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15/122)

117.

“성공했다는 건 대체 무슨 소리야?”

아리안느는 나비에르의 마차에 오르자마자 따져 물었다. 저만 모르는 일이 있다는 건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기에.

나비에르는 마차가 출발한 후에야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난 나만의 세력을 만들었어. 아리안느.”

“너 따위가?”

아리안느는 지렁이가 뱀 노릇 하는 광경을 보듯 기막혀하는 얼굴이었다. 나비에르는 그런 아리안느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작 이 정도에 발끈할 그가 아니었지만, 유독 아리안느는 사람의 속을 박박 긁어대는 힘이 있었다.

“그래. ‘나 따위’에 어울리는 세력을 만들었어. 더럽고 추잡한 이들의 뒷조사를 하다 보니 나름 적성을 찾았달까?”

아리안느는 생각했다.

게으르고 나태하기만 한 멍청이에게 어울리는 세력이 뭐가 있을까? 세상 한심한 놈들만 모아놓은 세력이 분명했다. 보통 그런 인간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기에 십상이었다. 그리고 결국엔…….

‘설마…….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멍청이라도 손댈 게 따로 있지!

아리안느는 나비에르의 머리채를 쥐어뜯어서라도 버릇을 고쳐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바이올렛.”

샤르트가 내뱉은 단어에 나비에르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이런. 거기까지 파악했을 줄은 몰랐군요.”

샤르트는 예의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륙 최초의 정보 길드. 의뢰를 받고 정보를 파는 길드라고 했나?”

“정보가 돈이 되는 세상이죠. 상대에 대한 정보가 곧 경쟁력이니까요.”

샤르트는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놀랐습니다. 여태 그걸 직업으로 삼은 이는 있었어도 길드를 조성할 생각까지는 못 했으니 말입니다.”

나비에르는 처진 눈꼬리를 더 매혹적으로 내려 웃으며 말했다.

“제겐 그럴 만한 재량과 자원이 있었으니까요.”

무려 보르네스 백작이 뒷배였으니까. 물론 그는 자신이 나비에르의 세력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음을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게 또 정보 길드의 묘미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네가 정보 길드란 걸 말들었다고?”

“그래.”

아리안느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될 사업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투자할게. 나도 지분 좀 나눠 갖자?”

당연히 수락하겠지? 우리 나름 친하잖아? 그렇지? 아리안느가 기대를 품고 눈을 반짝였다.

“그건 안 돼.”

“뭐? 왜!”

이런 노다지 사업에 발만 담그면 떼부자 되는 건 순식간일 텐데! 이 욕심쟁이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는 거야?

아리안느가 분을 참지 못해 콧김을 뿜을 기세를 보이자 나비에르가 아리안느의 이마를 꽁 튕기며 말했다.

“이건 불법적인 일이야. 아리안느. 네겐 어울리지 않아.”

‘그게 대체 무슨 개소리야…….’

“난 보르네스 백작의 딸이야.”

세상에……. 그걸 잊은 거니? 악당의 딸이 불법적인 일 좀 한다고 누가 뭐랄 거야? 그냥 나눠 먹기 싫으면 싫다고 해. 이 쪼잔한 놈아!

“네겐 좋은 것만 주고 싶어. 항상 밝은 곳에서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빛났으면 좋겠어.”

나비에르는 따스한 시선으로 아리안느를 바라보았다.

‘넌 빛 속에서 살아. 어둡고 추악한 일은 내가 맡을 테니.’

동생을 위해 저는 얼마든 진흙탕에서 뒹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아리안느가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이 세상 전부를 갖다 바칠 생각이었다. 만약 돌아오지 못한다면 이 세상 전부를 불태워버릴 생각이었다.

다행히 그녀가 살아 돌아옴으로써 이 세상은 존속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나비에르의 속마음이야 어쨌든, 아리안느는 황당했고.

샤르트는 탄식했다.

왜 저는 저런 로맨틱한 멘트를 생각해내지 못하는지……. 어떤 여자라도 저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샤르트였다.

“……뭐래.”

물론 아리안느는 예외였다.

“괜찮네. 이 정도면 잠시 지내기엔 적당하겠어.”

아리안느가 나비에르가 마련해 준 임시 아지트를 둘러보고는 한 말이었다.

그저 잠시 지내기에 좋은 게 아니라 웬만한 저택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보르네스 백작가에서 자라고 카이엔 공작가에 신혼살림을 차린 그녀에겐 딱 그 정도였다.

샤르트는 무심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먼지 구덩이 폐가에서 아리안느를 재우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샤르트에겐 나비에르가 여러모로 경계의 대상이긴 했지만, 그의 도움으로 아리안느가 편하게 지낼 수만 있다면야 기꺼이 그의 시커먼 속내를 묵인해줄 수 있었다.

“뭣!”

아리안느가 샤르트를 노려보았다.

‘폐가라니! 그저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방치된 건물일 뿐인데!’

입을 삐죽인 아리안느가 소파에 늘어지듯 몸을 기대더니 뭔가 찜찜한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뭘 깜빡하고 잊은 것 같은데…….”

그게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는 걸 보니 별거 아니리라 여기고 신경 끈 아리안느였다.

그리고 그 시각.

현관문이 뜯겨 나간 텅 빈 건물의 한가운데 선 마드렌느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설마 지금, 날 버리고 간 거야?”

***

“그게 무슨 말이오? 갑자기 투자한 돈을 돌려달라니?”

얼굴을 굳힌 크로우 공작의 물음에 맞은 편에 앉은 귀족이 사색이 된 채 몸을 벌벌 떨며 아뢨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도 당장 갚아야 할 빚이 있는데, 도리가 없습니다……. 당장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습니다. 그러니 부디…….”

크로우 공작은 제게 고개를 숙이며 사정하는 귀족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벌써 세 명. 그에게 투자를 핑계로 빌려준 돈을 갚아달라며 찾아온 귀족의 수였다. 문제는 지금 다른 응접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귀족이 두 명 더 있다는 사실.

당장 윽박질러 쫓아내고 싶지만, 체면상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장차 저를 도와 이 나라를 떠받칠 자들이기도 했거니와 지금 이들을 내친다면 당장 제 입지가 좁아지기에.

“알겠으니 그만 돌아가게.”

크로우 공작이 순순히 알겠다고 하자 비로소 사내의 안색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응접실을 나서는 그를 쏘아보던 크로우 공작이 집사를 불렀다.

“파웰!”

“예. 주인님.”

집사는 곧바로 크로우 공작의 앞에 나타났다.

“나머지 사람들은 다 물려. 들어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뻔하니.”

“예. 알겠습니다.”

주인이 불편해하는 일을 대신하는 것이 집사의 업무. 파웰은 오매불망 공작을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야 했다. 물론 그들의 원망은 집사의 몫이었다.

“일이 꼬이는군.”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한 2년쯤 전쟁을 질질 끌어 황제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황태자에게 황위를 넘기도록 압박하려 했건만, 그전에 제가 나가떨어질 판이었으니.

아무래도 일을 앞당겨야 할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갑자기 저들이 짠 듯이 독촉하는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인가?’

크로우 공작이 피곤한 얼굴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생각했다.

그 이유는 수도 중심가에 있었다.

“명단에 있는 자들에게 채무이행요청서를 보냈습니다.”

수하의 말에 등을 지고 창가에 서 있던 보르네스 백작이 몸을 돌렸다.

“이제 시작이로군.”

보르네스 백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바로 사냥의 시작.

여우 사냥에서는 사냥개들을 풀어 여우를 구석으로 몰았다. 보르네스 백작은 사냥개를 풀 듯 채무자들을 이용해 크로우 공작을 몰아넣었다.

궁지에 몰린 여우가 발악하듯 크로우 공작이 발악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감히 나를 건드리다니. 당신의 목적은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오. 크로우 공작.”

궁지에 몰려 이를 드러내는 순간, 그의 위선자의 가면이 벗겨질 테니.

자신은 그저 그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기꺼이 지켜보면 될 일이었다.

***

샤르트가 파쿠 황자-현 황제 대리-의 협정서를 황제께 전하기 위해 저택을 떠나고, 둘만 남은 아리안느와 나비에르는 따뜻한 차를 사이에 두고 노려보고 있었다.

“30%.”

“안 돼.”

“25%.”

“안 돼.”

“이 욕심쟁이가! 넌 아버지의 재산도 물려받을 거잖아!”

아리안느가 나비에르를 제 아버지 버금가는 수전노 바라보듯 질색하며 소리쳤다. 나비에르는 그런 아리안느를 보며 알 듯 모를 듯한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재산이 온전히 남아있을 때의 이야기지.’

나비에르에겐 보르네스 가문의 재산은 일말의 가치도 없었다. 그가 그 가문에서 유일하게 가지고 싶어 했던 건 지금 눈앞에 있는 아리안느뿐이었다.

하지만 보르네스 백작과 드벨룬 남작가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운 나비에르의 사정을 모르는 아리안느에겐 그가 그저 저 혼자 잘 먹고 잘살려는 못된 욕심쟁이로 비칠 뿐이었다.

“내가 그동안 해준 게 얼만데 이런 식으로 날 소외시켜?”

“…….”

나비에르는 대꾸할 가치도 못 느꼈고, 아리안느는 도둑이 제 발 저렸다.

“크흠! 뭐 지분은 됐고! 그럼 난 공짜로 해줘. 나한텐 죽을 때까지 의뢰비 받지 않는 거로.”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당연하지. 널 위해 만든 조직인데.’

아리안느를 너무도 잘 아는 나비에르는 그 사실만은 숨겼다. 저 작은 악마가 그런 커다란 권력을 쥐게 되었을 때 벌어질 참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아리안느가 비로소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리자 나비에르의 입꼬리도 함께 올라갔다.

똑똑.

“들어와.”

나비에르의 수하인 레인이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와 깊숙이 인사를 올린 후 나비에르에게 눈짓했다.

“괜찮아. 아리안느도 들어야 할 일일 테니.”

나비에르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인이 입을 열었다.

“보르네스 백작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예상대로군. 숙부가 제대로 일을 벌인 모양이야.”

아리안느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 사람이 움직였다고?”

예상보다 이르긴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타이밍이 딱 좋았다.

아리안느는 이미 나비에르가 모든 상황을 파악한 상태임을 눈치챘다. 더불어 크로우 공작이 언제 일을 벌일지 예상한다는 것도.

나비에르가 적당히 식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터질 거 같아?”

아리안느의 물음에 나비에르가 대답했다.

“반년. 늦어도 1년.”

“그럼 너무 늦어. 일을 앞당기자.”

아리안느의 말에 나비에르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얼마나?”

아리안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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