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1 화
“무슨 일이지?”
에드워드가 까칠하게 알렉산더를 맞 이했다.
웃으며 볼 사이는 아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태도였다.
“부탁할 일이 있다.”
알렉산더는 그런 에드워드를 보고 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에드워드가 왜 저러는지는 상관이 없었다.
그저 찾아온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 었다.
“부탁할 일? 그게 뭐지?”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극복할 수 없는 불운이 연달 아 닥치는 것에 한숨이 나왔다.
“영상을 하나 찍고 싶다.”
알렉산더의 말을 들은 에드워드의 두 눈이 커졌다.
허탈한 표정이 사라지고 괴상한 표 정을 지었다.
“영상? 그게 무슨 소리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영상.
그것을 왜 자신과 찍는다는 말인가.
자신은 제국에 드러나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 녀석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 녀석? 그 녀석이 누구지? 혹 시…. 강현우? 그놈을 말하는 거냐?”
알렉산더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을 하던 에드워드가 이내 누군가의 이 름을 외쳤다.
“맞다, 강현우. 내가 총애하는 공작 임과 동시에 제국의 다음 세대를 책 임질 수 있는 모험가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에게 보낼 영상을 찍겠다고? 나 와? 무슨 생각이지?”
에드워드는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 았지 눈빛은 거의 미친놈을 바라보 는 수준이었다.
“여우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적당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
“여우를 움직여? 미끼‘?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소리만 지껄이는군. 황제가 되더니 정신이 돌아버린 것인가….”
에드워드는 여전히 알렉산더의 의 도를 알지 못했다.
여우가 강현우를 뜻한다는 것까지 는 알아챘다.
하지만 미끼라는 것과 움직이기 위 함이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도와줄 테냐?”
알렉산더가 에드워드에게 다가가며 다시금 물었다.
“정확한 설명이 먼저다. 알렉산더.”
에드워드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 다.
자세한 설명을 요구했다.
“들은 그대로다. 강현우 공작을 움 직이기 위한 미끼를 만드는 거지.”
“움직이게 만들 미끼? 일부러 다친 척이라도 하겠다는 생각이냐?”
에드워드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거 기까지 였다.
알렉산더가 부상을 연기하고 그것을 토대로 현우를 움직이려 한다는 것.
‘황제의 복수를 위해 공작이 움직 인다? 그럴 생각이라면, 굳이 이럴 필요가 없을 텐데? 그냥 명령을 내 리면 되는 것 아닌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투성이였다.
얼른 알렉산더가 궁금증을 해소해 줬으면 싶었다.
“맞다, 다친 척을 하려는 것이지. 그 래야 움직일 테니.”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그 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게 모험가 아닌가? 거기다 제국의 귀족 이라면 더더욱 황제의 명을 거역할 수 없을 텐데?”
에드워드는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 운 의문들을 숨 가쁘게 토해냈다.
“내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 니니. 이렇게 거추장스러운 일도 마 다치 않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웃으며 에드워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너는 모르겠지. 황제라는 자리가 주 는 무게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렉산더는 에드워드가 들으면 불같 이 화를 낼 말을 서슴지 않았다.
“무게감? 감당하지 못할 것이었으면 오르지를 말았어야지.”
하지만 에드워드는 화를 내지 않았 다.
평정을 유지하고 오히려 알렉산더를 비꼬았다.
이전과 다르게 정신적으로도 성장한 것이었다.
“네가 나보다 나았다면, 내가 오르 지 않았겠지.”
알렉산더는 가볍게 맞받아쳤다.
구렁이 같은 귀족들을 상대한 알렉 산더였다.
이 정도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괜한 소리는 그쯤 하지. 그래서 네 목적이 뭐냐? 도대체 뭘 노리고 이 렇게 움직이는 거지.”
에드워드가 엇나갔던 대화에 초점을 다시 맞췄다.
“반역.”
알렉산더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말 짧은 단어 하나였다.
하지만 어떤 유려한 수식어가 들어 간 문장보다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반역?!!”
에드워드가 반사적으로 소리를 질 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랜 일족의 족장이라는 직위를 차지 한 지금이든 제국의 2황자라는 이름 을 갖고 있던 과거에든 반역이라는 단어에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것을 빼앗기는 것이었으니까.
“네 자식은 어떻게 하고 근본도 모 르는 모험가에게 황위를 넘기지? 드 디어 미친 게냐? 그럴 생각이라면, 차라리 나에게 넘겨라. 내가 잘 써줄 테니.”
에드워드는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화 를 참지 못하고 알렉산더에게 말을 쏘아붙였다.
“네가 한 5년만 정신을 빨리 차렸 으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이제라도 정 신을 차려서 다행이기는 하다만….”
알렉산더가 혀를 찼다.
에드워드는 너무 늦었다.
하다못해 1년 전에만 작금의 모습 을 보였다면, 또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들인 노력이 너무 많 았다.
9부 능선을 넘은 상태였다.
마무리만 남았다.
“그래서 널 살려둔 거다. 한때는 가 여워서 살려뒀고. 지금은 사람 구실 을 하니 살려뒀다. 차디찬 북방의 대 륙에서라지만, 권좌에 올랐으니까.”
알렉산더의 계속되는 말에도 에드워 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존했다고 생각했 던 것들이 사실은 살려준 것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만족해라. 그리고 날 도와.”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수호자를 모두 불러들여라. 다섯이 라고 했던가. 놈들과 싸우겠다.”
“다섯? 다섯 전부와 싸우겠다고?”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 흔들었다.
수호자 다섯이면 캘리오락스와 같 은 정말 규격 외의 괴물이 아니고서 는 절대 감당할 수 없었다.
‘조금 전에 봤던 수준이라면…. 숨 한 번에 사라질 테지만….’
라간드의 기억으로 접한 캘리오락스 와 실제로 겪은 캘리오락스 사이의 괴리가 심했다.
숨조차 제대로 쉬는 게 힘겨울 정 도였다.
‘알렉산더는 그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눈앞의 알렉산더는 그 정도 까지는 아니었다.
이것이 기세를 드러내는 것과 숨기 고 있는 것의 차이라고 보기에도 조 금 애매했다.
에드워드도 비술을 어느 정도 익혔 기에 안목이 있었다.
아무리 숨긴다고 해도 숨겨지지 않 는 것들을 알아볼 정도는 됐다.
“그 정도는 돼야 믿을 녀석이다.”
알렉산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다섯이 전부 있어야 했다.
현우는 경험도 풍부하고 눈치도 좋 았다.
어중간하게 해서는 절대 속지 않을 터였다.
“하긴 이기려고 하는 싸움이 아니 었지.”
에드워드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와 진심으로 싸우는 게 아 니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것이었다.
“그 뒤에는 어쩔 셈이지? 영상을 무 슨 수로 그놈 손에 쥐여 줄 생각이 냐.”
“네가 부리는 모험가들을 통하면 된 다.”
“내가 부리는 모험가들을?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그놈이 말하던가?”
에드워드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베놈 길드의 존재까지 알렉산더가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게 바 로 제국의 저력이다. 넌 모르겠지만.”
알렉산더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는 애꿎은 입술 만 잘근잘근 씹어댔다.
알렉산더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적당히 시간이 흐른 뒤에 내가 북 부로 움직일 것이다. 당연히 많은 사 람이 뒤를 따르겠지.”
“당연한 소리. 황제가 움직이는 데 그에 맞는 이들이 따라야지.”
“잃어버린 도시들을 하나씩 되찾는 다. 물론 그곳에 수호자들은 없다.”
“그럼 모험가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나겠지. 수호자들이 사라졌다. 아마 빙 산에 있을 것이다.”
알렉산더와 에드워드는 서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대화를 이어 나 갔다.
그 대화에는 서로가 아는 정보가 어 느 정도나 되는지 시험을 하고자 하 는 의지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사라진다. 빙산으로 홀로 향 한다는 글만 남겨둔 채. 그리고 빙 산에서는 격렬한 전쟁의 흔적이 발 견되지.”
“그 흔적은 모험가들이 찾겠지. 그 러려고 데려왔을 테니.”
“시간이 얼마 지나면, 제국 전역에 소문이 돈다. 황제가 부상을 당한 채 궁에 돌아왔다. 부상이 생각보다 심 각하다. 팔 한쪽이 정상이 아니다. 이 런 소문들이 퍼질 거다.”
“그런 소문이 동시다발적으로 퍼진 다고? 너무 의심스럽지 않나?”
에드워드가 딴지를 걸었다.
알렉산더의 계획은 너무 작위적인 냄새가 풍겼다.
“이미 여러 실험을 해봤다. 모험가 들은 오히려 그렇게 퍼진 소문을 신 뢰하지.”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
“그때쯤 되면 녀석이 나설 거다. 소 문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 정도로는 손해를 볼 게 없으니까. 제일 먼저 르브론에게 가겠지. 이 소문의 진위 를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사람일 테 니까.”
“르브론은 당연히 네가 시키는 대로 말하겠지. 소문이 맞다. 팔이 있기는 한데 사실상 기능을 잃은 상태다. 이 런 식으로 대충 둘러대는 것 아닌가?” 알렉산더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얼굴이었 다.
“르브론을 지나면 그때야 네 밑에 있는 모험가들에게 접근하겠지. 한번 알아봐라. 그때 그 모험가들이 접근 하면 넌 그냥 모른 척 영상을 보여주 면 된다.”
“그럼 그 모험가들이 그걸 고스란히 그놈에게 전해준다. 그 말이지?”
“모든 것을 확인하고 가능성을 본 녀석이 날 찾아오겠지. 그럼 그때 나 는 녀석을 황제 대리로 삼을 것이다. 문제를 잘 푼 상을 주는 셈이지.”
알렉산더의 설명을 모두 들은 에드 워드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나라면 무조건 걸렸겠지.’
너무 촘촘한 그물이었다.
이런 망에 걸린다면 절대 벗어날 수 없을 터였다.
‘근데 황좌에 문제가 있나? 무슨 이 유인지 알 수가 없으니….’
에드워드의 기억 속 황제는 무소불 위의 패황이었다.
하고 싶은 것은 했다.
거리낄 게 없었다.
‘그런 자리를 넘겨준다고? 이런 식 으로?’
황제 대리라고는 하나 알렉산더가 없는 이상 황제나 마찬가지였다.
제국을 손에 쥐고 흔드는 것은 똑 같았다.
“끝까지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셈 인가.”
에드워드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 황제의 자리가 이제는 조금 무겁다고.”
알렉산더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서 수호자들을 불러라. 내 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으니.”
알렉산더는 미소를 지우고는 에드 워드를 채근했다.
황궁을 몰래 나온 터라 몇 시간 안 에는 일을 모두 마쳐야 했다.
제국의 대마법사인 서페드가 만들어 준 아티팩트가 있어 귀환에 걸리는 시간이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최대한 일찍 돌아 가야 했다.
“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에드워드가 마력을 집중하며 수호자 한 명의 얼굴을 떠 올렸다.
마법을 장기로 가진 수호자였다.
그 수호자만이 별다른 시간 소모 없 이 수호자들을 데리고 빙산으로 돌 아올 수 있었다.
‘근데…. 황제의 자리를 임시로 내 준다…. 이게 이 녀석의 성격으로 가 능한 일인가?’
에드워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아는 알렉산더는 절대 그렇게 친절하지 않았다.
아니, 착하지 않았다.
“놈이 널 찾아오면 정말 그냥 그 자 리를 내줄 생각인가?”
“그냥?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다고 말을 안 했던가? 권좌에 앉을 자격 이 있는지 봐야지.”
알렉산더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며 보인 송곳니가 햇빛을 받아 하얗 게 빛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