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 그렇구나. 역시 비결이 있구나.”
내가 물어보기는 했지만 설마 저렇게 자신감 있게 비결이 있다고 말하는 걸 정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보통은 ‘뭐 비결까지는 아니지만 저만의 독특한 방식이 있지요. 하하!’ 이런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는 거 아니었나?
역시 어려서 그런지 패기가 장난이 아니다. 감탄스러울 정도다.
“그건 바로......”
“바로?”
“꾸준히 신경을 쓰는 거예요.”
갑자기 정석이 나왔다.
“장미가 어떤 상태인지 언제나 알고 있다면, 언제나 가장 완벽한 상태로 돌볼 수 있어요.”
이게 무슨 수능을 잘 보려면 교과서 위주로 독해에 충실하게 집중해서 공부하라는 소리야? 결국 말만 쉽고 실제로 실천 하려면 성실의 요정에게 선택받은 사람만 가능한 거잖습니까. 나는 짜게 식은 채 물었다.
“그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건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할 수 있어요.”
무슨 장미의 요정이세요?
아니지. 생각해보면 이거 로판이잖아. 가능성 있다. 사실 요정들이 숨어사는 세계관이고 저 정원사는 꽃의 요정 같은 거지.
그럼 약혼자도 얼굴의 요정 뭐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인간 먹거리에 무지해서 그 거지같은 샌드위치를 사왔다고 이해해 줄 수도 있지.
“와, 넌 정말 타고난 정원사인가보다.”
내 상상이 끝없이 뻗어갔지만 말은 온화하게 정원사를 칭찬해줬다. 강의 중 딴 생각 하다가도 교수님이 호응을 원하시면 마치 진심이 가득한 것처럼 리액션 해주던 짬에서 나온 바이브였다.
소년은 다시 장미로 고개를 돌리더니 작게 대답했다.
“글쎄요.”
아마 부끄러워하나보다. 제법 귀엽다. 나는 장미의 요정 가설 주식을 버리지 말고 한 주만 가지고 있어보기로 했다.
“장미를 굉장히 좋아하나봐.”
계속 장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당연한 질문을 하자, 소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어린 것 같았다.
“사실 장미를 다루기 시작한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그렇겠지. 아직 성인도 아닐 텐데 뭐 경력이 그렇게 오래됐을 것 같지는 않다.
“어느 순간 제게 장미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져서 저 스스로도 관심을 가지게 됐죠.”
아마 그게 여기서 장미가 유행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나 보다. ‘이 판에서 곧 뜰 종목’이라는 건 그 분야 지망생과 말 트기 참 좋은 소재지 않은가.
“그래서 장미를 좋아하게 된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그래도 계기가 되긴 했어요.”
소년은 넝쿨 옆에 매달아둔 자신의 전등을 들어 장미에 가져다 댔다. 장미꽃잎이 불빛에 주홍빛으로 물든다.
“아마 이슬 맺힌 장미 위로 석양이 내리쬐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실 거예요. 그건 마치 아름답게 빛나는 결정 같지요?”
아마 그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는 듯이, 소년의 이어지는 말은 살짝 느리게 나왔다.
“그래서 저는 오후 늦게 장미에 물을 주는 것을 좋아한답니다.”
약간 몽롱하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이런 게 바로 덕력일까.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져서 어깨라도 두드려줄 뻔했다.
어, 그런데 다시 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내용도 있다. 오후 늦게 물을 준다는 건 그때 정원에 있다는 말이잖아.
“근데 그 시간대에 마주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지난번 석양이 질 때쯤 정원사를 찾아 발바닥 아프도록 정원을 돌아다닌 기억을 떠올리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소년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좋아한다고 항상 하는 건 아니에요. 장미는 물을 너무 자주 주면 안 되거든요.”
“그, 그렇구나.”
미안하다. 누나가 알못이라 그래.
“그럼 주로 이 야밤에 정원에 나오는 거야?”
“그런 편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냥 낮에 나와도 괜찮아.”
이 침침한 시간에 잘못하면 사고라도 날 수 있다. 여차하면 집사 분과 면담이라도 할 생각으로 그렇게 말하자,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밤이 편한 걸요. 하지만 가끔은 낮에도 나오니까요. 그때는 인사라도 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다. 내일이 밝으면 바로 집사에게 말할 생각이었지만 나는 이 어린 친구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
“선셋이라고 불러주세요.”
소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고, 나는 경악했다.
“서, 선셋?”
“네.”
“......혹시 누나 있니?”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 했고, 나는 내가 알던 선셋에 대해 설명했다. 내 또래고, 저택에서 일하는 소녀라는 말에 소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들어보니까 같은 집안인 것 같아요.”
“그럼 친척 누나?”
“누나는 아니에요. 나이가 같으니까.”
생각보다 이 정원사 소년은 그렇게 어리지 않나보다. 어쨌든 파악된 둘의 사이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원래 알던 쪽인 선셋은 이 호칭이 별명이라고 그랬는데, 아마 성씨에서 따온 별명인가보다. 그러니까 성이 같을 이 소년도 자기를 선셋이라고 불러달라고 했겠지.
어, 잠깐. 그럼 설마 이쪽도 전개상 비중 있는 인물인가? 독살 용의자의 혈연이라니 완전 어딘가 결정적인 단서나 조력자, 혹은 방해자로 등장할 것 같은 인물이잖아. 심지어 내 또래라 서브남 후보일 수도 있어!
......그건 왠지 외양상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에바 같았기 때문에 기각했다.
“음, 시간이 됐네요. 저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오베르 아가씨.”
정원사 소년은 자신의 전등을 챙기더니 장미를 다듬던 도구를 허리춤에 찼다. 나는 몰아치던 추리를 잠시 중단하고 소년을 배웅하기로 했다.
“어,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네. 아,”
소년이 왼손을 들어 정원너머 어둠 한복판을 가리켰다.
“저택은 저쪽이에요.”
헐. 어떻게 알아보는 거지? 나는 황급히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봤으나 겁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여. 이 몸이 야맹증이야 아님 저쪽이 올빼미 수준인 거야. 이 한 밤에 정원일 하는 걸 봤을 때는 아무래도 후자겠지?
아무튼 감사인사는 해둬야겠다.
“어? 고마워......”
고개를 다시 돌리니 소년이 없어졌다.
발도 빠르네. 이미 담장너머로 갔는지 전등 빛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감사인사를 할 겸 담장 사이를 돌며 소년의 행방을 찾아볼까하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러다 괜히 소년이 알려준 저택 방향도 잊어버릴까봐 깔끔히 접었다.
맞다, 어쩌면 정말 장미의 요정이라 뿅하고 사라진 걸 수도 있고! 로맨스 판타지에서 드디어 ‘판타지’의 가능성을 발견하자 좀 설렜다. 랜턴을 챙겨들고 소년이 알려준 방향으로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부엌? 때려 치자. 새벽에 갈란다. 하루 정도는 배고프게 자도 되지 뭐.
“......”
그리고 내 방향감각은 또 폭망했다.
나는 정원의 끝에 있는 거대한 철문과 담벼락 앞에서 동공지진했다. 여긴 나가는 문이잖아. 완전히 반대로 왔어. 이쯤 되면 밤눈 어두운 길치 확정이야. 나는 이 몸의 단점을 발견해 잠시 충격에 휩싸였지만, 곧 극복했다.
지금은 특수한 경우고 원래 돈 많으면 야밤에 길 찾을 일 없어. 안락한 집에 있으면 돼.
그나저나 어떻게 도로 저택으로 돌아가지? 여기 정원이 장난 아니게 규모가 커서 아마 그냥 일직선으로 걸어가도 15분 이상 소요될 것 같은데. 게다가 정원 중간중간 미로처럼 구불구불한 담장길이 많아서 더 걸릴지도 모른다.
“오늘 밤은...... 노숙인가.”
나는 엄숙히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때 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제?”
“어? 무어 경?”
약혼자의 목소리였다. 놀라서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위쪽입니다.”
“헉.”
고개를 들자 대문 옆 담벼락 위에서 손을 흔드는 어두운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가볍게 아래로 뛰어내려 무사히 착지했다. 시합 종목이었으면 벌써 내가 10점 번호표 들고 흔들고 있는 게 보인다.
근데 반가운 건 반가운 거고, 왜 또 이 야밤에 정원에 있는 걸까? 그것도 몰래 대문을 넘고 있네. 심지어 언제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이 밤에 정원을 산책 중이셨나요, 로제?”
“아, 어쩌다보니까 길을 잘못 들어서요. 근데 무어 경은 어쩌다 여기에...?”
“음.”
약혼자는 왠지 약간 주저하는 것 같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내 랜턴 불빛이 약혼자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완전히 다가왔을 때 즈음에는 약혼자의 얼굴에 걸린 완연한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 표정이다.
와, 랜턴 불빛보다 얼굴이 더 빛나는 놀라운 기적!
“사실, 이걸 가져오느라 잠시 나갔다 왔습니다.”
그리고 불쑥 내게 포장된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반사적으로 받아든 나는 그 안에서 나는 향기에 벼락 맞은 듯 몸이 굳었다.
이건, 이건...... 소고기다!
“제가 저녁식사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려 가져왔습니다. ......실망했던 것 같아서.”
“와.”
장담하는데 내 눈에서 지금 광선이 나가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분명 번쩍번쩍거리고 있을 내 안광을 걱정하며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부엌에 가려가 길을 잃은 참이거든요.”
“......음식을 찾으러?”
“뭐 독살 흔적을 찾아보자는 부수적인 이유와 함께요.”
“부수적 이유...... 군요.”
“네.”
배가 고프고 맛있는 냄새에 정신이 나가서 그런지 되는 대로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에이 몰라, 주는 걸 고맙게 받는 건데 호감도가 떨어지지는 않겠지!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우리 같이 먹어요!”
마지막은 양심상 붙여줬다. 사실 이 늦은 밤 나 혼자 야식을 먹을 수는 없다는 물귀신 심보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아마 양심의 소리 비중이 더 클 것이다.
약혼자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역시 저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야식을 잘 먹지 않나보다. 크, 본인도 안 먹을 음식을 이 야밤에 날 위해 사러 나갔다 와주다니, 티가 안 나서 그렇지 혹시 이미 공략이 끝난 트루-러브인가?
거참 고기와 미남이 있으니 주접이 끊이질 않는다.
“......좋습니다.”
“오!”
“지금 날이 저문 지 오래라, 도보로 정원을 통과해 저택을 찾아 들어가기는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선생님, 방금 담 넘어서 혼자 그 방법으로 저택으로 돌아가려던 거 아닙니까?
“괜찮으시다면 밖에 제 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시내로 나가서 괜찮은 숙박시설을 잡아드릴까 합니다만 어떠십니까? 저택에는 새벽에 연락을 넣지요.”
잠깐 이거 플러팅인가? 플러팅인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