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순간 카이엔 공작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래 봤자 움직인 건 눈썹뿐이었지만.
아리안느는 저 목석같은 남자의 얼굴에 저런 표정을 선사한 자신이 대견해졌다. 어쩌면 이 남자의 인생 통틀어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일지도?
실제로도 그랬다. 카이엔 공작은 살면서 이토록 당황한 적이 없었다.
“레이디 아리안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
아리안느는 그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머릿속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아 통쾌함을 느꼈다.
“오. 카이엔 공작님. 걱정하지 마세요. 결혼과 마찬가지로 사고 또한, 진짜가 아니니까요. 다만, 그 정도 사건이 아니라면 제 아버지께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됩니다.”
그는 단호했다.
‘이 남자 보게.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이쯤 되면 아리안느도 더는 곱게 말할 수가 없었다.
“어머, 그러세요? 생각보다 이황자 전하와의 우정이 깊진 않으신가 보네요. 진짜 사고를 치자는 것도 아니고, 진짜 결혼생활을 하자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 억지가 어디 있습니까?”
카이엔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여기요. 정 싫으시다면. 네, 알겠습니다. 없던 일로 하죠.”
아리안느는 그의 손에 들린 장부를 잡아 당겼다.
그런데 장부가 끌려오질 않았다.
‘그럼 그렇지.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는 없을걸?’
현재 하르피온 제국 내에선 황태자파의 힘이 더 우세했다. 이대로 가면 황태자가 차기 황제가 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리되면 이황자와 카이엔 공작은…….
“왜 그러시죠? 거래가 없던 일이 되었으니 장부도 없는 거죠.”
아리안느가 살포시 웃으며 어깃장을 놓았다.
이에 카이엔 공작이 심란한 듯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그는 골치가 아픈 듯 눈을 감고, 잘빠진 기다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아리안느는 잠시 기다려 주기로 했다. 이 상황이 그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제안이긴 할 터이니.
그런데 십 분이 지나도록 그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성격 급한 아리안느는 이 침묵이 끔찍이도 싫었다. 좋든 싫든 이제 그만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하려고 입을 열고 나서야.
“좋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당신의 평판에 좋지 않을 겁니다. 레이디 아리안느.”
‘넘어왔다!’
결국, 이리될 것을 왜 이토록 뜸을 들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그의 말에서 그 자신의 평판은 걱정조차 않는다는 것에 조소했다.
본디 이 나라는 남자의 행실에는 관대했다. 아랫도리를 어찌 놀리든 지탄받는 것은 상대 여자뿐.
“그 점은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제 아버지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예요. 이미 전적이 있으시거든요.”
“전적? 죄송하지만 이해를 못 했습니다만.”
아리안느는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제 부모의 치부를 들춰내기로 했다.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실 거예요. 제 부모님의 세기의 로맨스 이야기를요. 젊고 보잘것없던 남작가의 차남과 고귀한 공녀의 사랑 이야기를요.”
카이엔 공작은 아리안느의 말을 듣자마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구미가 당기는 제안입니다. 그 장부는 제 친우인 이황자 전하께 확실한 도움이 될 물건이기도 합니다.”
“그럼, 계약 성립인가요?”
카이엔 공작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아리안느를 똑바로 응시했다.
“예. 레이디 아리안느. 계약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다행이다. 당연히 그가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 예상했지만, 사람 일이란 어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럼, 계약서를 쓰도록 할까요?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요.”
아리안느는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가지고 와 그에게 내밀었다.
카이엔 공작은 그녀가 당장에 계약서를 내밀 줄은 몰랐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이디 아리안느. 준비성이 좋으시군요.”
“제가 지금 좀 급해서요. 언제 팔려갈지 모르는 신세니까요.”
카이엔 공작은 아리안느를 한번 쳐다보더니 말없이 계약서를 훑어보았다.
「계약서
아리안느 보르네스(이하 ‘갑’이라 칭한다)와 샤르트 카이엔(이하 ‘을’이라 칭한다)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하고 이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약정한다.
1. ‘갑’과 ‘을’은 결혼한다.
2. 이 계약의 유효기간은 결혼식 날로부터 1년까지로 한다.
3. ‘갑’과 ‘을’은 혼인기간 동안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다.
4. ‘갑’과 ‘을’은 혼인기간 동안 대외적으로 사이좋은 부부 이미지를 유지한다.
5. ‘을’은 ‘갑’에게 공작부인에 걸맞은 생활비 및 품위 유지비를 지급한다.
6. ‘을’은 ‘갑’과 이혼 시, ‘갑’에게 100만 골드 또는 그에 상응하는 위자료를 지급한다.
7. ‘갑’은 ‘을’에게 결혼식 날 약속한 것의 반을, 이혼하는 날 나머지 반을 지급한다.
8. 계약인들은 위의 사항을 성실히 이행하며 이를 어길 시 이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
9. ‘갑’이 어길 시 ‘갑’은 한 푼의 위자료 없이 이혼한다.
10. ‘을’이 어길 시 ‘을’ 소유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갑’에게 지급한다.
아리안느 보르네스 서명______ 샤르트 카이엔 서명______ 」
카이엔 공작은 고개를 들어 황당하다는 얼굴로 아리안느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철두철미한 분이시군요. 그런데 왜 1년입니까?”
“그야. 현행법상 결혼생활을 1년은 유지해야 쥐꼬리만큼이지만 위자료청구권이 생기니까요.”
‘그리고 당신네 가문이라면 그 쥐꼬리도 어마어마하겠지?’
그는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어이가 없는지 피식 웃었다.
아리안느는 살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럼, 여기에 서명하면 되겠습니까?”
카이엔 공작은 그렇게 말하며 멋지게 휘갈겨 서명을 마치고 아리안느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아리안느 역시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계약서는 총 3장이었다. 아리안느와 카이엔 공작이 한 장씩 나눠 가지고 나머지 한 장은 변호사에게 줄 예정이었다.
아리안느는 둘의 서명이 들어간 계약서를 보고 있자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을 도구로만 생각하는 악마 같은 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한 보험으로 아버지의 비밀 장부를 베끼기로 마음먹고, 쥐새끼처럼 그의 서재를 들락거린 게 3년.
가까스로 수도 귀족들이 연루된 비밀 장부를 모두 베낄 수 있었다. 아버지에게 걸릴 뻔한 적도 있었고, 오가는 하인들의 눈치도 봐야 하고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이런저런 과거의 암울했던 일들이 떠올라 계약서를 든 채로 감격에 젖어 있는데, 그녀의 감상을 깨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디 아리안느. 그럼 이제부터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리안느는 기분이 상했다.
제 감상을 깬 것도 모자라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알려달라니. 밥도 먹여줬는데 후식까지 떠먹여 달라는 거야? 다섯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그건 이제 공작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아리안느는 ‘도대체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여기까지 해줬으면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야지? 그 정도도 알아서 못하니?’란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대꾸했다.
계약서도 쓴 마당에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눈치를 볼 일 따위는 없었으니까.
카이엔 공작은 아리안느의 당돌한 말에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레이디 아리안느. 아니, 이제부터는 ‘아리안느’라 부르겠습니다. 연인 사이에 딱딱한 격식은 생략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예. 저도 앞으로는 ‘샤르트’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리안느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카이엔 공작은 무엇이 그리 재미있는지 여전히 입꼬리를 올린 채 아리안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보세요. 사람 얼굴 뚫어지겠어요.’
“그럼. 아리안느.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 안녕히 가세요.”
결국, 카이엔 공작은 정중하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그러고는 새침한 아리안느의 태도에 피식 웃더니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가 떠난 직후, 아리안느는 긴장이 풀려 소파에 늘어졌다.
“후. 드디어 끝났다. 이제 한숨 자야……, 응? 뭐야? 저 남자 지금 저 문으로 나간 거야? 지금, 이 시각에? 설마……. 이 미친 남자가!!!”
아리안느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났다.
분명, 카이엔 공작은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
샤르트는 아리안느의 방을 나선 직후, 곧바로 보르네스 백작을 찾았다.
누구도 손님을 맞은 적 없거늘,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하인들이 한바탕 난리가 났다.
그리고 보르네스 백작은 전날의 여흥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전혀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이것 참. 당황스럽군요. 저의 집엔 어쩐 일이십니까?”
샤르트는 보르네스 백작의 떨떠름한 얼굴을 보고도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가만히 보르네스 백작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아리안느 보르네스 양과의 혼인을 허락해 주시지요.”
보르네스 백작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지금 뭐라고?”
보르네스 백작은 카이엔 공작이 간밤에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 건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사람이 초대도 없이 쳐들어와 이런 만용을 부릴 리가 없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돌아가 주시지요.”
보르네스 백작은 샤르트의 말을 들어 줄 생각도 이유도 없었기에 즉시 축객령을 내렸다.
머지않아 아리안느를 황태자의 정부로 들이기로 이야기가 끝난 참이었다.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내놓는다면 모를까 하나뿐인 딸을 거저 넘길 이유가 없었다.
이런 보르네스 백작의 반응은 예상했던 바였다.
“그녀와 간밤에 함께 있었습니다.”
샤르트가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새벽이지만.
마치 ‘오늘 아침엔 치킨 수프를 먹었다’고 말하듯 너무도 무미건조한 말투에 보르네스 백작은 그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지나간 후에야 보르네스 백작은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제 딸과 간밤에 함께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런 파렴치한!”
보르네스 백작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카이엔 공작은 수치스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보르네스 백작의 매서운 시선을 받아내고 있을 뿐이었다.
“허어.”
보르네스 백작은 한탄했다.
이제 글렀다. 부정을 저지른 딸을 황태자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당장, 카이엔 공작에게 결투를 신청해 이 일을 무마시킬 수도 없었다. 상대는 제국 제일의 검사. 검뿐만 아니라 사격과 모든 격투에 능한 자였으니까.
‘이 못돼먹은 딸년이 감히 일을 그르치는구나. 그동안 내가 저를 어찌 키웠는데!’
보르네스 백작의 오갈 데 없는 분노가 아리안느를 향했다.
그는 그저 먹이고 입히면 다인 줄 아는 남자였다. 화려한 마차와 맛있는 음식, 보석으로 치장해 주면 그게 곧 여자의 행복이라고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하지? 크로우 공작에게 대체 뭐라고 해야 한단 말인가?’
몇 달간 공들여 간신히 받아낸 자리였다.
이제사 못 보낸다고 하면 그 깐깐한 크로우 공작에게 단순히 찍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터였다.
황태자파에서 입지를 굳힐 기회였는데…….
보르네스 백작은 딸의 부정에 정신이 팔려 샤르트의 청혼은 잊은 지 오래였다.
그저 어떻게 하면 이 일을 무마시킬 수 있을까? 저 카이엔 공작에게 뇌물을 바쳐서라도 입을 막아야 하는가 고민할 뿐이었다.
샤르트는 한참을 이마를 짚고 끙끙거리는 그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 나는군.’
했던 말을 또 하는 건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보르네스 백작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듯 보이자, 샤르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아리안느 보르네스 양과 결혼하겠습니다.”
보르네스 백작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