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거 좋은 소식이네요. 어느 가문의 영식인가요?”
아리안느의 귓가로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부 주제에 백작가의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자신에게 어머니 노릇을 하려 하는 천박한 여자.
이리네 부인이었다.
“무려 황태자 전하시네.”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아리안느는 황당함에 눈만 끔뻑였다.
‘지금, 황태자라고 한 건가?’
미친!
비단 당황한 것은 아리안느만이 아니었는지 이리네 부인이 평소답지 않게 큰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그분은 이미 부인이 있으시잖아요?”
“그게 무슨 상관인가. 무려 황태자 전하시네. 남자가 정부를 몇 거느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뒤이은 아버지의 말에 아리안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렇다 치자.
문제는 그 정부가 이미…….
‘다섯 명이랬나?’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정부라니……. 적어도 귀족의 재혼 자리라도 될 줄 알았건만, 제겐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비란 사람은 그저 제 욕심만 채워준다면 딸쯤은 늙은 황제에게라도 바치고도 남을 인간이었으니.
아리안느는 뒤의 얘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달음박질쳐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황태자라고? 왜 하필이면…….’
***
거울 속에는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아비와 꼭 닮은 여자가 있었다.
결 좋은 은빛 머리카락에 초록 섞인 보라색의 신비한 눈동자, 투명해 보일 정도로 희디흰 피부.
“…….”
아리안느는 들고 있던 빗으로 거울을 내려쳤다.
쨍!
거울에 금이 가자 거울에 비치는 얼굴도 조각조각 갈라졌다. 그걸 보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날 정부로 팔아넘기겠다고?”
황태자라니……. 그 변태 망나니의 정부라고? 절대 사절이다.
이제 생각할 시간이다. 하루라도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야 했다. 아리안느는 깨진 거울 앞에서 턱을 고이고 생각에 잠겼다.
‘정부로 간다면 결혼 준비도 없겠지.’
그녀의 계획은 이미 어긋났다.
혼처가 정해져 결혼 준비를 하게 되면 결혼자금을 챙겨 도망가려던 계획이.
그 돈이면 저 이웃 왕국, 남부 해안가의 3층 건물 하나 정도는 사서 평생 월세 받아먹으면서 ‘소박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물 건너갔다.
보르네스 백작은 철저하게 그녀를 고립시켜왔다. 정신적, 신체적 그리고 금전적으로.
아리안느는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
값비싼 보석들은 사용 후에 모두 아버지에게 반납해야 했고, 금고 안의 돈이 한 닢이라도 비는 날이면 그녀는 호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마지막엔 3일간 가둬놓고 물도 주지 않았었지.’
물론, 금고에 손을 댄 건 사실이었다. 도주 자금을 모아보려다 아버지에게 들켜 굶어 죽을 뻔한 이후로는 자금을 빼돌리는 건 포기했지만.
‘그냥 황실에 아버지의 비리를 고발하고 도주해?’
안 될 말이지. 돈도 없이 떠나 봤자 좋은 꼴은 못 보리란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그 방법뿐인가?”
혹시 몰라 생각해둔 또 다른 계획. 최대한 제 아비에게 타격을 주면서 그를 벗어날 방법.
그가 한 짓을 그대로 따라 해보는 거지.
제가 한 짓을 자식에게 그대로 당하면 그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훤히 보였다.
그거참……. 짜릿한데?
비로소 아리안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렇다면 이제 상대를 구해야지. 누가 좋을까?’
아리안느는 검지로 화장대를 톡톡 두드리며 가만히 생각했다.
현재 하르피온 제국에는 크로우 공작을 중심으로 한 황태자파가 있었고 그와 대립하는 이황자파가 있었다. 그리고 야욕 덩어리에 부정부패의 온상인 보르네스 백작은 황태자파에 속해 있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인 이황자파 중에서 한 명 찾아보면 될 일이었다. 안 되면 중립파도 괜찮고.
“그래도 미혼이어야 하는데…….”
정부 자리는 죽어도 싫었다. 정부는 제국에서 법적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으니 절대 안 될 말이지.
그녀의 계획엔 법이 필요했다. 제 목적을 이룰 때까지 저를 지켜줄 법이란 안정적인 테두리가.
“누가 있을까?”
문득 오전에 스쳐 지나간 마차가 떠올랐다.
카이엔 공작.
불세출의 천재검사이자 이황자의 절친한 친구로, 자신은 검과 결혼했다며 한사코 모든 혼사를 거절했다고 했지.
그럼에도 여전히 공작가의 문턱이 닳도록 구혼자가 드나든다는 소문이었다.
“카이엔 공작이라…….”
아버지의 손이 미치지 못할 만큼 작위도 높고 여자에게 관심도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상대였다.
아리안느는 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할 생각이었다. 조건은 단 하나, 1년 뒤 두둑한 위자료와 함께 이혼해줄 것.
‘위자료로 공작가 소유의 광산 하나 정도 받으면 죽을 때까지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최소한의 생계부터 나를 돋보이게 해줄 사치품들은 모두 돈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돈을 벌기 위해 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자존심 때문에 굳이 고된 길을 걸을 생각도 없었다.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것은 아니니까.
아리안느는 공작에게 아버지의 비밀 장부 일부를 보여주면 계약은 성립되리라 여겼다.
원래는 결혼자금을 챙긴 후, 그 장부를 황실 수사대에 찔러주고 도주할 계획이었으나…….
‘상황이 변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아버지의 부정은 대부분 황태자파와 연이 닿아 있었고 그들의 비리는 대부분 황실에서 금기시하는 범법행위였으니 그들을 압박, 회유하는 데 쓰일 수 있을 터.
황태자파에 비해 세력이 약한 이황자파를 상대로 이보다 좋은 패가 있을까?
“설마, 거절하진 않겠지? 이황자를 위해서. 그리고 본인을 위해서라도.”
귀찮은 구혼자들을 쫓아버릴 기회이기도 할 테니까.
그때.
“아리안느. 안에 있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르안느의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오셨군.’
그가 무슨 일로 제 방에 왔을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리안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예. 아버지.”
달칵. 문이 열리고 냉랭한 표정의 보르네스 백작이 성큼성큼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다가 깨진 화장대 거울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거두고는 아리안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틀 뒤에 있을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거라. 황태자 전하를 뵐 것이니 행동거지 조심하고.”
결국, 보르네스 백작은 얼음송곳처럼 뾰족하고 차디찬 말로 그녀의 가슴을 후벼팠다.
아리안느는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늘 그렇듯 조곤조곤하고 나긋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예. 아버지.”
이제 아리안느는 이틀 뒤에 있을 황실 무도회에 참석할 준비를 해야 했다. 그동안은 아버지의 지시로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예외였다.
보로네스 백작이 황태자에게 아리안느를 선보이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이엔 공작은 오로지 황실 무도회에만 참석한다고 했다. 그게 아리안느의 유일한 기회였다.
이 기회를 놓치면 결말은……. 절대 그 변태 망나니 황태자의 정부로 들어갈 일은 없어야 했다.
아리안느가 설렁줄을 당겨 하녀 마드렌느를 불렀다.
“마드렌느. 남자 유혹하는 법 좀 알려줘.”
“예에?”
하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
아리안느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기가 차서 웃음이 나왔다.
“하. 꼬락서니하고는.”
거울에 비친 그녀는 아름답고 화려하며 유혹적이었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쇄골을 비롯한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파인 붉은 드레스가 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에 밀착된 드레스는 몸의 굴곡을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천사라는 이미지로 관리할 때는 언제고. 이제 내 사용처가 정해졌다 이건가.’
아마도 황태자의 취향대로 준비한 것일 터였다.
아리안느는 지난밤, 보르네스 백작이 난데없이 건넨 드레스를 받아들고는 아연실색했다.
“아버지. 이 드레스는…….”
“내일, 그 드레스를 입도록 해라.”
드레스를 받아든 아리안느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분하지만 아직 그녀에게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정말이지 황태자의 취향은 천박하기 그지없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였지만 어떤 사람일지 뻔했다. 아리안느는 그가 끈적한 시선으로 제 몸을 훑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불쾌해졌다.
결단코 황태자가 나타나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고 퇴장하리라.
“아가씨, 1층에서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
아리안느는 1층으로 가는 중앙계단을 아슬아슬하게 걸어 내려갔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긴 아리안느는 평소 낮은 굽의 신을 즐겨 신었기에 하이힐이 익숙지 않았다.
‘망할. 하이힐은 대체 누가 만들어낸 거야?’
그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철퇴형을 내리고 말리라.
그런 그녀의 속마음도 모르고,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용인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이것들이 어딜 감히 날 훑어보고 평가를 해?’
그러나 이내 아리안느의 매서운 눈빛을 받고는 황급히 시선을 내리고 입을 다물었다.
계단 아래, 로비의 한가운데에 선 보르네스 백작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름답군. 오늘은 내가 널 키워준 은혜를 갚는 날이다. 똑바로 처신하도록 해라.”
딸을 팔아넘기러 가는 아비로서 아주 적절한 발언이었다.
아리안느는 고개를 살짝 숙여 대답을 대신했다. 언제나처럼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듯이.
아리안느는 뒤로 돌아 현관을 나서는 백작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런… 아버지. 난 당신에게 은혜 따위 받은 적이 없거든? 그리고 나는 원수는 꼭 배로 갚아야 하고 은혜는 베푸는 놈이 바보라고 배웠어. 물론 당신한테.’
아리안느는 오늘 제 아비의 뒤통수를 크게 칠 예정이었다.
그러니, 고작 이 정도의 수치는 기꺼이 넘어가 드리지.
***
다시금 말하지만 보르네스 백작의 마차는 정말이지 화려했다.
고작 백작가의 마차가 무슨 황실의 마차보다도 휘황찬란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천박해 보였지만 보르네스 백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정부패의 선두주자 보르네스 백작은 당연하게도 돈이 많았고, 그 돈을 눈에 보이는 곳에 쓰는 것을 즐겼다.
고리대금업에 매춘, 도박장까지 운영하는 그가 벌어들이는 금액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런 자의 딸이 가난한 이들을 돕는 천사로 알려지다니.
‘아버지의 수완이 좋은 건지, 사람들이 우매한 건지 아이러니라니까?’
아니면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에 착하디착한 딸이 아버지의 흠을 덮기 위해 노력한다는 식으로 자신들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정사실화 시켰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그 소문은 아리안느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제부터의 계획에 도움이 되리라.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황실 무도회가 열리는 황궁 별관의 입구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보르네스 백작이 먼저 내리고, 아리안느에게 손을 내밀며 에스코트했다.
허벅지까지 딱 붙는 드레스와 하이힐 때문에 하마터면 꼴사납게 넘어질 뻔했지만, 그는 전혀 그녀를 부축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따위 옷을 입혀놓고 마차에서 어떻게 내리라는 거야! 제대로 잡아주지 않을 거면 당기지나 말라고!’
이를 악물고 가까스로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백작의 손을 잡고 무도회장으로 향했다.
“보르네스 백작 각하와 레이디 아리안느께서 드십니다.”
아리안느가 가슴을 펴고 어깨를 내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마치, 전장에 나서는 군인처럼. 무도회는 전쟁터라고 들었으니까.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