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85/122)

85.

“그런데 총사령관 둘이 이러고 있으면 전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아리안느의 물음에 샤르트와 파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었다.

“정말……, 황당하네요. 샤르트 당신. 이렇게 책임감 없는 사람이었나요?”

아리안느의 타박에 샤르트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샤르트 그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아리안느이건만,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모양이었다. 다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감히 입도 벙끗하지는 못했다.

파쿠는 샤르트의 무너진 얼굴을 보고는 왠지 모를 뿌듯함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런 그를 본 샤르트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파쿠는 이제 제 차례로군, 하면서 그녀의 질책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리안느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남의 나라 황자가 제 국민을 저버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파쿠의 기대에 찬 얼굴이 실망으로 어두워졌다. 그를 본 샤르트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입꼬리를 올려 그를 향해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지금, 이 순간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혼나느냐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그녀의 관심을 받느냐였으니까.

아리안느가 눈을 내리깔고 마른 가지만 똑, 똑 부러뜨리던 파쿠에게 물었다.

“여기서 하르피온 제국 국경까지 얼마나 걸리죠?”

파쿠는 상심은 했으나 그녀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했다.

“나흘 정도 걸릴 겁니다.”

“예? 그렇게나 멀리 떠밀려 왔다고요?”

파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느는 당시의 기억이 없으니 모르겠지만, 샤르트와 파쿠는 그 물살에서 살아남은 게 용하다고 여기는 참이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실제 몸을 담갔을 때의 차이는 엄청났다. 미처 어찌할 새도 없이 물살에 휩쓸려 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었다. 그저 아리안느를 잡은 손을 놓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강폭이 넓어지는 구간에서 물살이 느려진 틈에 뭍에 올라선 것이 바로 이 수란 지역이었다. 국경에서 나흘의 거리까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떠밀려 왔다.

샤르트는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뭍으로 올라서자마자 아리안느의 상태를 살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물을 삼켰는지 숨을 쉬지 않았다.

샤르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샤르트는 황급히 그녀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다행히 시간이 얼마 흐르지 않은 탓인지 아리안느는 강물을 토해내고 숨을 내쉬었다.

“헉. 헉. 살았군.”

샤르트는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듯 바닥에 털썩 드러누웠다.

“헉. 헉.”

샤르트가 뭍에 나오자마자 아리안느부터 챙겼지만, 그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파쿠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말했다.

“곧 날이 저물겠군. 이대로는 그녀가 위험하니 자리를 이동해야겠습니다.”

샤르트는 아리안느가 위험하단 말에 다시 기운을 내 자리에서 일어나 아리안느를 안아 들었다.

“당신도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제가 하겠습니다.”

파쿠가 손을 내밀자 샤르트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제 아내는 제가 책임집니다.”

파쿠는 어쩔 수 없지 하는 얼굴로 눈썹을 들어 올리고는 어딘가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저 멀리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는 게 좋겠습니다. 주변에 땔감도 있을 테고. 되도록 강가에서 멀리 가야 하니.”

이 무렵, 강은 쉽사리 범람했다. 비옥한 하르피온에서야 이 강을 일컬어 죽음의 강이라 하지만, 척박한 켈트만 제국에서는 젖줄이나 다름없는 생명의 강이었다.

강이 범람하면서 척박한 대지에 물과 양분을 제공해 주었다. 덕분에 가축을 먹이고 사람도 살아갈 수 있었다. 우기가 지나면 다시 지독한 건기가 찾아오겠지만, 켈트만은 그렇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왔다.

“후.”

샤르트가 거친 숨을 내쉬며 아리안느를 안아 든 채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땔감을 모아오겠습니다.”

파쿠는 여기저기서 땔감을 주워오더니 익숙한 듯 나무에 불을 붙였다.

“익숙해 보이는군.”

샤르트의 말에 파쿠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이 정도는 다섯 살 어린애도 하는 일이지.”

샤르트가 비소했다.

“비약이 심하군.”

이에 파쿠가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으며 말했다.

“비약이 아니오. 켈트만에서는 제 몫을 해야 먹고 살 수 있으니.”

그의 말이 진심임을 알아챈 샤르트는 생각했다.

‘그렇단 말이지. 하르피온 제국의 다섯 살 어린아이는 어떻지?’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의 기억으로 평민인 다섯 살 아이들은 대부분 영지에 마련해 둔 보육 시설에서 낮을 보내고 저녁엔 각자의 집에서 부모가 해주는 밥을 먹고 잠들었다.

장난으로 불을 붙이다 엉덩이를 맞는 꼬마를 보긴 했어도 직접 불을 붙이고 밥을 지어 먹는 아이는 없었다. 고아 역시도 보육 시설에서 식사를 마련해 주므로 역시 직접 불을 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듣던 대로 우리와는 다른 세상이군.’

저들이 비옥한 하르피온을 탐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용납할 순 없었지만.

모닥불이 타오르자 강물에 젖어 한기가 든 몸에 서서히 온기가 퍼졌다. 파쿠가 겉옷을 벗고 모닥불 옆에 세워둔 가지에 옷가지를 걸며 말했다.

“당신도 그렇고 당신 부인도 그대로 있다가는 감기에 걸릴 겁니다. 옷을 벗어서 말리십시오.”

샤르트의 미간이 구겨졌다.

자신은 그렇다 치고 다른 남자가 보는 곳에서 아리안느의 옷을 벗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아리안느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젖은 옷을 입은 채로 서늘한 저녁 공기를 맞은 탓이었다.

“등을 돌리십시오.”

파쿠가 잠시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샤르트의 형형한 눈빛을 보고는 순순히 뒤로 돌아앉았다.

그 역시 의식을 잃은 여자의 몸을 엿보는 취미는 없었으니. 아주 잠시 돌아보고 싶은 유혹이 치밀었지만 냉정한 이성으로 가라앉혔다.

샤르트는 아리안느의 겉옷을 벗기고 나뭇가지에 걸었다. 자신도 잽싸게 옷을 벗어 걸고는 아리안느를 껴안고 최대한 모닥불 가까이에 앉았다.

잘게 떨리던 몸이 차츰 안정되자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옷은 금방 말랐다.

샤르트는 아리안느를 모닥불 옆에 두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쿠 황자의 도움을 받기만 해서는 체면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 꽤 많은 땔감을 모아온 그는 아리안느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는 들고 있던 땔감을 집어던지고 달려왔다.

“인가는 얼마나 멀죠?”

아리안느의 물음에 파쿠가 가만히 따져보더니 말했다.

“지금 시기에는 이틀 정도의 거리에 유목 중일 겁니다.”

이틀이라. 그 정도면 식량이 없어도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다행이네요. 걸어서 이틀이면.”

아리안느의 말에 파쿠가 미안해서 어쩌냔 얼굴로 고했다.

“아. 제가 제대로 말씀을 안 드렸군요. 말로 이틀 거리입니다.”

아리안느가 밀려드는 짜증에 콧잔등을 구기며 말했다.

“그럼, 국경까지도 말로 나흘 거리인 건가요?”

“예. 그렇습니다.”

‘이런 망할! 누굴 탓할 수도 없고.’

아리안느가 오갈 데 없는 화를 삭이려 미간을 쓸며 말했다.

“일단 인가로 가죠. 거기서 말을 얻어타고 국경으로 향하는 게 좋겠어요.”

“예.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샤르트와 파쿠가 그녀의 합리적인 결정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날이 완전히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았다. 오로지 모닥불만이 이 적막한 평원을 비추는 듯 보였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을 가득 메운 별이 보였다.

“세상에. 원래 별이 저렇게 많았나요?”

아리안느가 감탄하며 묻자 파쿠가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은 빛이 적으니 하늘의 별이 더 잘 보이는 거겠지요. 하르피온의 수도는 밤낮없이 밝으니 아마도 당신은 이런 광경이 처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아요. 이런 건 처음 봐요. 정말 아름답네요.”

‘저게 다 다이아몬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평생 놀고먹을 수 있을 텐데.

지극히 속물적인 생각으로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이 남자들은 제대로 오해하고 말았다.

‘아리안느가 밤하늘의 별을 보는 걸 좋아하는군. 밤에는 영지 내의 모든 불을 끄도록 지시해야겠군.’

샤르트가 생각했다.

‘괴팍한 줄만 알았더니 이런 감상적인 면도 있었군. 역시 사람은 겪어 봐야 아는 거지.’

파쿠가 생각했다.

그런 남자들의 생각은 꿈에도 모르고 아리안느는 황홀한 꿈에 젖어 들었다. 기필코 샤르트에게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받아내야겠단 결심을 하며.

그날 밤 아리안느는 쏟아지는 별 무리 아래에서 다이아몬드 광맥을 찾아내는 꿈을 꾸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힉. 헉. 헉. 도대체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 거죠?”

아리안느가 앞서가는 파쿠를 향해 물었다.

“운이 좋다면 오늘 안에 사람을 만날 수 있겠지요.”

뭐라고? 그럼…….

“운이 없으면요?”

파쿠는 말이 없었다.

말했다가는 당장에 목을 졸릴 것 같아 입을 다물기를 택한 것이다. 이를 눈치챈 아리안느가 매섭게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를 탓할 수도 없었다. 이 모든 고행은 전부 제가 강물에 빠지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으니. 그나마 이 둘이 함께여서 살 수 있었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때였다.

“운이 좋군요. 저 멀리 가축이 보입니다. 근처에 유목 중인 부족이 있는 모양입니다.”

파쿠의 말에 아리안느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나가려다 몇 발짝 못가 파쿠에게 저지당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리안느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뭐가 문제죠?”

나 지금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니 당장 이 손 치우는 게 좋을 거야.

아리안느가 당장 그의 손을 물어뜯을 듯 노려보았다.

파쿠가 아리안느와 샤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염소 꼬리에 달린 천의 색으로 보아 저들은 수르그 민족입니다.”

“수르그?”

아리안느는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어디서 들어 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고…….

“설마 그 수르그를 말하는 건가?”

샤르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아리안느는 낭패했단 얼굴의 샤르트를 바라보고 물었다.

“그 수르그라니, 뭐죠? 문제가 있나요?”

샤르트가 피곤한 듯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저들은 무법자입니다. 들키는 날엔 돌아가기는커녕 목숨도 부지하기 힘들 겁니다.”

파쿠가 질린다는 얼굴로 말을 보탰다.

“우리 켈트만에서도 저들은 포기했습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그럼……, 저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단 말인가요?”

아리안느가 물었다.

“도움은커녕 들키자마자 죽임을 당할 겁니다.”

파쿠가 바닥의 돌을 걷어차며 말했다.

아리안느가 샤르트와 파쿠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둘 다 세상이 끝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뭘 저렇게까지 실망하고 그래?’

아리안느가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그럼 훔치죠.”

“…….”

“……뭘 훔치잔 말씀입니까?”

아리안느가 그걸 몰라 묻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말을 훔쳐야죠.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샤르트와 파쿠가 서로 마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밤에 움직이죠. 아무리 무법자라도 밤엔 자겠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