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88/122)

90.

아리안느는 말을 몰다 뒤를 돌아보았다.

안장을 모두 잘라냈으니 당장은 쫓아오지 못하겠지만, 왜인지 이대로 끝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어.’

아리안느는 모야크를 다시 만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켈트만까지는 얼마나 걸리죠?”

아리안느가 소리쳤다.

“당장 켈트만으로 가진 않을 겁니다.”

“약속했잖아요!”

아리안느의 외침에 파쿠가 말의 속도를 줄였다.

“곧장 켈트만으로 향하면 황제 근처에도 닿지 못할 겁니다.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있나요?”

아리안느가 의심의 눈초리로 파쿠를 응시했다. 아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위험한 일인데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이에 파쿠가 안심하라는 의미로 싱긋 웃어 보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황제에게 가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그럴지 몰라도 우리에게도 호의적이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샤르트는 하르피온의 총사령관. 도움을 줄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샤르트를 인질로 삼아 전쟁에 이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파쿠가 고개를 돌려 샤르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믿어달란 말밖에 할 말이 없군.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을 황제 앞에 데려다주겠다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려면 이 방법뿐임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샤르트는 파쿠의 말이 진실임을 알았다. 그가 아리안느를 해칠 만한 사람에게 갈 리가 없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허다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대로 하르피온으로 돌아간다 해도…….’

하르피온으로 돌아가 우방국들에 군사지원을 받는다 쳐도 3백만에는 못 미칠 것이다. 게다가 그런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진다면 하르피온 제국이 쑥대밭 되는 것 또한 기정사실이었다.

‘황제를……, 만나 봐야 하는가.’

판단이 서질 않았다. 켈트만 황제는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되려 저를 인질로 삼을 확률도 높았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기엔 그 미약한 희망을 버릴 수도 없었다. 적어도 백만 단위의 사망자를 줄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 그리고…….

‘날 인질 삼아도 크로우 공작이 눈 하나 깜짝 안 할 테니.’

그렇다면야.

저울이 황제를 만나는 쪽으로 기울었다.

“믿어 보지.”

샤르트의 굳은 입이 열렸다.

파쿠가 보일 듯 말 듯 웃고는 다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

그 시각. 황궁 국무회의실에서는 한바탕 각축전이 벌어졌다.

“총사령관이 실종입니다! 당장 수색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죽음의 강에 빠졌다지 않습니까? 거기서 어찌 살아남는다고.”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당장 수색대를 보내야 합니다!”

쾅. 누군가 탁자를 내려치며 외쳤다. 이에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귀족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거긴 국경 너머입니다~ 애먼 병사들만 죽어 나가지 그런 쓸데없는 짓을 뭐하러 합니까?”

“쓸데없는? 그럼,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자는 말입니까!”

황태자파와 이황자파는 샤르트의 실종에 대한 대책을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드비테 남작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보르네스 백작조차도.

보르네스 백작은 귀족들의 다툼을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는 크로우 공작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크로우. 감히 나를 건드려 놓고 무사할 줄 알았나?’

보르네스 백작에게는 크로우 공작은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크로우 공작과 그 일가들이 벌이는 사업, 투자를 위한 자금줄이 모두 보르네스 백작과 닿아 있다는 사실.

이 수도 안에서 떳떳하지 못한 사업 대부분은 보르네스 백작이 연관되어 있었다. 마치 거미줄처럼 곳곳에 퍼져나간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가 힘들었으니.

크로우 공작이 안심하고 끌어다 쓰는 다른 귀족들의 자산 역시 보르네스 백작이 그 숨통을 쥐고 있음을 그는 모를 것이다. 악독하지만 뒤끝 없고 비밀 엄수는 철저한 보르네스 백작을 애용하는 귀족들이 많았고 불행히도 보르네스 백작은 그 장부를 철저하게 기록해왔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크로우 공작은 물론 이 수도의 귀족들 모두 당장 거리로 내앉힐 수 있었다. 다만, 지속해서 자산을 불려줄 고객이기에 대접해 주고 있을 뿐.

‘크로우 공작이 근래에 무기를 사들인다고 했던가?’

그가 누구도 모르게 은밀하게 군수물자를 따로 빼돌리고 있음을 보르네스 백작은 알고 있었다. 남들은 흘려넘길 사소한 정보들도 모아놓고 보면 전혀 상상도 못한 그림이 완성되기도 하는 법.

크로우 공작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여겼겠지만, 이 수도 뒷골목의 모든 정보는 보르네스 백작이 쥐고 있었다.

‘흥. 언제까지 그리 여유를 부리는 지 두고 보지.’

자신에게 큰 손해를 끼쳤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 아니, 당한 것의 배는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리라.

‘일단은 그놈부터 잡아야겠군.’

없어진 도박장의 주 고객이자 저 빌어먹을 공작의 사위, 바로 야바이 백작. 이럴 때를 대비해 그 한심한 놈의 뒤를 봐주며 구슬려 놨었지. 보르네스 백작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지며 비틀렸다.

한편, 크로우 공작은 주변의 소란에도 저 홀로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이거야 원. 그렇게 애를 써도 안 되던 일이 저절로 이뤄지다니. 필시 하늘이 나를 돕는 게로군.’

그는 한가지 문제를 해결했음에 안도했다. 다만 또 한 가지, 켈트만 제국과의 문제가 아직이었다.

‘전서와 함께 사람도 보냈는데 왜 아직 답이 없는 게지? 그래……, 아마 거리가 멀어서겠지…….’

그렇게 믿고 싶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초조해졌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황태자는 지금쯤 안전한 황궁에 있어야 했고, 켈트만 황제의 전서가 도착했어야 했다.

‘설마, 그 야만족이 허튼 생각을 하고 있는 겐가?’

무려 대 하르피온 제국과의 국혼이었다. 그들 야만족에게는 영광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전쟁을 해 봐야 몇 년간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가며 물자만 축날 뿐 얻는 건 황폐해진 땅과 가난해진 나라밖에 더 있느냔 말이다. 하르피온이 질 리는 없지만, 전쟁은 소모적이니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지.

물론, 이 하르피온의 황실에 그 켈트만의 핏줄이 잉태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아니, 이 하르피온 황가의 핏줄은 이번 대에서 끝나게 되어 있었다.

‘황태자는 불임이니…….’

크로우 공작은 자신의 늦둥이 아들이 태어난 해부터 황태자에게 불임약을 먹여왔고, 결국 황태자는 이제 완전한 불임이 되었다.

‘안전한 황궁으로 돌아오라 지시했건만, 어찌 고집을 피우는지……. 멍청한 놈.’

크로우 공작은 황태자가 갑자기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억지로 끌고 오기엔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은 두고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전장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입지는 굳어질 테니.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지면 그때 데리고 와도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켈트만은……. 크로우 공작은 그저 소식이 늦어지는 것이리라 여기며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시종장의 알림과 동시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베이루트 황제가 굳은 얼굴로 상석에 자리했다.

“다들 들어서 알고 있겠지. 카이엔 공작과 드비테 남작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한 대책이 있는가?”

황제도 뾰족한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전쟁 중에 적국의 영토로 쓸려내려 갔으니 강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해도 국경까지 되돌아오는 길이 결코, 쉽진 않을 터.

“송구하오나 폐하. 지금 당장 수색대를 파견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십만이 넘는 군사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자칫하다가는…….”

크로우 공작의 눈치를 살피던 프라우드 백작이 운을 띄웠다.

“폐하. 당장 전투에 나서 그들을 평원으로 몰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카이엔 공작을 찾아야 합니다!”

이황자파 귀족 코윈 자작이 외쳤다. 이에 프라우드 백작이 그를 나무랐다.

“허! 고작 사람 하나 구하자고 전투를 벌이란 말이오? 그에 희생될 우리 병사들의 목숨은 무어란 말이오?”

그답지 않게 웬일로 옳은 소리를 하는 바람에 코윈 자작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이를 본 프라우드 백작의 태도가 기세등등해졌다.

그때였다. 코윈 자작의 옆에 잠자코 앉아 있던 귀족이 입을 열었다.

“그리 병사의 목숨을 귀히 여기셔서 본인의 사병은 후방으로 배치해달라는 로비를 하셨는가 봅니다?”

“뭐, 뭣이!”

프라우드 백작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로비도 실패한 마당에 소문까지 돈 모양이었다.

“그런 적 없소이다!”

일단 발뺌하는 수밖에. 귀족에게 있어 발뺌은 교양의 일환이니.

“증인이 있는데도 말씀입니까?”

“대체 그 증인이 누구요! 당장 내 눈앞에 끌고 와 보시오!”

자고로 큰소리치는 놈이 이기는 법이지. 프라우드 백작은 회의장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외쳤다.

“정말 데리고 와도 되겠습니까?”

프라우드 백작은 그가 정말로 증인을 데려오기라도 할 듯 빈정대며 물어오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은 일로 저에게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쯧.”

이를 지켜보던 크로우 공작이 낮게 혀를 차자 프라우드 백작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이 기회에 지난번의 일을 만회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그른 모양이었다.

“크로우 공작,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황제의 물음에 크로우 공작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아뢨다.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닌듯합니다. 일단, 카이엔 공작을 찾는 소수 정예인원을 파견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소수정예라…….”

베이루트 황제가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늘였다.

“제 휘하에 쓸 만한 사람이 있으니 인원을 꾸려 당장 출발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크로우 공작의 말에 베이루트 황제가 시선을 옮겨 그를 빤히 응시했다.

‘확인사살이라도 하려는가 보군.’

황제도 크로우 공작과 카이엔 공작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크로우 공작이 이황자를 어떻게든 끌어내리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도 함께 보내도록 하지.”

‘여우 같은 인간.’

크로우 공작 또한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뻔히 알고 있었다.

“예. 그럼 바로 준비시키도록 하겠습니다.”

황제의 사람 몇이 더 붙는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 저 멀리 적국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어 걸림돌이 있겠는가.

황제는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속은 심란 그 자체였다.

‘내가 전장에 나서면 저 능구렁이 같은 크로우 공작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지. 아니, 필시 무슨 짓을 벌이겠지. 그만한 기회가 또 어디 있을까?’

지금 전장에 나가 있는 황태자는 군을 지휘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루이덴에게 맡겨야 하는데…….

‘저 크로우 공작이 그 꼴을 두고 보지 않겠지. 본인은 또 능구렁이처럼 나서지도 않을 테고.’

전장에 나가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전장에서 자신이 사망했을 때, 그 후의 상황이 두려울 뿐.

‘살아생전에 어떻게든 루이덴에게 힘을 실어 주려 했건만.’

카이엔 공작이 살아 있을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그 말은 루이덴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음을 의미했다.

황제의 시름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 시각, 아리안느 일행은 끝이 보이지 않던 초원지대를 지나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땅으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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