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7화
‘주인 놈이 드디어 진짜 미쳤다.’
현우의 말을 들은 탱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돌아도 단단히 돌았다.
저런 걸 보고 개싸움이라고 하다니.
‘개라기보다는 신들의 싸움이라는 게 더 정확할 텐데….’
루케이와 라쿤이 충돌할 때마다 땅 이 갈라지고 하늘의 구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신들의 전투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 리는 광경이었다.
- 이게 개싸움이라고?
- 개싸움 수준이?
- 개싸움 두 번에 대륙이 사라진다.
- 저런 개를 가진 주인은 얼마나 좋을 까 7
시청자들은 탱이와 다르게 벌써 몇 차례 이 전투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하지만 놀라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볼 때마다 놀라웠다.
그렇기에 현우의 말이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 이건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돼.
- 몇 레벨쯤 되면 저렇게 싸울 수 있 을까?
- 레벨이 오른다고 저게 될까?
- 이미 한계가 느껴지는 중. 실력이 안 되니 레벨이 올라도 강해지는 느낌이 덜 함.
- 느낌이 덜한 게 아니라 그냥 거기까 지인 듯. 컨트롤이 안 됨. 심지어는 아예 다른 영역의 싸움이 라는 채팅들도 많았다.
사냥을 하면 무조건 경험치가 오르 고 스킬 숙련도가 오르는 게임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채팅창에는 비슷한 내용의 채팅들이 연신 올라왔다.
‘내 멘트가 그렇게 문제였나?’
현우가 입맛을 다셨다.
언뜻 후회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 만, 어쩔 수 없었다.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었고 입 밖에 나온 말 역시 삼킬 수는 없 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시청자 여러분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개싸움이 아니라 신 들의 전투입니다.”
현우의 선택은 사과였다.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바꿨 다.
- 뭐 그건 딱히 상관없고…. 여기까지 온 이유가?
- 저거 구경하러 왔겠지.
- 솔직히 이만큼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_ UI,맨 처음 전투도 지금 정도 거
리였음.
시청자들은 현우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오로지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엄청난 전 투였다.
수백억 달러가 넘는 제작비를 쏟아 부어 만든 영화만큼이나 박진감이 넘 쳤다.
몰입감은 그보다 몇 배는 더 높았다.
영화는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지 만, 아레나는 달랐다.
직접 경험해본 세계였다.
‘ 반반인가?’
현우는 라쿤과 루케이의 전투를 유 심히 살폈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전투는 영상 으로 볼 때와는 또 달랐다.
전장의 생생한 분위기가 온몸으로 다가왔다.
“전투는 반반인 것 같습니다. 그렇 다고 해서 둘의 기량이 똑같다는 것 은 아닙니다.”
현우는 라쿤과 루케이의 전투를 평 가했다.
자신이 보고 느낀 바를 그대로 얘 기해 주었다.
- 반반인데 기량이 똑같지 않다고?
- 이게 무슨 참신한 헛소리야?
- 결과는 무승부인데 한쪽이 강하면…. 누군가가 봐준다는 소리?
- 그렇다는 소리지. 결과적으로는.
시청자들은 현우의 말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전부터 현우의 안목을 인정하고 있 었다.
그렇기에 이번 발언을 더욱 받아들 이기가 힘들었다.
“봐주는 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봐준다는 것은 옳지 않은 표현이었 다.
“잘 보시면 아시겠지만, 오크가 조금 더 셉니다. 주도권을 쥐고 있어요.”
현우가 치열하게 싸우는 이들을 가 리키며 말했다.
-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 그냥 잘 치고받고 싸우는 것처럼 보 임.
- 설명 좀요.
- 어디가 도대체 유리한 거임?
- 티비에서 전문가라고 떠드는 애들보 다는 골목대장님이 더 전문가지. 그러니 까 설명 좀요.
시청자들은 현우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반 반이었다.
유불리를 따질 수가 없는 치열한 전 투였다.
‘진짜 몰라서 묻는 건가?’
현우는 그런 시청자들의 채팅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딱 보면 보이는데…?’
“잘 보시면 오크가 주로 공격을 하 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 근데 그게 어떻게 오크가 낫다는 결 론이 나옴?
- 맞아, 맞아. 오크가 단순히 힘이 더 센 것일 수도 있음.
- 그렇지. 그럴 수도 있지.
“정말 그렇게만 생각하십니까? 신족 이 무슨 계획을 짜고 일부러 저렇게 밀린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첫날의 전투. 그리고 지금까지의 전투. 그 양상이 어떻습 니까?”
현우가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 첫날? 첫날은 오크가 눈에 띄게 이 기지 않았나?
- 첫날은…. J. 신족 하나가 자기 팔 자르고 튄 거밖에 기억이 안 남.
- 하긴 그게 좀 임팩트가 있기는 했지.
- 그 뒤로는 별것 없지 않나?
- 매일 대중 비슷하잖아. 이렇게 몇 시 간 싸우고 빠지면 그날 전투 끝나고.
시청자들이 기억을 더듬었다.
첫날 르브론이 보여줬던 충격적인 장면.
그리고 전반적으로 약간 우세했던 첫날의 전투.
“첫날에는 우세했던 오크가 그 뒤로 는 왜 비슷하게만 보일까요?”
현우가 질문을 던졌다.
- 파악 당해서?
- 근데 파악 당했으면 신족이 우세해야 맞는 거 아님?
- 파악했는데도 조금 밀리면…. 진짜 골 목대장 말대로 오크가 더 센 거 맞는데?
- 그거 때문에 물어봤겠음? 다른 게 있 을 텐데….
시청자들은 현우의 물음에 대한 답 을 찾기 위해 자신들끼리 갑론을박했 다.
하지만 이견이 쉽사리 좁혀지지 않 았다.
십인십색이라는 말에 걸맞게 서로 하는 말이 다 달랐다.
“제가 묻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첫날에는 르브론이 나타 나 신족의 왕이라는 자를 막아섰습 니다. 하지만 그다음 전투부터는 르 브론이 뒤늦게 등장하거나, 아예 나 오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는 분 없으십니까?”
- 르브론이 늦게 나온다?
- 신족의 왕은 항상 전장에 등장했고…?
- 그럼 오크가 신족의 왕 때문에 전력 을 아낀다는 얘기?
- 맞네. 그렇게 되네.
시청자들은 현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곧장 알아차렸다.
그만큼 현우의 설명은 쉽고 직관적 이었다.
“하지만…. 제가 확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 따로 있어?
- 숨겨둔 비밀?
“제가 저 둘을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 응7
- 아, 그러네. 저 오크랑 대장님이랑은 이미 좀 친하지.
- 좀이 아니라 꽤 친할걸?
시청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맞았다.
현우는 오크, 라쿤과 매우 친했다.
그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 실이었다.
‘어? 나왔다.’
말을 이어 나가려던 현우는 입을 다 물었다.
말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가 찾던 제라스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어이!!! 오랜만이야!!!”
현우는 멀리 모습을 보이는 제라스 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 이 창을 내질렀다.
왜애애애애애애애앵 !!!
현우의 창끝에서 작은 구슬 하나가 살 떨리는 굉음과 함께 허공을 질주 했다.
그것을 본 제라스는 얼굴을 찌푸리 며 손을 움직였다.
한순간에 제라스의 손에 나타난 창 이 현우가 쏘아 보낸 구슬을 찔렀다.
콰아아아아앙!!!
강한 진동과 함께 제라스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제라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죽을 뻔했다.’
조금만 더 뒤로 밀려났다면, 라쿤과 루케이의 전투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었다.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제라스에 게만큼은 말 그대로 절체절명의 순간 이었다.
“인간!!!!!”
제라스는 그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한 사내, 현우의 얼굴을 곧장 알아 보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겁도 없이 신계에서 인간들을 구출 해 간 얼굴을 잊는다면 그것은 신족 의 왕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용케 잘 알아보네?”
현우가 빙긋 웃으며 제라스를 향해 다가갔다.
“원래 이렇게 강했던가?”
제라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 다.
처음에는 분노했다.
하지만 화는 잠시였다.
얼마 전에 만났던 현우와 눈앞의 인간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었다.
“왜? 쫄려?”
현우는 거침없는 언사를 내뱉었다.
어차피 죽이려고 만난 것이었다.
굳이 곱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상스러운 말을 듣는 건 정말 오랜만이군…. 마계의 잡것들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야….”
제라스는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빠 르게 지워냈다.
전투에서 흥분은 금물이었다.
차분한 이성에 모든 것을 기대야 했 다.
“스승님께 무릎을 꿇고 팔 한쪽을 자른 뒤, 목숨을 구걸했다는 소식은 잘 들었다. 근데 이거 미안해서 어쩌 지? 난 스승님처럼 자비롭지 못해 서…. 네 목을 가져가야겠는데?”
하지만 현우의 도발은 그런 제라스 의 마음가짐을 단숨에 부숴버렸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도 발이었다.
말 몇 마디의 제라스의 평정이 깨 졌다.
“이놈!!!!!”
제라스가 일갈을 내지르며 현우에 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창을 빠르게 내질렀다 일격필살의 강한 의지를 담은 일격 이었다.
동시에 폭언을 서슴지 않은 상대에 게 보내는 복수였다.
그렇지만 현우도 만만한 상대는 아 니었다.
현우는 창에 마력을 진득하게 쏟아 붓고는 그대로 제라스의 창을 후려 쳤다.
콰아아아아앙!!!
제라스는 달려든 것보다 더 빠른 속 도로 뒤로 튕겨 나갔다.
현우는 혼천보를 사용해 날아가는 제라스를 쫓았다.
단숨에 제라스의 위쪽에 나타난 현 우는 창을 내리꽂았다.
그러자 제라스의 등 뒤에 나타난 날 개가 거친 바람을 만들어내며 날갯 짓을 해댔다.
파바밧-!
한순간에 속도가 붙었다.
제라스는 간신히 현우가 찌른 창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쿠우우우웅!!!
현우의 창이 꽂힌 땅바닥이 그대로 터져나갔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거대한 크레이 터가 생겨났다.
“날개가 있어서 그런가…. 빠르기는 하네. 모기 새끼처럼.”
현우는 멀찍이 빠져나간 제라스를 보며 쿡쿡 이며 이죽거렸다.
제라스는 그저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약간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왜? 그때는 영 아니었는데 지금은 너무 강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어?”
현우가 피식 웃었다.
제라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 나 잘 알고 있었다.
‘그사이에 내가 얻은 아이템이 몇 개고 받은 버프가 몇 개인데….’
신계에서 만났을 때와 지금은 여러 모로 상황이 달랐다.
현우에게는 정말로 큰 변화들이 있 었다.
거기다 신계에서는 현우가 지켜야 할 NPC들이 있었다.
마음 놓고 싸울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창이 너무 세다. 이 정도 면 혼천도와 같이 써도 좋겠어.’
공격력 하나만큼은 혼천도보다 나았 다.
12강을 해놓은 보람이 있었다.
“오늘이 정말 네 제삿날이다, 제라 스. 네놈의 신도…. 마찬가지고.”
말을 마친 현우의 시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현우는 제라스가 아니라 그의 뒤쪽 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라스는 현우의 시선이 어디로 향 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안다.
‘루케이 님….’
그곳은 바로 라쿤과 루케이가 격전 을 벌이는 곳이었다.
거리가 꽤 먼데도 불구하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강한 충격파가 쏟아지 는 중이었다.
‘내가 도와야 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루케이는 라쿤에게 밀리고 있었다.
라쿤은 정말 괴물이었다.
루케이와 싸울 때마다 발전했다.
그 작은 차이가 너무 뼈아팠다.
발전하지 못하는 루케이와 계속 발 전하는 라쿤.
‘눈앞의 인간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인간은 그때와 달라졌다.
그때 죽였어야 했다.
‘모험가니까 달라지는 게 없나?’
헛웃음이 나왔다.
모험가.
고작 모험가에게 발목을 잡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 였다.
눈앞의 인간이 이상한 짓을 벌이기 시작했다.
“운이 좋군…. 오늘은 살려주지.”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갑작스럽게 등을 돌리고 도망쳤다.
혼자 도망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인간을 데리고 도망쳤다.
“뭐…지?”
홀로 남겨진 제라스가 겨우 말을 내 뱉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