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3화 (101/122)

103.

‘죽여야겠다.’

약속이고 뭐고,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멍청이는 죽어도 할 말 없는 거지. 어딜 감히 날 돕는다고 지껄여? 내 칼침 한방이면 나자빠질 약골이.

돈돈이 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와 동시에 아리안느가 제 발치에 있던 장작을 주워들고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딱. 빠직. 빠직.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돈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어? 너, 뭐야? 구걸 어떻게 맨손으로 뽀궤?”

“응? 어떻게긴, 그냥 하는 거지.”

돈돈은 무심하게 대꾸하는 아리안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뭐야? 얘……’

무려 여인의 손목 두께만 한 장작이었다. 그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똑. 똑. 부러뜨리는 아리안느를 얼빠진 얼굴로 바라보던 돈돈은 깨달았다.

‘칼침 놓기 전에 내 목이 저렇게 똑 부러질 수도 있겠다.’라고. 그렇게 돈돈의 손이 허리춤에서 멀어졌다.

“우릴 받아줘서 고마워.”

뭐야, 갑자기? 얘 왜 이래?

“더위 먹었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는 돈돈의 반응에 아리안느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쯧. 너, 내 입에서 고맙단 소리 나오기 쉽지 않아.”

아리안느가 생색을 내자 돈돈이 수긍했다.

“구래 보여. 너 성격 더럽쥐?”

아리안느의 고운 이마가 와락 구겨졌다.

‘……이게 진짜. 아니라고는 못 하겠고.’

“계획이 뭐야? 일단은 함께하고 있으니 나도 알 건 알아야지.”

아리안느의 질문에 돈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리안느를 죽이려던 마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딱히 쟤 완력이 무서워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라고. 약속했잖아? 황제에게 데려가기로 했으니 일단은 동료까지는 아니더라도 손님으로는 대우해줘야겠지.

약속은 지켜야 하는 거니까. 암.

그렇게 합리화한 돈돈은 제 계획을 밝히기로 했다. 뭐,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고.

“죽여야쥐.”

“응?”

아리안느가 되물었다.

그런 아리안느를 돈돈이 단호한 얼굴로 마주하며 말했다.

“죽인다고. 누구든 방해가 되면 죽여야쥐.”

그게 바로 돈돈의 방식이었고 다른 형제들이 그녀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리고 아리안느는 또다시 인내심의 한계점에 다다랐다.

“그러니까 어떻게?”

계획을 물었잖아. 계획을!

아리안느는 확신했다. 이 녀석, 분명히 계획이 없을 거라고. 그리고 역시나.

“그냥 죽여야쥐. 뭘 어떻게야?”

“……이거 진짜 물욕밖에 없는 똥멍청이네.”

“뭐뤠? 이 무식하게 힘만 센 게!”

발음은 어눌해도 듣기 영역에서는 수준급 실력자인 돈돈은 욕만큼은 기막히게 알아듣고 방방 뛰었다.

“아무튼, 계획이 없단 거지?”

“계획 있는뒈? 싹 죽여버릴 거라니까?”

결국, 아리안느는 인내심을 놓고 말았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그냥 다짐이잖아. 이 똥멍청이야!”

똥멍청이야~ 똥멍청이야~ 똥멍청이……야~.

흔한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허허벌판에 아리안느의 비명 같은 외침이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졌다.

[뭐, 뭐지?]

[황녀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돈돈의 군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그녀들의 주위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제 주군을 지키기 위해.

“뭐, 뭐야? 웬 메아리?”

산에 가본 적은 없지만, 산꼭대기에서 큰소리로 외치면 소리가 되돌아오는 메아리라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여기에서?

“아리안느! 무슨 일입니까?”

잔뜩 놀란 기색의 샤르트와 파쿠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아니, 그냥 소리 좀 질렀는데……. 이거 그거 맞죠? 메아리? 산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왜…….”

영문을 알 수 없단 얼굴을 한 아리안느에게 파쿠가 설명했다.

“지금은 언덕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저 언덕을 넘어가면 협곡지대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아. 협곡지대.”

아리안느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돈돈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와. 무슨 여자 목청이 호랑이보다도 쩌뤙쩌뤙해! 왜? 계속 소리 질러 봐. 우리 여기 있다고 덤비라고 선전포고라도 하고 싶었숴?”

돈돈의 비아냥에 아리안느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이 정도면 저들도 들었을 겁니다. 아주 제대로 선전포고를 하셨군요. 드비테 남작.”

파쿠의 너스레에 아리안느는 고개마저 돌려야 했다.

잠시 후, 돈돈의 천막.

“그러니까 계획이 있단 말씀입니까?”

파쿠의 물음에 아리안느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어디 보자…….”

주변을 둘러보던 아리안느가 금빛 찬란한 항아리를 가져와 탁자에 올려두고 말했다.

“이게 우리가 지나온 협곡이에요. 그리고…….”

“손 떼. 손모가지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아리안느가 제 물건들을 건드리게 가만 놔둘 돈돈이 아니었다. 아리안느는 돈돈의 보석함을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물렸다.

‘쳇!’

아리안느는 어쩔 수 없이 화로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와 뚝. 뚝. 잘게 부러뜨리기 시작했다. 무려 아이 손목 두께의 나뭇가지를.

“저게 또 저러눼? 인간 맞아? 어떻게 저게 돼? 무식하게 힘만 세서는!”

돈돈이 질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아니, 저건 나뭇가지라고 부르기도 애매하잖아? 저건 그냥 얇은 통나무 아니냐고?

“뭐라는 거야? 이걸 왜 못 해? 뭐야……, 넌 못 해?”

설마 아니지? 라는 아리안느의 눈빛에 돈돈은 자존심이 제대로 긁혔다.

“당연하지! 그건 파쿠도 못 해! 저 시커먼 놈도 못 할걸? 이 무식하고 힘만 센 녀석아!”

그래서 죄 없는 파쿠와 샤르트까지 걸고넘어졌다. 그런데.

뚝. 뚝. 빠직. 콰직.

갑자기 파쿠에 이어 샤르트까지 그 작은 통나무를 가져오더니 뚝 뚝 부러뜨리는 게 아닌가? 아주 미묘하게 아리안느의 것보다 조금 더 두꺼운 나무를 골라 가져와서.

마치, 그녀에게 어필하려는 듯.

난 이런 거 충분히! 여유롭게! 얼마든지! 힘 안 들이고 할 수 있다! 는 기세를 풀풀 풍기면서.

‘뭐, 저런 짐승 같은 것들이 다 있어?’

돈돈은 황당함과 배신감에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넌 무식한 게 힘도 약해서 어쩌니?”

아리안느의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그만 폭발해버렸다.

“왁! 뒈져! 뒈져라!”

돈돈이 그 작은 몸을 붕 띄워 아리안느를 향해 발길질함과 동시에 파쿠가 그런 돈돈을 공중에서 낚아챘다.

허공에서 두 다리를 내지르던 돈돈이 결국, 울분에 차서 외쳤다.

“아무튼, 다리 긴 것들은!”

한바탕 소란이 몰아친 천막 안에는 열기가 후끈했다. 가까스로 안정을 찾은 돈돈이 삐딱한 자세로 기대앉아 말했다.

“어디 한 번 해봐. 헛소리하면 진짜 뒈질 줄 알아.”

진심이었다. 설사 그녀의 계획이 쓸만하다 하더라도 죽일 생각이었다. 길게 끌 것도 없이 바로 오늘 밤. 잠든 멀대의 목을 똑 따버릴 테다.

“간단해. 상황을 역전시키는 거야.”

멀대-아리안느-가 제 운명을 알지도 못하고 거만하게 웃었다.

“협곡으로 그들을 유인하잔 말이로군요.”

아리안느의 계획을 알아챈 파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맞아요.”

“그렇군. 그렇다면 병력을…….”

샤르트 역시 단번에 그녀의 계획을 알아듣고는 보다 세밀한 계획을 제시했다.

‘뭐, 뭐야?’

그 한마디면 다 되는 거야? 나만 이해 못 했어? 이번에도 나만?

돈돈은 오직 저만이 저들의 계획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으려 애썼다. 그저 알아들은 척, 동의하는 척 고개만 끄덕일 뿐.

‘망할. 이래서는 내가 정말로 무식한 거 같잖아!’

절대로 무식한 거 같은 거지 무식하진 않은 거다. 난……, 무식하지 않다고!

***

“이쪽으로 오십시오.”

40대 정도 되었을까? 집사로 보이는 남자가 정중한 태도와는 달리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제 앞의 손님을 살피며 말했다. 베인은 남자를 뒤따르며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그를 끌어들여야 한다.’

베인은 황제의 친필로 작성된 공문서를 꽉 그러쥐었다.

“이곳에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예.”

베인은 안내받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느낀 대로 이곳 응접실 역시 하나같이 오래되고 낡은 데다가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느껴지는 곳이었다.

‘설마, 이미 죽은 건 아니겠지.’

그의 나이를 생각해보면 능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미 이곳 사람들은 외부와의 소통을 단절시켰으니 그의 부고 역시 외부로 알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헛걸음한 게 아니라면 좋으련만.”

“다행히 헛걸음하진 않았군.”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낮고 웅혼한 목소리에 깜짝 놀란 베인이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간을 울리는 듯한 낮은 음성에 베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뒤로 돌아섬과 동시에 뿌연 안경 뒤 베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백발의 거대한 장신의 사내가 있었다.

‘페데루트 대공! 분명히 70대 노인이라고 들었는데…….’

도저히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의 형형한 눈빛과 굳건한 자세,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는 기세를 마주하자 마치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이 성의 주인, 페데루트 대공은 멍하니 넋을 놓은 베인을 한 번 훑고는 물었다.

“황제의 공문을 가져왔다고?”

“아……, 예.”

베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공손히 두 손 모아 공문서를 그에게 내밀었다. 페데루트 대공은 공문서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휙 그를 지나쳐 맞은편 소파에 털썩 앉았다.

“내게 공문 따위를 내밀 생각을 하다니……! 양심 없는 인간이로군.”

“?”

베인은 순간 제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싶었다.

‘설마, 지금 황제를 욕한 건 아니겠지?’

왠지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토록 애원할 때는 모르쇠로 일관하더니, 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비로소 나를 찾는군.”

‘애원해? 도대체 무슨 말이지?’

대관절 대공이나 되는 이가 황제에게 애원할 일이 뭐 있다고. 딸의 이혼 때문에 수치스러움을 못 견디고 성문을 걸어 잠갔단 소문은 그저 헛소문이었단 건가? 황제와 뭔가 다른 문제가 있었던 걸까?

알 수 없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식은땀만 흘리는 그를 향해 페데루트 대공이 말했다.

“황제에게 가서 전해. 그 어떤 말로도 날 움직일 수는 없을 거라고.”

“아……, 일단은 한번 읽어 보시면…….”

페데루트 대공의 눈이 번뜩였다.

헉. 베인은 흡사 전설에 나오는 ‘눈이 마주치면 돌이 되는 괴물’의 눈이 저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제 안경이 뿌옇기에 망정이지 저 눈빛을 맨눈으로 마주했다가는 그대로 심장이 멎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돌아가. 난 절대로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테니.”

페데루트 대공은 단호했고, 베인은 애가 탔다.

국경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카이엔 공작을 대신해 후드 후작이 총사령관을 맡고 있지만, 그의 영향력은 결코 그에 미치지 못했다.

예상보다 강대한 적군의 기세와 더불어 카이엔 공작의 부재가 길어지며 하르피온 제국군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금 제국군에게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강자가 필요했다.

이를테면 ‘하르피온의 수호자’라 불리던 페데루트 대공 같은 이가.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지 몰랐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인은 후드 후작의 전령으로서 직접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그의 제안에 곤란한 얼굴을 했지만, 그 역시도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음을 알기에 결국 친필로 공문서를 써주었다.

그런데 아예 공문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줄이야.

둘이 무슨 일로 이토록 어긋나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이대로 물러설 순 없었다.

‘어서 국경을 안정시키고 남작님을 찾아야만 해.’

베인은 그녀가 살아있다고 여겼다. 그녀는 지금도 어떻게든 돌아오기 위해 생사를 걸고 싸우고 있을 터였다. 최대한 빨리 그녀를 찾기 위해선 국경을 넘어 적진으로 쳐들어가야 했다. 그래야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테니.

베인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찔끔 눈물이 나왔지만, 덕분에 입을 열 용기가 생겼다.

굳게 닫혀 있던 베인의 입이 열렸다.

“드비테 남작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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