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22)

59.

‘10년 만인가.’

팔려가듯 제국을 떠난 게 벌써 10년 전.

예상보다 늦긴 했지만, 다행히 동생의 결혼식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비올라 카이엔 래비에쉬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도를 걸었다. 굳이 마차에서 내려 걷는 이유는 하나. 그리웠다.

‘별로 변한 게 없구나.’

10년 전처럼 오늘의 수도도 여전히 활기차고 번잡했다.

“어머! 저기 좀 봐. 누구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

“저기! 저 버건디 색 드레스 입은 여자!”

비올라는 저를 보고 수군대는 여인들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한때 이 제국 제일의 꽃이었으니. 하나.

‘꽃은 꺾이면 그뿐.’

꽃에 비유되던 삶이 한때는 행복했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칭송해 마지않던 그녀는 너무도 쉽게 꺾여 버렸다. 그리고 10년의 세월 동안 잊혔겠지.

그저 보기 좋을 뿐, 활짝 핀 꽃은 후에 새롭게 피어날 꽃봉오리를 위해 시들어 사라져야 하는 운명. 찰나와도 같은 순간을 위해 평생을 가꾸고 인내하고 살아왔었다.

그 결과가 어땠더라.

비올라라는 꽃을 가지고 싶어 한 한 남자에게 여지없이 꺾여 나갔다.

가지 말라고 치마를 붙잡고 우는 동생을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 동생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 모른다는 핑계로 그에게 등을 보였다.

사실은 두려웠다. 이 제국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 동생을 볼모로 끊임없이 저를 이용하고 억압하는 숙부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돌아서 나오는 그녀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제국의 꽃에서 왕국의 꽃으로 넘겨졌다.

그녀는 시들어갔고, 이내 스러져갔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피가 난무하는 전쟁터로 동생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그 간악한 숙부에게 등 떠밀려 온 어린 동생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모든 걸 내려놓기엔 그녀는 동생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저를 버리고 간 누이에게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인사하는 동생을 보자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어떻게든 동생을 지켜낼 것이다. 그 숙부보다 더한 악마가 되더라도.

그녀는 10년의 세월 동안 꺾여도 시들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아가씨! 그만 좀 드세요! 모레가 결혼식인 거 잊으셨어요?”

마침 옆을 지나가던 귀족 여인과 그 하녀로 보이는 이에게 절로 시선이 꽂혔다.

“결혼은 내가 하는데 왜 네가 호들갑이야?”

신경질적인 말투. 전형적인 하르피온 제국의 귀족이었다.

“드레스 가봉도 끝났는데 자꾸 드시면 옷이 안 잠긴다니까요!”

“그렇다고 굶으란 말이야?”

“이틀 굶는다고 어찌 되는 거 아니잖아요.”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깟 결혼이 뭐라고 밥을 굶어? 미쳤어?”

‘재미있는 말이로군.’

비올라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여인을 돌아보았다.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은발 머리, 훤칠한 키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 다시 보아도 전형적인 하르피온 제국의 귀족이었다.

‘이런 게 그리웠다면, 좀 이상하려나.’

그런데 조금 이상하군. 그깟 결혼이라…….

그새 하르피온 제국의 결혼 풍토가 바뀐 건가? 하긴, 10년이면 바뀔 만도 하지.

10년 전만 해도, 여인에게 있어 결혼은 최고의 관심사이자 유일한 기회였다.

아름답거나 권력이 있는 가문의 여인은 누가 봐도 좋은 혼처로 들어갔다. 그저 그런 가문에 시집가면 평생 권력가 부인의 뒤치다꺼리 신세로 살아야 했다. 어제는 친구였지만, 오늘은 친구의 비위를 맞추는 아랫사람이 되어야 했다.

여인에게 있어 친구란 남편의 지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뀌는 존재였으니.

되도록 좋은 가문, 적어도 친구보다는 더 좋은 가문에 시집가는 게 목표나 다름없었다.

결혼은 여인의 인생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깟 결혼이라고.’

그 말이 새삼스레 그 여인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어차피 하실 거면 좀 예쁜 모습을 보여주시면 좋잖아요.”

“내가 예쁘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뭐 드레스 안 잠긴다고 파혼한대?”

“아 정말 자꾸 이러실 거예요!”

“응. 이럴 거야.”

“아가씨!”

대로변에서 남사스럽게 큰소리치는 저 여인이나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저 하녀나 참 평범하진 않았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 건가.

비올라는 다시금 발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찻집에 들렀다 가려면 서둘러야 하니.

***

“그럼 이제 정말 다 끝난 거 맞지?”

“그랬으면 좋겠어요. 결혼식 준비가 이렇게 힘들 줄이야! 두 번은 못 하겠어요!”

마드렌느의 투정에 아리안느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넌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잘 생각했어. 누굴 고생시키려고 결혼이야.”

“예? 그게 왜 또 그렇게 되는 건데요?”

그리고 아가씨도 하는데 왜 제가 못 해요? 할 말은 많지만 해서는 안 되기에 속으로만 꿍얼대는 마드렌느였다.

이들이 저택 홀로 들어서자 세바스찬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오셨군요.”

“그래. 자네도 바쁠 텐데 미안하게 됐어. 이틀만 더 버텨보자고.”

누구보다 결혼식을 기대하고 꿈에 부풀어 있어야 할 신부라기보다는 전투에 임하는 장교의 모습에 가까웠다.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은 안주인이었다. 세바스찬이 아리안느의 외투를 받아들며 소식을 전했다.

“남작님. 브리타나의 왕비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드디어 말로만 듣던 그 시누이와의 첫 만남인가.

보르네스 백작저에서 지낼 당시, 하녀들이 모여 하는 수다 중 대부분이 욕이었고 그중 대부분은 남편과 그 집안사람들에 대한 욕이었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그 말이 정말이더라니까?”

“맞아! 내가 그걸 얼마나 벼르고 벼르다 산 건지 알면서 그걸 홀랑 가져가? 뭐? ‘어머~ 올케. 이거 내가 갖고 싶어 했던 거 어떻게 알고 사 왔어? 고마워~.’ 미쳤어? 내가 그 귀한걸 저 준다고 사게?”

“시누이 앞에서 신상명품 자랑한 네가 잘못인 거야.”

“시끄러워! 아주 하는 말마다 얄밉고 쥐어뜯어 버리고 싶다니까!”

“어쩜, 시누이는 왜 다 그런지 몰라.”

그 하는 짓마다 원수 같고 밉살스럽다던 시누이를 드디어 만나게 되는 건가? 아리안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세바스찬은 정중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아리안느를 응접실로 유인했다. 그 살 떨리게 무섭다는 시월드의 세계로.

그리고 들어선 시월드의 세계……가 아닌 응접실에는.

“응? 어머니가 둘이네? 피곤해서 헛것을 보나?”

큽. 아리안느의 말에 세바스찬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콧수염을 씰룩였다. 그녀의 반응이 충분히 이해되면서도 너무도 거침없는 솔직한 반응인지라 참기 힘들었다.

“흠흠. 왼쪽에 계신 분이 브리타나의 왕비님이자 공작님의 누이 되시는 비올라 님이십니다.”

노련한 집사답게 가까스로 웃음을 지워낸 세바스찬이 아리안느의 귓가에 속삭였다.

“깜짝이야.”

실은 세바스찬 역시 깜짝 놀랐었다.

비올라 카이엔. 비운의 여인.

고귀한 핏줄을 타고났지만, 열한 살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못된 숙부의 아래에서 눈치받고 살다가 열일곱 살, 성인이 되기도 전에 강제로 브리타나 왕국으로 팔려가듯 떠났던 가여운 아가씨.

그런 그녀가 무려 1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10년 만에 본 아가씨는 예전의 그 아가씨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닮긴 했지만 온순한 성격에 부드러운 미소와 어딘가 처연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아가씨는 이제는 대쪽같은 기품과 어딘가 모를 날카로움도 품고 있었다.

그간 브리타나에서 결코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낸 탓이겠지.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안쓰러운 감정이 휘몰아쳐 그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그런 사정을 모르는 아리안느로서는 대부인과 너무도 닮은 모습에 깜짝 놀랄 만도 하지.

그때, 대부인이 아리안느를 발견하고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너라. 이쪽은 샤르트의 누이인 비올라라고 한단다.”

비올라가 고개를 돌려 아리안느를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상대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시선으로 아리안느를 살펴본 그녀는 미소 한오라기 없는 표정으로 인사했다.

“반가워요. 나는 브리타나의 왕비, 비올라 카이엔 래비에쉬라고 해요.”

정말……, 반가운 거 맞아?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반갑다고 해봤자 무섭기만 하다고요.

아리안느는 이게 바로 절대자의 기세인가 생각했다. 브리타나의 왕비인데 평범할 순 없겠지.

그렇다고 약한 모습을 보일 내가 아니지.

“처음 뵙겠습니다. 하르피온의 남작, 아리안느 드비테라고 합니다.”

왕비에 비하면 한참 낮을지 몰라도 제가 쟁취해낸 자랑스러운 지위를 뽐내줬다. 그간 갈고닦은 노련한 미소를 덧씌워서.

“……남작?”

비올라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 이야기는 함께 차 한잔하면서 하는 게 어떻겠니?”

비올라는 태연한 어머니의 반응을 보고 놀랐다. 정말이란 건가? 정말로 여인이 남작이 되었다고? 이 하르피온 제국에서?

‘그 10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그 시각, 샤르트는 오랜만에 만난 조카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아직 멀었습니다. 고작 10살인걸요.”

마지막에 봤을 때가 5살이었나. 그때의 귀여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웬 누나의 남자아이 버전으로 나타난 조카의 모습에 조금 당황하던 참이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예전의 조카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리고 달라붙었는데 지금의 조카는 애교는커녕 애늙은이 같은 태도를 보이니 섭섭하기까지 하다.

그래. 준비해둔 선물을 전해 주자. 자고로 선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했으니.

샤르트는 방 한 켠에 준비해둔 기다란 상자를 가지고 와 조카에게 내밀었다.

“선물이다. 진즉 준비해 뒀는데 이제야 전해 주게 되었군.”

선물이란 말에 폴짝폴짝 뛰길 기대했다면 큰 잘못이었던 걸까. 별다른 반응 없이 상자를 연 조카는 아주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런데……, 그게 다? 정말로?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장장이에게 주문해 제작 기간만 수개월 걸린 역작이라 자부하던 검이었는데…….

역시……, 검이 아니라 총을 사줬어야 했나.

허탈하고 섭섭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건만, 샤르트의 얼굴은 여전히 무미건조하고 평온하기만 했다. 속만 썩어들어가지.

헛헛함을 감추고자 고개를 돌린 그는 아이의 시선이 검에서 떨어지지 않는단 걸 놓치고 말았다.

***

그날 밤, 비올라는 샤르트와 단둘이 마주 앉았다.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던 비올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결혼, 꼭 해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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