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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2화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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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악몽을 꿨다. 밤을 새며 완성한 레포트가 파일오류로 손상돼 열리지 않아 조교에게 전화가 오는 꿈이었다.

하지만 아침식사 트레이를 보자 모든 게 괜찮아졌다! 어차피 이제는 레포트 안 써도 되거든! 하하하!

이러고 잠시 후에 다시 고시촌 원룸에서 자취하는 고 학번 대학생으로 눈 뜨는 건 아니겠지. 제발 아니어야한다...

“오늘은 무어 경께서 방문하시는 날입니다. 응접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무어 경이 누군데요...? 나는 멍한 표정으로 일하는 분을 쳐다봤지만, 당연히 내가 누군지 알 거라고 생각하는 그 표정에 그냥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슬슬 내가 기억상실인 척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언제 하지? 그래!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제부터 바로 티내야지! 나는 안내를 따라 우아한 금장식이 도드라지는 하얀 문 안으로 발을 디뎠다.

우선 이 무어 경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시도해봐야겠..., 으, 으으음....?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응접실 안 테이블 의자에 엄청난 미남이 앉아있다.

날 보고 고개를 돌리며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아래 새카만 눈썹과 아몬드형 남보라빛 눈, 그리고 눈가를 따라 흐트러짐없이 문양처럼 자리잡은 아래속눈썹이 무슨 명화처럼 감동을 준다. 콧대는 미간부터 코끝까지 단정하고 날렵하게 직선으로 뻗었고, 턱선은 귀밑각까지 둔하지 않게 날이서 있다.

그리고 깨끗한 피부 위 붉은 입술이 막 움직인다.

나한테 말을 걸고 있다.

꿈인가.

"식사는 하셨습니까? 식전이시라면 인근에 괜찮은 식당이 있습니다."

반사적으로 솔직한 대답이 나왔다.

"해,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5초 전의 나야 제발 닥쳐 왜 미남이 밥 먹자는데 받아먹지를 못하니 아아아...

다행히 미남은 굴하지 않고 다시 말을 걸었다. 잘한다 미남, 장하다 미남!

"그러면 산책으로 정원을 함께 거니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 저택의 아름다운 장미정원은 언제나 제 마음에 위로가 되는 군요."

얼굴이 언뜻 우수에 차는 게 최근 마음에 힘든 일이라도 있나보다. 평소라면 남한테 권유하는 건데 네 마음의 위로가 알바냐고 생각했겠지만 얼굴이 잘생기니 그 전개도 절로 개연성이 생긴다. 사연 있는 미남인가 보구나. 미남에게 위로가 된다면 좋은 것이다.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바로 정원으로 이동했다. 오전의 햇살이 장미꽃잎 이슬을 비추어 마치 글리터 요정이라도 붙은 것처럼 정원 전체가 반짝거렸다.

하지만 더 반짝거리는 것은 저 얼굴이다. 짜릿해 놀라워 잘생긴 게 최고야...

"방문 때마다 이 저택의 장미가 아름답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만, 오늘따라 더 정원이 아름답고 생명력이 넘치는 것 같습니다.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는 걸까요?"

하하하 당신의 오지는 얼굴 덕분이 아닐까요 같은 저질 플러팅 멘트만 뇌 내에 맴돈다. 야 잠깐 가만있어봐. 지금 뇌를 그런데 쓸 때가 아니야. 이 집 정원을 가꾸는 방법? 정말 하나도 아는 건 없지만 알아내야한다. 없는 방법 만들어내서라도 알려줘야 한다.

일단 시간을 벌자!

"글쎄요. 사실 정원 일에는 그다지 조예가 없어서... 정원사 분을 만나면 한 번 알아볼게요."

"아,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남자가 살풋 웃었다. 눈가와 입가가 부드럽고 우아하게 정 대칭형 아미를 그리며 휘어진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건 빛 각도가 바뀌었기 때문일까? 아니다. 장미에 강림했던 글리터 요정이 환승 입덕해서 자리를 옮긴 게 틀림없다.

"감사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하하하."

좋아 오늘이 내 입덕 1일이다. 이제는 덕질거리도 생기다니 이 이상 삶의 질이 더 좋아질 수 없는 수준이야! 유체이탈 만세!

"저도 약혼자로서 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로제."

"......?"

환청인가? 설마 나 유사연애로 입덕한 거야?

"약혼자...?"

내 되물음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미남이 머쓱한 기색이다.

"예... 제가 이 시기가 지나면 잘 방문하지 못해, 약혼자라고 자칭하기도 민망한 건 사실입니다."

"......"

진정해라 내 뇌야. 환청이 이어지고 있잖아. 큰일인데, 유사연애감정으로 덕질을 해본 적은 없단 말이야.

"그래도 이번 달에는 일정이 없어서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괜찮으신가요?“

"괜찮죠."

환청 아니네. 응, 아냐. 개이득이야. 이성과 덕성이 머리채를 잡고 싸우다가 극적인 화해를 한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엄지를 치켜들며 외친다. 어찌됐든 저 얼굴을 한 달은 볼 거 아니야? 나머지는 한 달 후의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이 대사 지난 기말 직전에도 비슷하게 했던 것 같은데 기분 탓일 것이다.

"자주 오겠습니다."

남자가 입꼬리를 길게 끌어올린다.

"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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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후 가벼운 점심식사를 같이 한 후에 미남은 떠나갔다.

점심식사 내내 이것저것 살뜰하게도 물어보더라. 몸은 괜찮은지, 좋아하는 음식은 어떻게 되는지, 집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는지, 요새 마음에 걸리는 일은 없는지 등등.

그리고 나는 그 순간 번개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얼굴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나 기억상실인 것 같이 티내려고 했었지, 참! 그래서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기억이... 이것저것 잊는 것도 많고 어릴 적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남자는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더니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증상이 나타난 지 오래됐습니까?"

"아뇨. 한 주 정도에요."

"조치는 취하고 계십니까? 다른 분들께 말씀은 드리셨나요?"

"몸이 아픈 탓에 일시적인 증상인가 싶기도 해서... 아직 말한 적은 없어요. 지금이 처음이에요."

물론 앞으로는 여기저기 티내고 말하고 다닐 생각이다.

"그렇군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속눈썹을 내리깔아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로 장갑 낀 손을 들어 내 손 위에 덮듯이 올려두었다.

와, 얼굴만큼 손도 잘생겼는데? 커다란 손등과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마디마디 곧게 뻗어 있는 것이 장갑 위로도 느껴진다.

"다음 방문 때, 제가 증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꼭 찾아오겠습니다. 로제의 말씀대로 일시적 증상일 수도 있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네."

흐압후,합, 이거 무슨 팬사인회 와서 계 탄 것 같은 기분인데? 나는 가볍게 내 손을 끌어 잡았다가 떨어지는 미남의 손을 보며 숨을 골랐다. 그리고 남자가 떠나는 것을 배웅하며 결심했다.

이젠 정말 덕질뿐이야. 프로필, 저 얼굴천재의 프로필을 모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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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하는 분들을 은근슬쩍 떠보며 모은 약혼자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1. 이름은 루카스 무어

2. 나이는 유체이탈 전 내 몸과 동갑 (그런데 이 몸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다.)

3. 이름 복잡한 무슨 지역의 대지주 집안 상속자

4. 사업 때문에 몹시 바쁜 듯

5. 그나마 시간 나는 게 일 년에 한두 달 정도

6. 그 시기에만 이 저택에 자주 방문

7. 그게 바로 지금

미쳤다. 이건 무슨 시대극 드라마 남주인공이신지? 오만과 편견부터 남과 북까지 온갖 서양 드라마가 머리에 휘몰아친다. 이쯤 되면 사실 이 모든 걸 과로로 코마상태에 빠진 내가 뇌 내 망상 중인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슬쩍 팔뚝을 꼬집어 봤다. 윽, 아프군.

"산책하실 시간입니다, 아가씨."

이 집안사람들 사실 산책 중독인 게 아닐까? 매일 이 시간마다 일하는 분들이 산책시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심지어 오늘은 아까 아침에 약혼자하고 이미 산책을 했는데도 또 시간을 알려준다. 어차피 오늘은 목적이 있어서 정원에 또 가봐도 괜찮을 것 같다.

정원사 분을 찾아서 이 저택의 정원관리법을 물어봐야지! 그럼 얼굴천재 약혼자와의 다음 팬미팅... 아니 만남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얼굴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하!

사실 일하는 분께 불러달라고 부탁하는 방법이 제일 먼저 떠오르긴 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약혼자 정보를 수집하느라 그분들 일할 시간을 뺏은 참이라, 또 시간이 걸릴만한 일을 부탁하기가 민망했다.

그래서 마침 다시 정원에 나가니 내가 직접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단지 이렇게 여유롭게 할 일없이 지내니까 자발적으로 일을 해볼 마음도 드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나는 신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정원으로 흥겹게 나갔다. 참고로 음은 작년 워터멜론 차트 연간 14위를 기록한 남자아이돌의 대히트곡이었다.

※※※

근무수칙

3. 장미손질 중인 정원사를 발견 시 즉시 그 자리를 피해야합니다. 정원을 벗어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4. 정원에서는 흥얼거림과 휘파람을 포함한 어떤 종류의 노래도 허가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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