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환장의 시작 -->
나는 부질없이 한 번 더 수습을 시도했다.
“아, 헷갈렸네요. 그건 이번 달이었고... 음, 지난달에는 서재에서 '정원과 낭만'이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그게 참 인상적이었죠.”
제목만 봐선 무슨 로코코풍 정원양식을 알려주는 책 같지만 사실 격렬한 삼각관계 연애소설이다.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 서있던 어머니는 일하는 분을 불러 그 책을 가져오게 했다.
휴, 이번에는 좀 먹혔나?
“이 책은... 이번 달 중순에 발간됐군요.”
“......”
어디서 소리 안 들리세요? 뭔가가 떡락하는 소리가... 네. 바로 선생님의 변명 코인입니다.
뭐야 내 고점 돌려줘요....
이후 의사는 넋 나간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말 대단치를 벌였으며, 그럴수록 방안의 분위기는 침통해져갔다.
의사는 갈수록 점점 말이 없어지더니, 한참 후에야 나와 이 몸의 어머니를 번갈아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료시간 관련해서 마담 자우어와 대화를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오베르양, 잠시만 기다려주시길 바랍니다.”
“네네.”
예, 누가 봐도 환자에게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해 보호자와 독대하려는 의사의 모습이십니다.
입술을 깨물고 있던 어머니는 내게 미소 지으며 걱정 말라고 하고는 의사와 방을 나갔고, 나는 차라리 처음부터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걸 그랬다고 이불을 차며 후회했다. 환장하겠네!
잠시 후에 어머니가 먼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버트 선생이 약을 제조 중이랍니다. 걱정 말아요. 우리 로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요양하면 곧 차도가 보일 거예요.”
“..네넵.”
식은땀이 흐른다. 이 죄책감, 이 분위기 어떻게 하냐.
나는 이후 이어진 긴 침묵을 견디다 못하고 될 대로 되라는 기분으로 나불거리게 됐다.
“근데 사실 일상생활 하는데 지장이 있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아아, 그럴 수가 없군요, 그럴 수 없어요......”
그 순간 의사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마담?”
손에는 약봉지로 보이는 물건을 든 채였는데, 심상치 않은 어머니의 반응에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의사의 부름에 답하지도 않고, 이 몸의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열린 문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뭐, 뭐야 왜 그러세요? 하마터면 입을 쩍 벌리고 육성으로 말할 뻔했다. 의사도 조금 놀란 것 같았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넌지시 내게 말했다.
“마담의 반응이 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베르 경께서 그렇게 떠나신 후에는 주변의 정신적 병환에 큰 우려를 가지고 계시죠.”
잠깐, 이 몸 이름이 로제 오베르니까, 떠나간 오베르 경이라는 건 혹시 이 몸 아버지인가? 강렬한 '뭔가 사연이 있습니다!'의 느낌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다.
“어, 어떻게 떠나셨는데요? 제가 기억하는 게 이번에도 좀 다를 수 있으니까 혹시 해서요.”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말년에 극심한 우울증과 감정기복을 겪으셨지요. 결국 그렇게 식 전날에 사고가 나다니...... 아무튼 참 마음 아픈 일이었습니다.”
‘그렇게’가 어떻게인데요!?
하지만 의사는 말하는 것 자체가 꺼려지는 듯, 끝을 얼버무려 버렸다. 그리고 내게 푹 자고 스트레스 받을만한 행동을 피하고 몸을 정양하라는 등 뻔한 몸 보양 레퍼토리를 황급히 늘어놓았다. 누가 봐도 그 화제를 피하고 싶은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완전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됐다. 아니 무슨 식 전날에 무슨 사고가 난 거냐고요. 이정도 부자면 정말 온갖 행사를 다 갔을 것 같은데? 장례식, 기념식, 축하식, 결혼식까지 온갖 식이 다 있다 보니까 뭔 추측이 안 되는 것이다.
이건 마치 드라마에서 범인의 결정적인 증거가 밝혀지는 순간, 중요한 건 하나도 안 보여준 상태로 배우가 놀란 표정으로 박제되며 그 화 엔딩 후원광고 배너가 뜨는 걸 보는 기분이다. 크윽.
어떻게 하면 다시 그 화제를 꺼내올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지만 소용없었다. 의사가 내게 약을 꺼내 보여주며 각 효능을 설명하고는, 집사 퍼킨스 부인에게 맡길 테니 꾸준히 복용해야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급히 방을 나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강렬한 사연의 느낌이 계속되는데 제대로 알아내지는 못하는 고구마의 연속에 완전히 지쳐버렸다. 망한 컨셉으로 흑역사를 만든 것에 대한 오그라듦도 한몫했다.
“으아아아아”
그렇게 넋 부랑자가 된 채 오후를 멘붕 속에서 보냈다.
그리고 정신 차리자마자 생각했다. 어차피 망한 거 사이다라도 마시자!
에이 몰라! 어차피 난 이제 기억이 완전히 오락가락하는 심한 정신병 환자가 됐으니까 앞으로는 필터 없이 모든 걸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봐 버릴 테다. 꼭 만나는 사람마다 질문폭격으로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어 버릴 거야.
...혹시 나중에 다시 이 몸 원래 주인이 돌아오게 된다면 정말 이 환장할 상황 죄송합니다. 어쨌든 제가 정말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최선을 다하긴 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제 자유로운 도비에요. 제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다 이겁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벌컥 열었다. 왠지 산 정상에서 함성 한 번 질러주듯이, 풍경을 바라보며 내적함성이라도 한 번 질러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근데 하필 또 석양이 지고 있다.
아아악. 의사와의 면담이 다시 떠오른다...! 황급히 창문을 도로 닫으려는데, 정원수 너머로 뭔가 시커먼 게 보였다.
“뭐여?”
온통 울긋불긋해진 정원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어두운 색이다. 뭐지? 나는 괴로워하던 것도 잊고 뚫어져라 그것을 쳐다보았다. 길쭉한 형상의 그 모습은... 사람 같은데? 키 큰 남자처럼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자. 나는 창가에 양팔을 기대어 몸을 쭉 뺐다. 긴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그 모습이 각도를 달리하며 제대로 그 윤곽을 드러냈다.
“무어 경?”
이 몸의 약혼자였다. 헐. 혹시 잘생긴 얼굴의 강렬한 잔상 때문에 잘못 봤나 싶어서 몇 번 눈을 비비고 다시 봤지만 정말 그 얼굴천재가 맞았다. 와, 이렇게 보니 몸도 좋네. 멀리서 봐도 탄탄한 몸 선과 도드라진 얼굴의 티존이 분수대 조각상처럼... 아, 아니.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때와 장소가 이상하지 않나? 왜 지금 여기 있는 거야?
5분 전에 심적 해방을 얻은 나는 딴 생각 없이 그냥 약혼자를 부르기로 했다.
“무어 경!! 여기서 뭐하세요!?”
약혼자는 좀 놀란 것 같았다. 움찔하며 내 쪽을 정확하게 돌아본 그 미남은 그래도 내게 부드럽게 목례를 하고 이쪽으로 주저없이 걸어왔다. 다가올수록 그림자를 지나며 얼굴이 뚜렷해지는데, 노을빛을 받은 두 볼이 마치 수줍어하는 것처럼 보여서 참 사람 마음을 흐뭇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거참 잘생겼다.
“저는 정원을 산책 중이었습니다. 오늘은 못 뵐 줄 알았는데, 이렇게라도 안부를 확인할 수 있다니 기쁘군요.”
약혼자는 마치 동네공원 산책하다 만난 것처럼 일상적으로 인사를 해왔다. 이 해괴한 상황은 뭐야. 나는 동공지진하며 되물었다.
“근데 어떻게 이 집 정원에서 이 저녁에 산책을 하세요? 굳이 편지도 보내시고는...?”
“아, 그건 이 저택에 도착한 다음에 쓴 겁니다.”
“네?”
약혼자는 좀 머쓱한 표정으로 일의 정황을 설명했다. 약을 구해서 오늘 아침에 급하게 방문했는데 내 검진 문제 때문에 어머니가 절대안정이 필요하다고 거절하셨단다.
그런데 이 약혼자분이 다음날은 일정이 있어서 재방문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냥 온 김에 혹시 결과가 괜찮으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 문진이 끝날 때까지 좀 기다리겠다고 했단다. 약은 못 만날 수도 있으니까 우선 내게 일하는 분 편으로 보내놓은 거라고 한다.
“그리고 방금까지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마담 자우어로부터 연락이 없더군요. 좀 답답해져서 정원 산책을 나와 있었습니다.”
아마 이 몸의 어머니가 아까 전 뛰쳐나간 후 정신이 없어서 연락을 못하지 않았을까싶다.
“그, 그렇군요.”
그런데 뭐지 이 지고지순함은. 나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동공지진하기 시작했다. 이 얼굴에 이 천연기념물 같은 성격... 실화인가. 내가 저 얼굴이면 더 막살았을 것 같은데 굉장하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감탄했다. 그리고 약혼자의 다음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검진은 좀 괜찮았나요, 로제?”
“.......”
아뇨.
나는 가까스로 즉답하지 않고 돌려말했다.
“생각보다 기억나는게 적더라구요. 그래서 일단 처방을 받아놨어요. 근데 뭐 아프거나 생활에 지장있는 수준은 아니구요!”
이 대답에도 약혼자는 걱정스러운지 표정을 찌푸리며 사근사근히 말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이 없는 건 정말 다행입니다. 그래도 기억은 사람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니 약은 꼭 거르지말고 드세요. 제가 드린 건 자양강장제에 가까우니 함께 드셔도 괜찮습니다."
"예엡."
이 말 각각 다른 사람들한테 연달아 세번쯤 듣는 구나. 나는 대답이라도 잘 해주려고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때서야 얼굴을 좀 풀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도 자연스럽게 시선이 따라갔다.
어느새 노을이 반쯤 가라앉아 하늘에 붉은 흔적만 남아있었다. 정원도 함께 그 짙은 원색이 바래가며 남빛으로 물들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빛을 잃어가는 배경을 두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미인은 내게 권유했다.
"잠깐 밤산책은 어떠십니까?"
하하하 요거 좀 보게, 지금 그건 내가 권유하다 못해 돈이라도 내야될 판이다. 나는 창가에서 뛰어내릴 포즈를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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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수칙
11. 일몰 이후 정원으로의 출입은 제한됩니다. 업무적 목적을 제외한 어떤 개인적 사유도 예외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