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다음 날 아침, 나비에르는 눈뜨자마자 숙부를 찾았다.
그래도 첫날이니 좋은 인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어제 대화를 나눴던 숙부의 서재 앞에 서서 노크하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짝.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비에르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형이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거나 그도 아니면 심심할 때마다 손찌검을 해댔기에 저 소리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익숙하고도 불쾌한 감각이 떠올라 잠시 손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 있는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네년이 또 금고 돈에 손을 댔더구나.”
“……”
“시키는 일만 할 것이지. 이번이 두 번째다. 다음은 없다는 걸 기억해 둬.”
나비에르는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상황을 떠올렸다.
‘혹시, 손버릇 나쁜 하녀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백작이라더니 그도 아닌가 보군.’
주인의 물건에 손을 댄 사용인을 두 번이나 용서하다니. 소문이 과장되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서재 문이 열리고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제 코 정도 될까. 밝은 은색 머리카락이 탐스럽게……, 은발? 그렇다는 건…….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움직이고, 그 아래 숨어 있던 보라색 눈동자가 저를 올려다보았다.
???
하녀가 아니었다. 숙부의 하나뿐인 딸인 아리안느 보르네스가 틀림없었다. 그녀의 한쪽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비켜.”
아버지를 빼닮은 싸늘한 눈초리에 나비에르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켜 주었다.
그녀는 그대로 시선을 거두고는 그를 지나쳤다.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망할.”
나비에르는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숙부의 돈에 손을 댄 건가?’
오해라거나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훔치려 했다고? 뭐하러? 이런 황궁처럼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부잣집 딸이 왜 아버지 돈에 손을 대느냔 말이지. 말만 하면 뭐든 다 가질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나비에르는 그녀가 부모도 감당 못 할 사치를 부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래 금고에 손을 댄 모양이라고.
두 번째 만남에서의 그녀는 아주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지난번 그 소녀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우아하고 고귀한 귀족 여인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이쪽은 너의 사촌이다. 앞으로 같이 살게 됐으니 그리 알거라.”
“예. 아버지.”
그녀는 숙부의 말에 단 한 톨의 이견도 없다는 듯 고분고분 대답했다.
그래서 나비에르는 그녀가 저를 받아들인 줄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언뜻 저를 향한 그녀의 시선에서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적대감을 느끼고는 그게 착각이란 걸 직감했다.
그리고 그 후로 그녀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
“오빠 대접 받을 생각 말아. 내 눈에 띄지 말고 쥐죽은 듯이 살아.”
“아직도 회계학을 못 뗐다고? 멍청하네.”
“멍청이. 똥개. 게으름뱅이.”
저를 볼 때마다 온갖 독설과 함께 멍청이라 놀려댔지만, 그다지 기분 나쁘지가 않았다. 그동안 형에게 당해온 것에 비하면 새 발에 피보다도 못한 구박과 도발이어서였을까?
오히려 자기 나름의 공격을 하곤 뿌듯해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한 적도 많았다.
‘대체 이 여동생은…… 뭔가 참, 미묘하게 사랑스럽군.’
성격도 못됐고 웃음기라고는 없고 이 작은 성의 악마처럼 온갖 패악을 부리고 있지만 밉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고 느껴질 뿐.
어차피 온종일 하는 일 없이 방안에 처박혀서 천장만 바라보는 게 익숙한 삶이었고, 이따금 숙부가 붙여준 가정교사에게 이런저런 교육을 받을 때 말고는 그녀와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방을 나서게 되면 기다렸다는 듯 그녀가 나타났다.
“이 게으름뱅이 멍청이가 아직도 있네?”
“그야. 이젠 여기가 내 집이니까.”
“어째서 여기가 네 집이야! 내 집이지! 이 멍청이가 진짜 똥인지 초콜릿인지 분간도 못 하고 떠드네?”
“똥인지 초콜릿인지는 냄새만 맡아도 아는데?”
“시끄러워!”
나비에르는 일부러 그녀를 더 자극했다.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순진하고 즉흥적인 반응을 보이는데 어찌 괴롭히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그녀도 제가 저를 놀리는 걸 아는지 그 반짝이고 총명한 보라색 눈동자를 부라리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진 여긴 내 집이야!”
그러고는 휙 뒤로 돌아 씩씩거리며 사라졌다.
그 순간, 나비에르는 깨달았다. 제가 그녀의 자리를 빼앗으러 온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걸.
그녀는 여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모든 재산과 작위를 포기해야 함을. 바로 자신이 차남이라는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살아왔듯이.
나비에르는 아리안느에게서 저를 보았다. 그녀와 자신은 분명 닮아 있었다.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의 의도가 어쨌든 현실은 냉정했다.
“이런……. 동생이 화가 날 만했네.”
동병상련이어서였을까. 아리안느의 속마음을 헤아린 나비에르는 결심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변함없이 믿어 주고 지켜주는 진짜 가족이 되어 주기로.
하지만 가족이 되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나비에르는 제 앞에 놓인 커다랗고 새하얀 케이크를 내려다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아닐 거야. 그렇지?’
“얼른 먹지 않고 뭐해?”
‘아이고야. 이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라지만, 먹을 걸 안 줘서 못 먹은 적은 있어도 배가 터지도록 먹이는 괴롭힘은 난생처음이었다.
시선을 들어 아리안느의 기대 가득한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마주한 나비에르는 굳게 마음먹었다.
‘먹자. 까짓 거 먹어 보자.’
그리고 그날, 나비에르는 그걸 다 먹어치웠다.
속이 더부룩하긴 했지만, 탈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후아. 이 녀석. 기가 막힌 고문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나비에르는 2단 케이크 앞에서 애써 당황을 숨겨야 했다.
아리안느는 이것도 먹을 수 있겠느냐며 기세등등했고 괜스레 욱한 나비에르는 그 케이크를 몽땅 먹어치웠다.
그날 밤에는 배앓이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아무리 맛나고 귀한 케이크라 하더라도 정도껏이지. 다신 케이크가 꼴도 보기 싫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와의 대결에서 이겼음에 의의를 뒀다.
그리고 또 그다음 날. 3단 케이크 앞에서 그는 무너졌다.
전날의 배앓이가 미처 가시기도 전에 3단 케이크라는 대재앙을 맞이한 그는 지지 않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꾸역꾸역 밀어 넣다가 제대로 탈이 나고 말았다.
“헉. 헉. 아…….”
너무 아파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제게 말을 건 것 같았지만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저 배를 쥐고 웅크려 통증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다.
누군가 저를 만지고 약을 먹이려 했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고 버티다가 기절한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얼마가 지났는지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통증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나비에르는 이를 갈았다.
“고약한 녀석. 어디 한번 두고 보자.”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해 봐. 숙부에게 일러바쳐서라도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방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정말, 죽는 건 아니겠지?”
“환자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서 뭐라 확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가씨.”
“뭐? 그동안 비싼 진료비는 다 받아놓고 이렇게 나올 거야?”
“체해서 죽은 사람은 없으니 조금만 기다려 보시면…….”
“돌팔이가 따로 없네. 마드렌느! 당장 이 사람 쫓아내! 그리고 다른 수도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를 또 불러와!”
까랑까랑한 외침에 나비에르의 속이 또 진탕되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아. 아픈 사람 옆에서 무슨 짓이냐.’
그래도 저를 걱정해 주는 모양새에 그녀에 대한 미움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래. 가족이니까. 미우나 고우나 가족은 결국 서로를 걱정하고 신경쓰는 거지. 그녀가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도 저는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이미 결심하지 않았나.
고작 배앓이로 가족을 저버릴 뻔하다니 참 못난 오빠라며 나비에르는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리고 이틀 뒤, 그는 미소지으며 아리안느 앞에 나타났다.
아리안느의 질린다는 얼굴을 보면서도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행동과 말은 못돼먹고 저밖에 모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늘 주변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지 못한 녀석.’
아리안느가 나비에르의 이런 마음을 알았다면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이때는 그저 ‘뭐 저런 멍청이가 다 있어?’ 하고 말았다.
아무튼, 아리안느조차도 이 나비에르만큼은 포기였다.
도저히 가망이 없는 바보 멍청이를 상대해봤자 저만 피곤하니까.
나비에르는 그녀와의 관계를 위해 집을 나가기로 했다. 숙부에게 말해 따로 거처를 구해 지내면서 이따금 그녀가 잘 지내는지 확인차 저택을 들르게 되었다.
갈 때마다 폭언과 비아냥이 판쳤지만, 그조차도 유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녀가 짜증 나고 질린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제 말에 꼬박꼬박 대답해 준다는 걸 잘 알고 있기에.
그리고 오랜만에 찾아가는 날이면.
“이 멍청이가 하도 안 오길래 죽은 줄 알았더니 살아 있었네.”
라며 제 부재를 기억해 준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비에르에게 있어 아리안느는 고약한 성미를 가진 놀려먹기 좋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문을 듣게 되었다.
“아리안느가……, 약혼했다고?”
말도 안 돼.
게다가 그 상대가 제국의 검이자 철혈의 남자로 유명한 카이엔 공작이라니? 이해심 깊고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콩깍지가 제대로 씐 남자와 결혼해도 불안한 판에 그 카이엔 공작이라니?
나비에르는 허탈함과 두려움에 몸서리쳤다. 왜 다들 여동생에게 연인이 생기면 그토록 입에 거품을 무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밖에서 무슨 가식을 떨고 다닐 지 몰라도 집에서는 총부터 집어 드는 녀석인데.
“그 녀석! 파혼당할지도 몰라!”
그 고약한 녀석이 파혼이라도 당한다면!
“내가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잖아!”
음? 그건 그것대로 나쁘진 않을지도?
일단, 전혀 연결고리도 없던 둘이 어떻게 연인이 된 건지, 대체 결혼 전부터 공작가로 들어가게 된 연유가 무엇인지를 알아야만 했다.
나비에르는 숙부를 찾았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어쩌고 하는 걸로 보아 아리안느를 그 공작에게 팔아먹은 건 아닌가 싶었다.
숙부가 그녀를 어찌 대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기에 충분히 타당하다는 결론이었다.
돈에 팔려간 여자가 행복할 수 있을까? 온전히 사랑받을 수나 있을까?
나비에르는 휘몰아치는 불안과 걱정에 며칠을 끙끙 앓다가 공작저로 향했다. 힘없고 별 볼 일 없는 사내일지라도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면 응당 도움을 줘야 마땅할 테니.
그리고 공작저의 문이 열림과 동시에 나비에르는 생각했다.
‘이 녀석. 성공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