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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4화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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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 돌아와서 좀 침착하게 생각해보니 가능성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정말로 출생의 비밀이다.

두 번째, 이 몸이 입양아다.

세 번째, 부모님이 재혼했다.

참고로 다년 간 일일드라마에 노출되어왔던 내 한국인의 감은 세 번째라고 강력하게 외치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극 중에서 출생의 비밀은 좀 더 극적인 순간에 밝혀지며, 입양아일 경우 이렇게 눈치 안 보고 백수로 돈 펑펑 쓰고 지내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라는 다분히 드라마 서사적 관점에서의 감이기 때문에 내 이성이 패스했다,

이럴 때 답은 하나다. 일하는 분께 떠보기 찬스를 쓰겠습니다!

“아버님이 떠나가신지 얼마나 지났더라.”

내가 했지만 정말 중의적으로 완벽한 표현이다. 돌아가셨어도, 이혼하셨어도, 심지어 장기 여행이나 출장을 가신 거라도 모두 포함시킬 수 있는 단어 선택이었어!

“다음 달이면 5주기입니다, 아가씨.”

되게 옛날에 돌아가신 거였구나. 갑자기 내 뇌 내 분위기가 싸해졌다. 어쩐지 방금 전에 즐거워한 것에 죄책감이 느껴진다. 나는 황급히 상황을 수습했다.

“그랬지. 요즘 부쩍 아버지가 그리워져서 말이야.”

대답해주던 내 또래 소녀가 그 말에 테이블을 정리하던 손을 멈췄다. 이 반응은 또 뭐냐. 하지만 별다른 대꾸 없이 내게 허리를 숙여보이고는 정리를 마치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한숨을 쉬고 침실로 들어가 대자로 침대에 뻗었다.

으아아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몸은 아버지는 돌아가신 거고 어머니 쪽은 친어머니가 아닌 거지? 나머지야 뭐 기억상실증인 척하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그리고 이 판단으로 다음날 대참사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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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오후에 방문할 거랍니다. 걱정 말고 푹 쉬고 있어요.”

“네, 감사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내 방에 찾아오더니 저렇게 말했다. 그리고 평소 먹던 것에 두 배는 되는 양의 어마어마한 아침상을 내 앞에 차리도록 지시하더니, 내가 먹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정한 인사말과 함께 방을 떠났다.

다행이다. 만약에 밥 먹는 것도 보고 계셨으면 체했을 거야......

나는 방에 남아서 식사를 계속했다. 맑은 스튜에 두툼한 샌드위치에 뭔가 들어갔는지 모를 상쾌한 맛의 초록색 주스까지 다 맛은 기가 막히게 좋았다. 이 몸 역시 병약한 게 아닌가보다. 방금 일어났는데도 위장에 잘만 들어간다.

점점 힘을 얻어가는 ‘원래 몸 주인은 백수지향 선택적 병약’설을 떠올리며 식사를 거의 끝내갈 무렵, 지난 일주일처럼 일하는 분들이 정중한 확인 후 들어오셨다. 그 중에는 어제 내게 아버지 정보를 알려준 소녀도 있었다. 나는 괜히 어제의 갑분싸가 떠올라 숙연해졌다.

아무튼 이번에도 식사정리와 몸시중을 위해 온 거려니 했는데, 맨 앞에 서있던 부인 분이 나한테 봉투를 내밀었다. 우아한 청색에 금박으로 테두리 무늬가 입혀져 있어 비싸보였, 아니 아름다운 모양새였다. 무심코 받아들자 설명이 이어진다.

“아가씨, 무어 경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봉투 떨어트릴 뻔했다. 나는 북 찢어서 안의 내용을 얼른 확인하고 싶은 충동과 조심스럽게 조그만 흠집하나 남지 않도록 뜯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했으며, 결국 조심스럽게 열려 노력만하면서 황급히 봉투를 뜯었다.

안에는 새하얀 종이 위에 남색 문장이 유려한 필체로 적혀있었다.

- 친애하는 로제 오베르 양께

하지를 앞둔 빛나는 계절입니다.

시기만큼 아름다운 우리의 만남을 고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보지 못하게 된 점,

무척 아쉽고 걱정이 커집니다.

마담 자우어로부터

예의 그 문제가 연유라는 것을 전달받았습니다.

짧았던 지난 만남에 약속드렸던 소식은

제 마음과 함께 동봉하여 보냅니다.

그대의 모든 것에 찬란한 회복이 일어나

하루빨리 다시 만나 뵙기를

마음깊이 바라겠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약혼자

루카스 무어 올림 -

태어나서 이렇게 미사여구가 과한 격식 차린 편지는 처음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파서 못 본다고 마담이라는 사람이 거절했고 그것 참 아쉽다는 말이지? 무슨 근대문학사 교양 교재 들여다보는 것 같다.

이게 미연시라면 그냥 본인 사진이나 하나 넣어주는 편이 호감도가 더 올라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긴 했지만, 미남이 편지를 적는 장면을 떠올리니 모든 게 좋아졌다.

그 얼굴로 어떻게 적을까 고민하면서 이걸 적었겠지? 와 다 했다, 이미 얼굴이 이겼다.

나는 그런 행복한 상상을 하며 봉투를 들고 서재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는데, 편지를 전해주신 일하는 분이 날 말렸다.

“마담께서 의사의 방문 전까지는 방에서 휴식하시는 게 좋겠다고 권유하셨습니다.”

저 과보호의 향기는 분명 이 몸 어머니를 말하는 거겠지? 그러고 보니 편지에서도 마담이 적혀있던 것 같다. 이번에도 한 번 떠보자!

“마담 자우어께서?”

“......네. 그렇습니다.”

역시 어머니가 마담 자우어가 맞나보다. 어머니가 미남의 방문도 거절했나보다. 아쉽군.

아니 잠깐, 그러면 방금 내가 어머니를 이름과 존칭으로 부른 건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일하는 분은 잠깐 멈칫했을 뿐, 큰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역시 재혼으로 만난 의붓어머니가 맞는 건가?! 내 K-감성이 맞았나?

“원하시는 서적을 말씀해주시면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추리에 너무 깊게 빠진 나머지, 하마터면 즐겨 읽던 고수위 연애소설을 댈 뻔 했다. 가까스로 잡지명을 말하는데 성공한 나는 일하는 분들이 나가자마자 봉투를 잡은 채 다시 침대로 다이빙했다.

그러자 열린 봉투 사이로 뭔가 도르르 떨어졌다. 반짝거리는... 설마 반지인가? 반지인거야?

하지만 괜한 설레발이었다. 나온 것은 아름답게 세공된 작은 크리스털 병과 반짝거리는 은빛 티스푼이었다. 티스푼에도 꽃핀 넝쿨이 우아하게 양각되어있다. 뭐지 이 선물은?

나는 우선 크리스털 병을 집어 들었다. 속에서 내용물이 찰랑거렸다. 손가락 두 개만한 아담한 크기의 병 입구는 코르크마개 같은 것으로 밀봉되어있는 것 같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웬 쪽지를 돌돌 말아놓은 것이 뚜껑 위에 끼어있다.

초라도 칠해놓은 것인지 액체에 젖지 않은 그 종이를 펴자, 단정한 글귀가 드러났다.

- 안정제 복용법

생수 혹은 홍차에 반 티스푼 타서 잘 저어 마십니다.

유제품이나 술과 함께 복용해서는 안 됩니다.

부디 효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

와 웬일이야.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어제 내가 기억상실 이야기했다고 이걸 하루 만에 구해서 보내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거기다 약 용량을 재거나 타 먹을 때 쓰라고 티스푼도 같이 동봉해서? 대박이다. 이 행동력과 센스는 뭐지?

거기다 자세히 보니 이 쪽지, 필체가 아까 본 편지랑 똑같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비교해보니까 그냥 똑같다. 와, 이것도 본인이 적었어? 미쳤다. 얼굴과 재력과 젊음에 인성까지 가졌다. 한 사람에게 시대극 드라마 남주인공 속성이 이 이상 추가될 수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뭐 내가 진짜 기억상실도 아니라서 약을 마실 수는 없지만, 티스푼이라도 잘 써야겠네. 나는 뚜껑을 닫은 약병과 티스푼을 우선 치마 아래 주머니에 넣었다. 크기가 작아서 쑥 들어간다.

약간... 무슨 아이돌이 직접 기획한 공식 굿즈 같은 걸 이벤트 당첨으로 받은 기분이다. 코를 쓱 닦으며 이유 없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만끽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남은 편지와 봉투, 쪽지는 침실과 연결된 내 방에 있는 서재 서랍에 넣어뒀다. 직후에 각종 잡지들을 가지고 일하는 분이 다시 방문했고, 나는 그걸 하나하나 읽으며 의사가 올 때까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의사는 점심식사가 막 끝난 직후에 도착했다.

그리고 기억상실 컨셉은 거짓말처럼 주체할 수 없이 떡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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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르 양, 지난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을 말씀해보시겠습니까?”

“......”

큰일났다. 난 그냥 머리가 언제 어떻게 아픈지, 언제가 제일 기억나지 않는 건지 물어볼 줄 알았지. 근데 역으로 뭐가 기억나냐는 질문이라니! 나는 힘겹게 대답했다.

“산책 중에... 노을 속에서 빛나는 장미를 보았는데, 몹시 아름다웠던 것 같은... 네,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제도 비슷한 걸 봤는데 설마 매일 산책하는 이 집에서 지난달에도 한 번은 봤겠지. 하지만 의사는 당황스런 눈빛으로 손에 든 차트와 나를 번갈아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달에는 산책 시간이 오전이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만.”

“......”

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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