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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1화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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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 레포트를 완성하느라 이틀 밤을 새고 기절하듯이 잠든 그날, 사실 기절한 게 아니라 유체이탈을 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영 낯선 세상의 낯선 몸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 세숫물을 대령할까요?”

물론 불만은 없다. 눈 떠보니 갑자기 로또의 꿈이 이루어진 것과 비슷한 상황이니까!

나는 금박이 붙어있는 세숫대야에 팔을 담그며 흐뭇하게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노동의 흔적이라고는 없는 하얗고 가느다란 손이다. 크으. 이거야, 이게 바로 자본의 힘이로구나!

“아침식사는 어디서 드시겠어요?”

“침실에서.”

그러자 문이 열리고 트레이가 들어온다. 첫눈에 난 내 아침인 걸 알았다. 뽀송한 하얀 빵 두 덩이, 당근크림스프, 그리고 수란까지. 너무나 완벽한 광경이다. 박수칠 뻔했다.

“창문을 열어드릴까요?”

창문 밖에는 새빨간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아침햇살에 찬란히 빛나던 꽃잎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화사한 장미향이 내 코끝에도 닿았다. 자연 향수가 따로 없다.

숨을 크게 들이쉬자 숨 가득 신선한 아침공기가 느껴진다. 미세먼지도 황사도 없는 봄날 느지막한 아침에 장미정원 뷰의 킹사이즈 침대와 응접실이 달린 방에서 일어나다니, 호텔투어 해외여행이라도 이런 호사는 불가능할 수준이었다.

눈물이 나도 인정해줘야 하는 순간이지만 나는 그저 숟가락을 더 빨리 움직였다. 스프가 너무 맛있어서 나오던 눈물도 들어가야 할 판이다.

“오늘도 서재로 가실 예정이신가요?”

최고는 이 부분이다.

“그래.”

이 몸은 금수저 날백수였다! 지난 일주일 간 주워들은 것을 조합해보자면 체력이 약하고 지병이 있어서 외출도 드문 것 같다.

뭐? 스마트폰과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 없이 사는 은둔형 외톨이의 삶은 너무 지루할 것 같다고?

아니다. 돈만 있으면 이렇게 꿀일 수 없다.

우선 서재로 가보자.

이 집 서재는 거의 도서관이라고 불러도 될 수준의 어마어마한 양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정리도 어찌나 잘 되어있던지, 내가 원하는 책들을 편안하게 찾을 수 있다.

게다가 하도 서가가 크다보니 고리타분한 고전문학이나 전문서적이 아니라 온갖 잡지, 모험소설, 연애소설 등 별 종류의 인쇄물을 다 접할 수 있던 것이다! ...사실 야한소설도 있어서 요새는 그걸 자주 본다. 헤헤헤..

심지어 부족하면 주문을 넣을 수도 있다는데, 아직 사용해본 적은 없다.

아무튼 낮 내내 서재에 처박혀서 온갖 통속소설을 읽다보면 점심도 배달해준다. 후... 나는 오리다리를 뜯으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탐닉했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간이 베인 고기를 뜯을 때마다 육즙과 기름기가 입에서 폭탄처럼 터지고 힘줄하나 느껴지지 않는 고깃결이 스르륵 목구멍으로 사라진다.

뼈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참자. 지난번에 시도해보려다가 일하는 분들이 들어와서 굉장히 어색한 상황이 됐었다...

“산책하실 시간입니다, 아가씨.”

점심 먹고 또 책 좀 읽다보면 산책시간이라고 부른다. 그럼 주섬주섬 숄 같은 걸 걸치고 요 앞 장미정원을 한 바퀴 도는데 또 여기가 장난 아니게 넓다. 아직도 안 가본 곳이 있을 것 같은 정도! 나보다 큰 관목들과 어우러져 절묘하게 배치된 장미들이 길 따라 송이송이 피어있는 것을 보면 무슨 유럽의 입장료 내야하는 고성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오, 이번 산책코스에서는 기사모양 조각상이 달린 분수대를 보는구나. 나는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 올린 기사의 투구에서 물분수가 튀는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파란 하늘과 하얀 분수대, 그리고 물이 고이는 부분에 붉은 장미 꽃잎 몇 점이 무척 운치가 있다.

이렇게 산책을 하다보면 슬슬 배가 꺼지는데, 그러면 또 저녁식사를 하라고 부른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나요?”

“네, 어머님.”

“네!”

저녁식사는 식구가 다 같이 하는 것 같다. 붉은 머리의 대단한 미인이 아마 내 어머니인 것 같은데, 장난 아니다. 21세기 한국이었으면 서울 시내를 걸을 때 한 발짝마다 기획사 명함을 받을 것 같은 얼굴이다.

그리고 내 맞은편에 앉은 이 몸 또래의 여자애가 앉아있다. 아마도 내 연년생 언니인 것 같다. 이쪽도 붉은 머리인데, 어머니처럼 굉장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주근깨 덮인 하얀 얼굴에 쳐진 눈매가 매력적이다. 아이돌상이랄까.

“그럼 즐거운 식사를 시작해요.”

예아! 나는 이 몸의 어머니(추정)가 나이프를 들어 올리는 것을 보며 얼른 나도 내 나이프를 들었다.

저녁식사는 부드럽고 두툼한 고기를 절묘하게 구워낸 스테이크였다. 특히 길고 두꺼운 뼈 바로 주변에 붙어있는 고기가 감칠맛이 죽여줘서 갉아먹고 싶은 정도다. 나는 사이드 메뉴로 나온 풀떼기들을 무시하고 열심히 고기를 공략했다.

참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이 몸의 언니(추정)는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고 풀떼기만 집어먹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맛있는데 포크 한 번 대지 않다니, 혹시 소화가 잘 안 되나? 아니면 채식주의자인가? 생각해보니 지난 일주일 내내 고기 먹는 모습을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물론 개개인의 신념과 취향을 존중해야겠지. 암. 나는 덩어리째 남은 그 스테이크를 보며 내심 입맛을 다셨지만 차마 내가 먹겠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내일도 좋은 얼굴로 만나요.”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대답하는 내 말은 순도 100% 진심이다. 나는 표정 가득 드러나려는 감동을 애써 자제했다. 디저트로 나온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완벽했다...!

이후에는 내 침실과 연결된 전용 다목적실로 가서 음악을 들으며 자수를 두거나 카탈로그를 보며 쇼핑을 한다. 옷이나 악세서리 종류도 많지만, 간식거리나 인형부터 시작해서 가구까지 다양한 품목을 들여다보며 히죽거리고 있노라면 또 잠 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다.

“잠자리를 준비해드릴까요?”

그러면 또 내 침대에 말캉거리는 뜨뜻한 물주머니를 넣어주고 세숫대야를 대령해주고 머리도 빗겨주고 옷도 챙겨준다! 크으! 게다가 내가 켜놓은 전축과 카탈로그로 어질러진 테이블도 엄청 빠르고 조용히 말끔하게 정리해주는데 이게 바로 서비스의 맛이구나 싶다. 매일을 5성급 호텔에서 지내는 기분을 일주일째 느끼고 있다!

아로마 향초까지 대령해주고 사람들이 나가면, 나는 향긋한 허브와 사과, 장미냄새를 맡으며 고롱고롱 잠에 빠져든다.

후. 과제도 알바도 학자금대출도 없는 또 다른 완벽한 하루가 아닐 수 없다. 유체이탈이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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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넝쿨 저택의 사용인 근무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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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수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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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식사를 비롯한 모든 취식 및 조리행위는 사용인 숙소에서만 허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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