트리머가 된 이후로는 시간을 내 는 게 어려워졌다.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활용하는 능 력이 필요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레이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았다.
현우와 함께라면.
“저거 골목대장 아니야? 옆에 여자 는 레이나고.”
그리고 그런 화기애애한 두 명을 지 켜보는 사람 중에서는 두 사람을 알 아보는 이들도 있었다.
찰칵.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