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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냐. 침착하자. 아무리 플러팅이라도 선택지상 승낙이 지뢰인 경우도 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서사적으로 봤을 때 우리사이에 뭐가 일어날만한 충분한 감정적인 교류가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내가 들어온 로판이 공략물이라는 추측이 맞다면, 야밤에 둘이서만 밖으로 도망쳐 하하호호 낭만적인 데이트를 하고 나한테 방까지 잡아주는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지점까지 오려면 아직 빌드업 과정이 꽤 남았다는 뜻이다.
즉, 이건 차라리 어떤 갈등이나 불화의 시발점으로 쓰일 당위성이 충분한 루트!
물론 그런 고구마를 통해 둘의 사이가 더 절절해질 수도 있겠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방식이다.
그러나 나는 고구마가 싫다. 오로지 사이다만 벌컥벌컥 마실 것이다.
그러니 내 선택은 하나다!
“랜턴도 있는데 조심조심 걸어가면 금방 가지 않을까요? 이건 응접실에서 먹으면 되니까요! 내일 새벽에 할 일도 있어서 어차피 일찍 저택에 돌아와야 되거든요.”
그리고 내가 역으로 새벽에 같이 저택을 탐색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하면서 오히려 관계 진전의 발판으로 삼는 마무리를...까지 생각하는데, 또 약혼자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저기요, 무표정도 예술이긴 한데 지금 나올 타이밍이 아니었는데요!
“......잘 알겠습니다. 그러시죠.”
어? 설마 이거 승낙이 맞는 선택지였어? 묘하게 말투가 쌀쌀맞아진 약혼자가 정원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나는 따라가며 물었다.
“혹시 마음 상하셨나요?”
“아닙니다.”
“화나셨나요?”
“그럴 리가요.”
“삐지셨군요.”
“삐지......”
약혼자가 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맞았구만.
“그런 감정은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후, 네. 잘 알겠습니다.”
완전히 삐졌네. 삐졌어. 나는 히죽히죽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으려 애썼다. 맞는 선택지 고르는 것에 실패했는데도 아주 즐거웠다. 처음으로 좀 격식 없이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랄까? 왠지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좋았어. 그럼 지금 역으로 데이트 제안을 해볼까!
“저, 대신 내일 새벽에 저택을 좀 돌아다녀볼까 하는데, 같이 가실래요?”
“......이유가 뭡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기억이 잘 안 나는 곳들도 많아서요. 이 기회에 어디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려고요. 낮에는 너무 눈에 띌 것 같기도 해서 새벽에 하려고 생각했죠.”
“......”
약혼자는 한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답이 없었다. 단번에 승낙하기 민망해서 저러는 거구나. 다 안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내린 약혼자의 얼굴에는 부드럽고 가벼운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요. 동행을 요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니시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끝까지 다 확인해보시게 도와드리겠습니다.”
“와, 감사합니다!”
“약혼자로서 당연한 일이죠.”
살짝 내려갔던 허들이 예의바른 모습이 치고 올라오며 같이 다시 치고 올라온 것 같긴 하지만 문제는 없다. 어차피 호감도가 충분히 쌓이면 이벤트마다 도로 허울 없는 모습이 나올 것을 다년간의 간접경험 상 안다.
그때까지 예의바른 시대극 남주인공 속성의 미남을 즐기자. 어느 쪽이든 너무 맛있어서 즐겁구나. 하하하!
이후 말없이 정원을 돌진해가는 약혼자를 따라간 결과, 놀랍도록 빠른 시간 내에 저택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슨 인간 네비게이션도 아니고 어떻게 이 야밤에 저렇게 잘 움직이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조심히 대문을 열고 들어가, 적막한 저택을 가로질러 아까 내가 말했던 대로 슬쩍 응접실에 들어갔다. 나는 약혼자가 전등을 키는 사이 얼른 테이블 위에 안고 온 종이상자 올려두었다. 그리고 약혼자가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확인 하고는 그것을 열어봤다.
이미 식어서 미적지근해졌을 텐데도, 맛있는 냄새가 불쑥 코를 찔렀다.
“와.”
안에는 소고기로 만든 볶음요리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윤기 흐르는 갈색 소스와 흰 소스가 버섯과 감자, 소고기를 감싸고 반짝거린다. 이 집에서는 거의 먹어보지 못했던 길거리 음식 같은 외양에 문득 강렬한 허기와 식욕을 자각했다.
와, 찍어먹으라고 꼬치도 같이 동봉해줬네. 얼른 양 손에 하나씩 집어 한 쪽은 약혼자에게 건넸다. 약혼자는 어색한 손동작으로 그 꼬치를 받았다.
“사실 더 드실만한 집을 찾아보고 싶었습니다만, 시간이 늦어서인지 이런 곳만 문을 열고 있던 터라.”
“네? 여기 엄청 맛있는데요. 소스가 장난 없네요.”
나는 입에 넣은 소고기를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자극적인 맛이 입에 감기니까 정신을 못 차리겠다. 살찌고 건강에 나쁠 것 같은 이 맛, 최고다. 장담하는데, 이거 맥주하고 같이 팔던 안주였을 거야. 저절로 일 끝나고 들러서 먹는 푸짐한 펍 같은 곳이 연상된다.
그러고 보니 저택 밖은 어떤 이세계가 펼쳐져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책으로 읽기에는 근대 미국 같은 느낌이었지만 실제로 이 저택이 있는 이 지역이 어떤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말이지. 기껏해야 이 지역 끝이 바닷가를 끼고 있다는 것 밖에는 정보가 없다.
음, 오늘 오후에 서재에서는 이곳에 대해서 더 알아보는 건 어떨까? 공부하긴 싫지만 여긴 로판 안이니까 판타지 소설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겠지?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군요.”
“넵. 아, 구매하시느라 쓰신 돈은 꼭 저한테 말해주세요. 제가 꼭 낼게요.”
그러니 앞으로도 푸짐하고 맛있는 것만 사와 줘!
하지만 당연하게도 거절이 돌아왔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제안한 것이니, 제 호의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래, 돈 많다며. 그럴 줄 알았다. 사실 그 말은 이 대사를 위한 밑밥이었으니까!
“그럼 다음에 제가 꼭 식사 대접을 할 게요. 사와주신 것 중에 제일 맛있는 식당에서 여러 번!”
그러니까 그걸 생각하면서라도 꼭 맛있는 걸로 사와 줘야 된다?
다행히 이번 건 먹혔다. 약혼자는 표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오묘한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곧 편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감동했나보다. 나는 애써 동요를 감추는 것 같은 약혼자의 표정을 언급하지 않고 넘어가기 주기로 했다. 대신 약혼자를 재촉해서 같이 소고기를 없앴다.
약혼자는 처음 몇 번의 사양이 무색하게도 곧잘 먹었다. 많이 싸와준 덕에 마지막 고기를 두고 싸우는 슬픈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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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배로 푹 자고 이른 아침에 일어났다. 잔 시간에 비해 컨디션은 몹시 좋았으나, 거울을 보니 얼굴이 좀 부었다. 그래도 야식에 이 정도면 양호하군. 이 몸은 참 좋은 체질이야. ...물론 야맹증과 방향치만 제외하면 말이다.
“좋았어.”
나는 어스름히 밝아오는 밖을 확인하고 세안 후 옷을 갈아입었다. 직접 욕실로 가서 세안을 하니 매번 침실까지 물을 떠와주시던 일하는 분들의 노고가 더 느껴졌다. 이 세안대 장난 아니게 무거운 것 같은데 말이지.
아무튼 물기를 닦고 옷까지 갈아입고 나니 잠도 달아났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시계를 보니 말해둔 시간도 거의 다 됐겠다, 얼른 문을 열고 살금살금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에 도착하자 벌써 약혼자가 나와 있었다. 분명 나랑 똑같이 야식 먹고 잤는데 붓기 하나 없이 청명한 얼굴에 완벽한 정장차림이었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네가 로판 남주인 거 잘 알겠으니까 진정해......
“잘 주무셨습니까, 로제?”
“네. 저야 뭐.”
나는 머쓱하게 웃었다. 약혼자는 환하게 마주 웃어줬다. 와, 어떻게 입꼬리가 저렇게 대칭으로 말려 올라가는 거지? 무슨 연습이라도 하나?
“사용인들이 나올 때까지 앞으로 두 시간 쯤 남아있습니다. 저택 구조를 살펴보기에는 충분할 것 같군요.”
시대극 영화에서 보면 꼭두새벽부터 일하시고 그러던데 다행스럽게도 여긴 해 뜨고 나서 움직이고 해지면 당직만 두고 자러 가는 게 기본근무인 것 같다. 야밤에 자택 보안이 좀 걱정되긴 하지만 뭐, 이렇게 부잣집인데 그동안 어련히 알아서 잘 해왔겠지 싶다.
“네, 딱 좋은 것 같아요.”
“그럼 어디서부터 살펴보고 싶으십니까?”
“부엌이죠.”
무조건 이건 부엌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젯밤의 설욕전이다.
“음, 부엌은 1층이지요. 차라리 위에서부터 돌아보시고 내려오셔서 확인하는 건 어떻습니까?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목적 없이 내려오는 것보다는, 끝까지 탐험의 설렘을 가지시는 게 더 즐거우실 테지요.”
흠, 일리 있는 말인데?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침식사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일찍 나오실 수도 있으니까요.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그냥 지금 얼른 확인하고 올라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게다가 날 독살하려던 놈이랑 혹시 마주치기라도 하면 내가 눈치 챘다는 걸 깨닫고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네. 그렇군요.”
약혼자가 어쩐지 약간 침울해하는 것 같다. 어쩌면 아침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번복해줄까 잠시 고민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이렇게 매번 얼굴에 져줄 수는 없지!
대신 힘차게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서 이번에야말로 간식도 찾고 독살 흔적도 찾아서 일타쌍피 이벤트를 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