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4화
신족과의 전투에 참여한 플레이어 들은 오늘따라 유독 집중력이 흐려 진 것을 느꼈다.
온전히 사냥에 집중할 수가 없었 다.
멀찍이 보이는 전투에 시선이 어쩔 수 없이 갔기 때문이었다.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는 오랜만에 나타난 르브론이 루케이를 상대로 분투를 펼치고 있었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랭커들의 시 선을 빼앗기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르브론의 주변에는 이리저 리 뛰어다니는 작은 곰이 있었다.
곰의 정체는 당연하게도 탱이였다. 탱이는 현우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르브론을 찾아가 버프를 줬고 주변 에서 착실히 싸웠다.
폴리모프를 사용해 인간의 모습으 로 싸운 것은 아니었다.
현우 없이 그 모습을 유지하는 건 대단한 도박이었으니까.
탱이는 현우에게 전해 주겠다는 일 념 하나로 르브론과 루케이 사이의 전투를 나름대로 분석했다.
하지만 사실 크게 분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눈으로 보고 그것을 현우에게 그대 로 전할 생각이었으니까.
‘홈…. 확실히 아조씨보다는 약한 것 같다.’
르브론은 루케이에게 연신 밀리고 있었다.
탱이의 버프를 받아서 이 정도였다.
‘힘의 차이가 심한 것 같다.’
탱이가 보기에 르브론이 밀리는 가 장 큰 이유는 힘의 부재였다.
서로가 맞부딪칠 때는 기술이 얼마 나 좋던지 상관없이 힘이 세야 했다.
르브론은 거기서 밀렸다.
신체적인 힘에서도 밀렸고 마력의 강함에서도 밀렸다.
그러니 서로 무기를 맞댈 때마다 속절없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빈틈을 만들어야 할 텐데….’
탱이의 판단으로는 르브론이 루케 이를 이기기 위해서는 루케이가 막 지 못할 만한 기술이 필요했다.
그것은 강한 기술이 아니라 말 그 대로 막지 못할 기술이었다.
‘그게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썩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루케이의 공격은 정말 화려했다.
르브론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 보 였다.
라쿤은 그것을 우직한 도끼질 한 방 으로 뚫었지만, 르브론에게는 그럴 힘이 없었다.
“지고 있네?”
어느새 탱이의 근처에 다가온 현우 가 혀를 찼다.
자신만만하게 나섰던 르브론이 형 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힘에서 밀리는 것 같다, 주인 놈아.”
탱이는 그간의 전투 양상을 한마디 로 정리했다.
“그래? 늙은 생강이 맵기는 하단 말 이지....”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케이는 나이를 셀 수 없는 괴물 이었다.
당연히 르브론에 비해서 쌓은 마력 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라간드도 원래는 이 정도는 됐다, 이거지?’
루케이를 보자 절로 라간드가 떠올 랐다.
캘리오락스에게 허무하게 죽었던 바 로 그 라간드.
‘라간드는… 불완전했고. 캘리오락스 는 너무 강했지.’
물론 제 상태라고 해도 캘리오락스 에게 죽었을 게 뻔했다.
캘리오락스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현우 자신도 있었고 탱이도 있었다. ‘슬슬 밀릴 때가 된 것 같은데….’ 현우의 눈에는 이제 르브론이 한계 에 달한 것처럼 보였다.
조금씩 조금씩 밀리던 것이 모여 패 배라는 이름의 산을 이룬 것이었다.
“탱이야, 가서 라쿤 님 좀 불러와. 나한테 버프 한 번만 주고.”
현우가 탱이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 다.
이 전투를 뒤이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건 오로지 라쿤뿐이었다.
그 외에는 감당할 이가 없었다.
“알았다, 주인 놈아. 내가 금방 데 려오겠다.”
탱이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 땅을 네발로 박차 전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얼른 데려와라. 얼른.’
현우는 사라지는 탱이의 뒷모습을 살피다 다시 시선을 르브론과 루케 이에게로 고정했다.
“쯧…. 귀한 남의 집 자식을 저렇 게 패놓다니….”
라쿤은 눈두덩이 파랗게 멍이 든 채로 전장을 휩쓸고 있는 칸쿤을 보 며 중얼거렸다.
“저건 형님이 만든 것 아닙니까.”
라쿤의 옆에 서 있던 다칸이 어이 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칸쿤은 열 번에 달하는 대련이 끝 났을 때 어떠한 상처도 없었다.
현우는 상처가 남을 정도로 칸쿤을 때리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는 힘을 빼 그저 자 세를 무너트리고 승패를 가를 수 있 을 정도로만 공격을 가했다.
지금 칸쿤의 몸에 남은 상처는 모 두 라쿤이 만든 것이었다.
복습이라는 이름으로 무지막지한 대련을 했던 것이었다.
“어렸을 때 지금처럼 했으면 얼마 나 좋았을꼬….”
라쿤은 다칸이 뭐라고 하든 신경을 쓰지 않고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처음부터 유하게 가르쳤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나이에 맞는 교육법이 라는 게 있는 겁니다.”
다칸은 이번에도 라쿤의 말을 가볍 게 반박했다.
“너, 나한테 요새 불만 있냐? 너도 수련 한 번 할래?”
라쿤이 다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는 얼굴을 구겼다.
“됐습니다, 그 정성 저 녀석에게나 쏟으시지요. 이 나이에 더 강해져서 뭐 합니까.”
다칸이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 다.
“아니다, 내가 보기에는 저 녀석보 다는 네가 강해지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라쿤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다칸 의 멱살을 잡으려던 그 순간 탱이가 라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쿵!
라쿤의 복부에서 작은 타격음이 터 졌다.
“덩치에 안 맞게 뭐가 이렇게 무거 워?”
라쿤은 탱이의 목덜미를 잡고 그대 로 들어올렸다.
“아조씨, 아조씨. 주인 놈이 위험하 다.”
탱이는 다급한 얼굴로 라쿤을 불렀 다.
“주인 놈이 위험해? 네 주인이라 면…. 그놈인데. 그놈이 위험하다고?” 라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탱이가 말하는 주인은 현우일 터였다.
제라스마저도 어렵지 않게 상대하 는 현우에게 있어 위협이 될 만한 게 있을 리가 없었다.
‘하나 있기는 하지.’
“그 빌어먹을 노란 머리 참새가 문 제더냐?”
루케이.
유일하게 현우가 어쩔 수 없는 자.
현우뿐만이 아니라 현우의 스승이 라던 인간도 버거울 게 뻔했다.
“그놈이다, 그놈. 우리 주인 놈을 죽 이려고 한다.”
탱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호들갑을 떨었다.
“근데…. 그 인간이 그렇게 쉽지 지 지는 않을 텐데….”
버티는 데에 주력한다면 르브론은 절대 루케이에게 쉽게 밀리지 않을 터였다.
라쿤이 생각하는 르브론의 장점은 바로 섬세한 마력 운용이었다.
루케이가 힘으로 몰아붙인다고 한 들 르브론의 마력이 전부 소모되지 않는 이상에는 어떤 피해를 입히기 힘들었다.
“그것까지는 모른다. 주인 놈이 아 조씨를 불러오라고 했다.”
탱이가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몰랐다.
단지 곧 불리해질 것 같으니 라쿤을 불러오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래, 가자.”
라쿤이 탱이를 어깨 위에 올렸다.
그러고는 아주 느긋하게 걸음을 옮 겼다.
그런 라쿤을 누구도 건들지 않았다.
오히려 라쿤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기 바빴다.
그렇게 전장에 길이 생겨났다.
♦ ♦♦
탱이가 라쿤을 데리러 간 후, 홀로 남은 현우는 르브론의 전투를 지켜 보면서 한 번씩 눈을 돌렸다.
‘제라스 이 새끼 언제 나오지?’
현우가 눈을 돌리는 이유.
그건 바로 제라스를 찾기 위함이었 다.
물론 죽이기 위해 찾는 건 아니었다. 당장 제라스가 죽으면 루케이가 어 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물론 퀘스트는 클리어할 수 있겠 지….’
제라스를 잡아도 퀘스트는 깰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만약 루케이가 중간 계를 포기하고 신계로 돌아간다면….
루케이를 놓친 라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랐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요놈, 이제 나왔구나.’
그 순간 제라스가 전장에 모습을 드 러냈다.
현우는 곧장 제라스에게 몸을 날렸 다.
아주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오늘도 역시나 나왔군.”
제라스의 앞을 가로막은 현우가 미 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놈….”
제라스는 언성을 크게 높이지 못했 다.
며칠간 계속해서 현우에게 당한 탓 에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이긴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그가 모시는 신인 루케이가 전투에서 우세를 점 하고 있었다.
당장의 전황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 고 있었다.
“왜? 오늘은 좀 이기는 거 같으니 까 마음이 놓이나?”
현우는 그런 제라스의 표정을 읽어 냈다.
자주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근데 어쩌지? 지금 라쿤 님도 이 곳으로 오고 있는데….”
현우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듯이 말을 덧붙였다.
현우의 말을 들은 제라스의 표정은 눈에 띄게 좋지 않아졌다.
‘오크까지 온다고?’
당장 라쿤 한 명만 하더라도 루케 이가 감당하기 버거웠다.
거기에 르브론까지 더해지면….
결과는 뻔했다.
세 살배기 애도 맞출 수 있을 정 도로 쉬워졌다.
‘필패다.’
단순히 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루케이가 죽을지도 몰랐다.
‘루케이 님이…. 죽는다고?’
신의 죽음.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 은 일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됐다.
루케이는 불멸 그 자체여야만 했다.
“걱정은 하지 마. 오늘은 죽지 않 을 테니까.”
현우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럴수록 제라스가 느끼는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잡담은 이쯤하고…. 우리도 싸워야 지?”
현우는 일부러 보여주는 것처럼 느 릿하게 혼천도를 뽑았다.
제라스를 죽일 생각이 없으니 굳이 수호자의 창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가장 익숙한 무기를 꺼냈다.
느릿하게 도를 뽑았던 것과는 달리 현우의 공격은 매우 빠르게 전개됐 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제라스 의 눈앞에 나타난 현우는 혼천도를 강하게 내리쳤다.
쐐애애애액!!!
혼천도가 벼락처럼 제라스를 덮쳤다.
제라스는 굳은 얼굴로 창을 만들어 현우의 참격을 막아냈다.
콰아아아앙!!!
제라스의 몸이 그대로 땅을 파고들 었다.
발목까지 잠겼다.
하지만 그런 건 제라스의 이동을 막을 수 없었다.
제라스는 땅을 거칠게 부수며 허공 높이 뛰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등에서 날개가 생겨났 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인공 날개였다.
현우도 뒤이어 땅을 박찼다.
제라스를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 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현우의 도와 제라스의 창이 다시금 맞부딪쳤다.
마력을 잔뜩 퍼부은 현우의 힘을 이 겨내지 못한 제라스의 몸이 뒤로 주 르륵 밀려났다.
제라스는 허공에서 뒷걸음질을 쳤다.
어쩔 수 없었다.
땅바닥에서야 홀리는 것도 가능했 지만, 허공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밀리면 밀리는 대로 날아가야 했다.
현우는 허공을 강하게 밟아 날아가 는 제라스를 쫓았다.
쉬지 않고 몰아쳤다.
현천도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만큼 제라스는 빠르게 물러났다.
그렇게 공방이 더 이뤄지고 나자 르 브론과 루케이의 모습이 작은 점처 럼 보일 정도로 멀리 온 상태였다.
‘이쯤이면….’
현우가 갑자기 현천도를 거두고 제 자리에 멈춰 섰다.
제라스는 갑작스러운 현우의 행동에 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창으로 현우를 겨눴다.
“루케이는 한 달 후에 죽는다.”
현우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라스에 게 말을 시작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제라스가 크게 소리쳤다.
“글쎄…. 너도 알고 있을 텐데?”
현우의 이어지는 말에 제라스는 답 을 내놓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 었다.
“그래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내게 협조해라. 그렇다면 넌 살려 주지.”
“그걸 어떻게 믿지?”
제라스의 외침에 현우가 피식 웃었 다.
“지금까지 살려준 정도면…. 충분하 지 않나?”
현우가 제라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잘 생각해 봐. 끊어진 줄을 잡고 같이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본인 이 그 줄이 될 것인지.”
그 말을 끝으로 현우는 빠르게 자 리를 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