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1화
현우와 리우 쉐이의 독대가 있었던 날로부터 정확히 사흘이 지났을 때.
현우는 제도, 유스마를 찾았다.
“폐하, 소신 강현우이옵니다.”
현우는 화려한 문 앞에서 서서 조 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들어와.”
황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른한 목소리로 현우를 맞이했다.
“폐하, 그간 안녕하시었사옵니까.”
“안녕이라…. 좁은 대전에 갇혀 도 장만 찍는 게 안녕이라면, 안녕한 것 이겠지.”
황제는 유독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 다.
‘우울증 환자도 아니고….’
현우는 황제가 내뿜는 부정적인 에 너지에 침만 꼴깍 삼켰다.
‘이러면 조금 불편한데….’
황제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대화를 나누는 것부터 힘이 들었다.
갑과 을이라는 관계에서는 어쩔 수 가 없는 일이었다.
“폐하가 평안하셔야 제국이 바로 섭 니다. 조금만 더 참으심이 어떠신지 요?”
현우는 누가 들어도 면피용 발언인 말을 서슴없이 내질렀다.
“다른 귀족들과 자주 만나나?”
황제가 얼굴을 찌푸리며 질문을 던 졌다.
현우의 말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 었다.
자주 듣던 말이었다.
다른 귀족들에게.
“제게 그럴 시간이 어디 있겠습니 까, 폐하. 제국을 위해 바쁘게 뛰고 있습니다.”
현우는 양손을 들고 흔들며 난색을 표했다.
차라리 그럴 시간이라도 있으면 억 울하지나 않았다.
“그런가?”
황제가 묘한 기색을 담아 되물었다.
“내일부터 북부에서 다시 전쟁을 시 작할 예정입니다, 폐하.”
현우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불편한 주제는 넘기는 게 나았다.
“전쟁을? 이렇게 갑작스럽게? 준비 도 없이?”
황제는 금시초문이라는 듯 현우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이번 전쟁의 주축은 모험가 들입니다. 제국의 군대도 모험가들이 보유한 전력 정도면 충분합니다.”
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준비에 필요한 시간은 없었다.
단지 황제가 내걸 보상만이 필요할 뿐이었다.
“폐하의 명 한마디만 떨어지면, 수 많은 모험가들이 북부의 전쟁에 뛰 어들 것입니다.”
“그래…. 언제까지 언데드들의 손에 제국의 도시를 쥐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우의 눈앞에 퀘스트의 생 성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잃어버린 도시 수복]
황제는 언데드 군단에게 빼앗긴 북부 의 도시를 더 이상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다. 황제의 명을 따라 잃어버린 도시 를 되찾자.
등급 : SS+
조건 : 잃어버린 도시 수복 0/???
보상 : 경험치, 황실 기여도.
“당장 모험가들에게 황명을 내려라. 북부의 잃어버린 도시를 되찾으라고.”
황제가 권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공작에게는 다른 보상을 약속하지. 보통의 모험가들과는 다르니 말이야.”
황제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현우가 들어왔던 대전의 입 구에서 시종 한 명이 나타났다.
시종은 자그마한 상자를 들고 와 황 제에게 건넸다.
“이 상자 안에는 공작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들어 있지. 전쟁에서 공 을 세우면…. 이걸 주지.” 황제가 상자를 열었다.
상자의 안에는 고풍스러운 표지로 장식된 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다른 게 더 들어 있었지만, 현우의 눈에는 오로지 책만이 보였다.
‘스킬 북인가?’
현우의 눈에 열기가 솟아났다.
스킬 북.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특히나 황제가 주는 스킬 북은 언제 나 유용했다.
‘못해도 유니크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도시를 꼭
수복하겠습니다, 폐하.”
현우는 사명감이 가득한 얼굴로 대 답했다.
“공작만 믿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퀘스트가 생성되었습니다.]
[황제의 신뢰]
황제는 당신을 신뢰하고 있다. 황제의 믿음에 부응하자.
등급 : SS+
조건 : 잃어버린 도시 수복 0/???
보상 : 경험치, 황실 기여도, 황제의 선 물
현우에게는 또 다른 퀘스트가 생성 됐다.
‘나는 다르다.’
현우는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 다.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다른 보상을 받는다는 것.
기분 좋은 차별이었다.
‘어차피 서페드의 부탁이 있었는데… 일이 너무 잘 풀리네.’
일거양득.
현우는 벌써 황제가 건네줄 스킬 북 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해져
있었다.
**♦
황제의 퀘스트.
이는 많은 대형 길드들의 목표가 되었다.
레벨 업에 치중하던 이들이 모두 북 부로 향했다.
예전에는 형편없는 보상에 눈을 두 지 않았다.
사정이 바뀐 이유는 하나였다.
서대륙에서 보여준 르브론의 신위. 그리고 그것으로 부각된 서대륙과 동대륙 사이의 무력 차이.
그로 인해 사람들은 서대륙의 유일 제국, 유스마온 제국에 대해 더 주의 를 기울여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리우 쉐이 님, 준비는 다 되셨습니 까?”
현우는 그의 옆에 멈춰선 남자, 리 우 쉐이에게 말을 걸었다.
“최소한의 방어 병력만 남기고 전부 끌어모았습니다. 거기에 골드와 신전 기여도를 사용해 신전의 사제들까지 불렀습니다.”
리우 쉐이는 옅게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너무 우울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 금 쓴 골드와 기여도는 금세 채워질 겁니다. 신전 기여도는 어차피 언데 드를 잡으면 저절로 채워지지 않겠습 니까?”
“신전 기여도야 그렇겠지만…. 출혈 이 큽니다, 커요.”
“제가 다 챙겨드리는 겁니다. 너무 손해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현우는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 는 리우 쉐이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 다.
하지만 리우 쉐이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리우 쉐이가 힘든 것은 소모한 골 드와 신전 기여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우의 말처럼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거둬들일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구룡 길드 내부에 있 었다.
‘멍청한 놈들이 머리만 제대로 돌아 갔어도... 이렇게 힘들지는 않을 텐 데….’
구룡 길드의 다른 용들.
그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길드의 문제가 어떻든 항상 받던 혜택을 그대로 유지하길 원했다.
‘사냥을 더 하고 싶다고? 미친 새끼 들. 길드가 망하면 니들도 끝인 걸 몰라?’
며칠 전 대화를 떠올리자 리우 쉐 이는 다시 속이 기름 끓듯 부글부글 끓는 것을 느꼈다.
“표정을 보니…. 문제가 다른 곳에 있으신가 봅니다?”
현우가 웃으며 리우 쉐이에게 말을 붙였다.
“아닙니다, 그냥 전쟁을 치를 생각 을 하니 마음이 뒤숭숭해서 그렇습 니다.”
리우 쉐이는 고민을 숨겼다.
굳이 약점을 현우에게 드러낼 필요 는 없었다.
한 번의 하소연이 나중에 어떻게 돌 아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뭐, 그렇다면 더는 묻지 않겠습니 다. 바로 출발하시죠.”
현우는 거기서 더 묻지 않았다.
리우 쉐이의 뜻을 존중했다.
“골목대장님이 사실상 이번 원정군 의 대장이신데 직접 하시는 게 어떻 습니까?”
“제가 무슨 대장입니까. 이 군대의 주인은 구룡 길드, 리우 쉐이 님 아니 십니까.”
현우는 리우 쉐이의 제안을 완곡하 게 거절했다.
하지만 리우 쉐이는 포기하지 않았 다.
재차 현우에게 같은 제안을 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골목대장님이 하 시는 게 맞습니다. NPC가 없으면 모 를까 NPC들이 저렇게 많지 않습니 까?”
리우 쉐이가 현우에게 미루는 이유 는 바로 NPC들 때문이었다.
신전에서 빌려온 이들은 물론이고 영지의 병사들에게도 현우의 영향력 은 절대적이었다.
특히 지난 전쟁에서의 활약 덕분인 지 영지 내에서는 거의 영웅이나 다 름이 없었다.
영주인 리우 쉐이보다 더욱 위상이 높았다.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결국 현우는 거듭된 리우 쉐이의 제 안을 거절하지 못하고는 고개를 끄 덕였다.
현우는 성벽에 올라 잘 정렬된 NPC 들을 향해 섰다.
“유스마온 제국의 공작 강현우입니 다. 지난날, 제국은 언데드들의 침공 으로 몇몇 도시를 잃었습니다. 하지 만 우리는 결국 막아냈습니다. 그리 고 바로 오늘, 빼앗긴 도시를 되찾 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위 험할 겁니다. 힘겨울 겁니다. 그럼에 도 우리는 되찾을 겁니다. 우리의 땅 을 ”
현우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현우의 말이 계속될수록 NPC들의 표정이 조금씩 변해 갔다.
덤덤한 표정에서 격앙된 얼굴로.
종국에는 타오르는 불처럼 기세를 폭발시켰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의 반응은 NPC 들과 달랐다.
감동보다는 놀라움이 컸다.
“지금 공작이라고 그랬지?”
“공작이 맞아? 그게 되는 거였어?”
“예전에는 후작이라고 하지 않았나?”
“공작이 되려면 도대체 승작 허가권 이 몇 장이나 필요한 거지?”
“황실 기여도도 만만찮을 텐데? 혼 자서 모아서 가능한가? 신대륙은 지 난번에 진 쉬종의 백작 승급으로 다 썼을 텐데?”
공작.
이 한 단어가 주는 충격은 어마어마 했다.
이 자리에 모인 플레이어들은 아레 나 내에서 가장 레벨이 높은 구간의 플레 이 어들이 었다.
그랬기에 다가오는 느낌이 더욱 달 랐다.
플레이어들에게는 닿을 수 없는 미 지의 영역이었다.
“역시 골목대장이라는 건가….”
“소문처럼 황제와 무슨 관계를 맺 은 건가? 황실 기여도를 이렇게 빠 르게 모으다니….”
“이번 퀘스트도 사실상 골목대장이 받아냈다는 얘기가 있어.”
“어디까지 뻗어 나가려는지….” 현우를 보는 랭커들의 시선은 그들 을 바라보던 시청자들과 크게 다르 지 않았다.
미지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눈빛이 었다.
“이제 그만 출발합시다, 리우 쉐이 님.”
성벽에서 내려온 현우는 리우 쉐이 에게 다가갔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저희 길드원들이 알아서 쫓아갈 겁니다.”
리우 쉐이는 몸을 돌려 그의 뒤쪽 에 서 있는 길드원들을 향해 턱짓을 해 보이고는 현우에게 고개를 끄덕 였다.
현우도 리우 쉐이를 쳐다보며 고개 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성문을 향해 걸 음을 옮겼다.
혼자 걸어 나가던 현우가 돌연 뒤 쪽을 확인했다.
리우 쉐이가 한창 소리를 지르다 현 우와 눈을 마주치고는 재빨리 현우 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 을 돌려 다시 성 밖을 향해 걸었다.
그러고는 누구도 들을 수 없을 정 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지금 스트리밍 켜세요. 미리 짜놨던 대로 움직입시다. 딱딱 맞출 필요는 없지만, 최대한 그래도 맞춰는 보세 요. 그러려고 만들어 놓은 대본 아닙 니까.”
현우의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알겠습니다, 골목대장님.”
현우의 연락을 받은 캐런은 바쁘게 움직였다.
손으로는 실시간 스트리밍을 준비했 고 입으로는 다른 길드원들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말한 거 잊지 않았지? 오늘부터 보 름 정도는 방송에 나가는 것처럼 빡 빡하게 움직여야 돼. 알지?”
이미 같은 말을 수차례 반복한 탓 인지 캐런의 말을 듣는 베놈 길드원 들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그만 좀 해. 우리가 애야?”
“세 살배기 애한테 말을 해도 이 정 도면 알아들었겠다.”
“아주 귀에 박힌 것 같아. 꿈에서도 들린다니까? ‘크림슨? 정신 똑바로 차 려. 말 가려서 하고. 알았어?’ 휴〜.”
베놈 길드원들은 제각각 캐런을 향 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다 걱정돼서 하는 말이야. 골목대 장이 부탁한 일이라고. 망치면 끝이 야, 끝! 알잖아, 그 사람이 얼마나 무 서운 사람인지.”
하지만 캐런은 그래도 안심이 되질 않았다.
이번 일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했다.
돈을 받고 일을 하던 때보다 더 신 중해야 했고 성공해야만 했다.
“알지, 안다고. 삐끗하면 나락이라는 거.”
로제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분명 그들은 양지로 나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욱 큰 족쇄가 그 들의 발목에 채워져 있었다.
“그럼 지금 바로 켤 테니까. 머릿 속으로 한 번 더 생각해.”
말을 끝낸 캐런이 박수를 몇 차례 쳤다.
그러고는 앞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 를 머금었다.
“시청자 여러분들, 오랜만입니다. 베 놈 길드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