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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네.”
없잖아. 나는 황망하게 분수 가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찾아도 정원사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 산책 시간은 정원사의 근무시간이 아닌가보다.
생각해보니 당연히 그렇겠다. 누가 굳이 불편하게 고용주하고 마주치면서 일하고 싶겠는가? 하다못해 편의점 알바를 해도 진열정리할 때 손님이 뚫어져라 쳐다보면 불편해 죽겠구만 정원사같이 섬세한 식물을 다루는 직업은 더할 것이다.
결국 열심히 운동만 했구나... 아니 괜찮아. 운동은 건강에 좋을 거야. 병약하다는데 더 잘 관리해야겠지. 좋은 체력단련이었다. 애써 합리화하며 너털너털 저택으로 걸음을 돌이켰다.
그러고 보니 이 몸, 병약하다고 주변에서 챙겨주는 것 같은데 막상 나는 불편한 점을 못 느끼겠다. 그렇게까지 체력이 부족한 것도 모르겠고, 이렇게 오래 걸어도 지친 것 말고는 특별히 아프거나 어지럽지도 않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섬광 같은 추리가 내 머리를 스쳤다. 헉, 혹시 이 몸 원래 주인도 꿀 빨려고 일부러 병약한 척하고 있던 거 아냐?
아니 보니까 집에 돈도 많겠다, 굳이 일하지 않아도 꿀 빠는 인생을 즐길 수 있겠다싶어서 백수로 살고 싶었지만 주변 시선이 신경 쓰여서 일부러 병약한 척을 한다... 너무 가족의 걱정을 사지는 않을 만큼 적당히... 흠.
“설득력 있는데?”
정말 그런 거라면 내 영혼의 단짝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우리는 좋은 잉여친구가 됐을 거야. 근데 지금은 어쩌다 내가 걔가 돼버렸네 그래.
나는 숙연해져서 내 어깨를 두드리며 생각했다. 지금 이 몸 주인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과제와 시험과 알바로 찌든 원래 내 몸이 아니라 다른 금수저 몸에서 여기보다 더 개이득 라이프를 즐기고 있기를!
“저녁식사 시간입니다, 아가씨. 식당으로 안내해드릴까요?”
“아, 그래.”
상념을 마치자 어느새 하늘이 석양으로 울긋불긋 물들고 있었다. 주홍빛에 물들어 장미 잎사귀와 분수대에 튀어 오르는 물방울마저 꽃잎 같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야외활동에 다 써버리다니, 나도 돈 많은 백수로 살면 이렇게 열정적으로 살 수 있었구나. 나는 우수에 찬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많이 움직였으니 저녁 메뉴로 고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마블링 죽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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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저녁은 돼지고기 숯불구이다! 냄새가 완전 그거야! 침이 줄줄 새고 코가 벌름거리는 걸 애써 참았다. 아무리 가족이래도 너무 추잡해 보일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이 몸의 어머니로 보이는 붉은 머리 여성이 싱긋 웃으며 덕담을 한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였나요?”
“네, 어머님.”
“네, 좋았어요! 근데 저 질문이 있는데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잠깐만, 혹시 이 몸 원래 성격이 밥 먹을 때 오로지 밥에 집중하느라 사담은 일체 안 하려는 먹잘알이었나...? 분위기 왜 이래? 내 맞은편에 앉은 언니(추측)는 아예 얼굴에 표정이 없어졌다. 어지간히 놀랐나보다.
“어떤 질문인가요?”
“저희 정원 관리하시는 분 근무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말하고 나서 바로 생각난 건데, 이런 대저택에 살 정도면 일하는 분들 근무시간은 일일이 모르지 않을까?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추정)는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돌렸다.
“언제나... 언제나 이 정원을 신경 쓰고 계시겠죠.”
정원사 분이 굉장히 열정적이신가 보다.
“하지만 그건 로제가 신경 쓸 일은 아니랍니다. 우리 따님은 정원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이 저택에서 즐겁게 지내면 되는 거예요.”
어머님, 그런 양육태도가 참 온화하긴 하지만 저 같은 의지박약에게는 지나치게 잉여한 인생을 보장해주는 것 같습니다만.
아무튼 또 이렇게 돈 많은 날백수 인생보장에 한 걸음 더 다가갔구나. 나는 긴 말 붙이지 않고 그냥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 왜 갑자기 그런 것이 궁금해졌을까요? 혹시 요즘 어떤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걸까?”
드디어 타이밍이 왔다!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은근히 티를 내려 애썼다.
“아, 사실은 요새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아요. 어릴 적 일도 잘 기억나지 않고... 몸이 좋지 않아서 일까요?”
“저런!”
어머니는 입을 가리며 탄식했다. 이 몸의 언니(추청)는 가뜩이나 굳은 얼굴이 하얗게 질렸는데, 다시 보니 포크를 쥐고 있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다. 이렇게까지 너무 걱정해주니 약간 머쓱해진다.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사랑스러운 로제, 의사가 올 때까지 푹 쉬고 있어요. 외출은 안 됩니다. 무리하면 안 되니 최대한 집에서 요양해야 해요!”
헛, 기억상실은 너무 과한 카드였나 보다. 반응이 심상치 않다!
“그,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은데요. 일상생활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아, 건강해질 때까지는 저택에서 머물러야한답니다. 갑자기 밖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떨지, 이 어미는 걱정이 되어서...”
어머니는 마치 자신이 쓰러질 것처럼 머리를 짚었다. 아이고 과하십니다, 어머님... 짜게 식어가는 내 기분을 뒤로 한 채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서야 이 몸의 어머니의 표정이 나아진다. 아마 안심하는 것 같았다.
“건강에는 영양가 많은 음식을 꾸준히 섭취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답니다. 충분히 먹어야 해요.”
“넵.”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기어코 일하는 분들이 트레이에서 드디어 메인 요리를 꺼내오는 것을 더 덜어 내 접시에 올려주게 지시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감동을 느꼈다. 이게 바로 혈육의 정인가!
나는 그 날 양념 바른 돼지고기 직화구이를 몹시 포식할 수 있었다. 슬슬 부쩍 김치가 당기기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다. 아무튼 정말 만족스러운 저녁이었다.
하지만 맞은편에 앉은 이 몸의 언니(추정)는 이번에도 손끝도 대지 않았다. 아니, 잘 보니까 아예 음식에 손도 안 댄 것 같은데?? 식기가 아주 깨끗했다. 소스를 핥아먹은 게 아닌 이상 저럴 리는 없지. 조금 신경 쓰인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내일도 좋은 얼굴로 만나요.”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아예 식사 자체를 안 했는데 즐거운 식사였을 리가 없지. 나는 고민하다가 결국 어머니가 자리를 뜨고 나서 일어날 준비를 하는 언니(추정)에게 말을 걸어보았다. 자매일 테니까 말은 놓고 살겠지?
“식사를 못 하던데, 혹시 속이 안 좋아?”
소녀는 안 그래도 허옇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더니, 날 보며 이를 악물었다.
“진짜 딸도 아니면서 주제넘게 굴지마.”
갑작스러운 출생의 비밀이 유체이탈 빙의자를 강타한다...!
그리고는 날 밀치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벗어났다. 가냘픈 체격이던데 생각보다 밀쳐진 어깨가 아프다. 쟤는 저녁도 안 먹었으면서 힘도 좋네. 나는 황망하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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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수칙
5.저택의 지하실과 조리실은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만일 누군가 귀하를 그 장소로 부를 시, 즉각 퍼킨스 부인에게 보고 후 본래 근무지로 복귀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