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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13화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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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으로 통하는 문은 식당을 지나쳐 복도 끝에 있다. 다 먹은 접시가 정리된 트레이가 저 문 안으로 사라진 걸로 봐서는 거의 확실하다.

나는 후다닥 그 문 앞까지 이동했다. 다행히 잠겨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지체하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흠흠.”

20세기 초반 배경의 고저택에서 새벽에 부엌을 탐색하러 온 청춘남녀라니, 영화라면 왠지 긴장하면서 ‘애니바디 데어?’를 한 번 외쳐줘야 할 것 같은 타이밍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부엌 안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창을 가린 하얀 천 사이로 새벽빛이 스며드는 게 상쾌하게 느껴질만큼 단정한 공간이었다.

윤이 나게 닦인 각종 식기와 조리도구들이 열을 맞춰서 걸린 모습에 감탄하며 슬금슬금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와, 기름 떼나 소스 말라붙은 흔적 하나 없다. 넘치는 프로의식이 느껴지는 곳이다.

나는 시궁창 같던 내 원룸의 손바닥만 한 싱크대를 떠올리며 잠시 반성했다. 그건 아마추어도 아니고 그저 유사주방 수준이다.

약혼자는 소극적으로 따라오더니 막상 부엌에 들어오자 꽤 적극적으로 여기저기를 뒤지기 시작했는데, 부엌의 화덕 모퉁이를 돌며 나를 불렀다.

“다기 보관함은 이쪽이군요.”

“와.”

대박. 나는 벽면 하나를 가득 매운 유리 장에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릴 뻔했다.

그 안에는 하얗게 빛나는 각종 무늬의 다기가 빼곡히 차있었는데, 희미한 새벽빛에도 윤기가 반짝거려 무슨 궁전 한복판에 와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특히 장미무늬와 금박이 도드라지는 것들이 많아서 화려한 장식장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이 중에 특별히 사용인이 자주 내오는 것이 있습니까?”

“음...... 아마도 이거 같은데요.”

나는 금박 잎사귀 위로 작고 붉은 장미송이들이 망울망울 그려진 찻잔을 콕 집었다. 비슷비슷한 것들이 많긴 하지만 이 찻잔이 유독 디테일이 살아있어서 그런지 눈에 익었다.

약혼자는 장갑 낀 손을 한 번 털더니, 유리를 들어 올리고 조심스럽게 그 세트들을 꺼냈다. 다행히 찻잔 두 점과 큰 찻주전자가 전부다. 약혼자는 눈썹을 내리깔며 신중히 찻잔을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어쩌면 찻잔에 흔적이 좀 남았을 수도 있겠군요. 변색된 티스푼하고 비교해보면 의미 있는 결과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오늘 중에 전문가에게 보내 확인해 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저야 상관없지만요. 찻잔이 없어지면 바로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약혼자는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씩 웃었다. 워후, 그 얼굴은 또 색다른 매력이 있네요.

“아침 일찍 차가 마시고 싶어서 약혼자에게 부탁하셨는데, 부주의한 제가 깨트렸다고 하시면 되겠지요.”

“네? 그건 좀......”

“전 괜찮으니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뒷목을 쓰다듬으며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그럼 그냥 둘이 같이 마시다가 깼다고 둘러대 볼게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별 말씀을.”

약혼자는 내 얼굴을 빤히 보는 것 같더니, 곧 찻잔을 자기 방에 두고 오겠다며 잠시 부엌을 나갔다. 나는 자꾸 찻잔이 잔뜩 진열된 유리장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을 애써 원위치 시키며, 부엌을 매의 눈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음, 이건 냉장고인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둔탁하지만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는 그 장치를 열어보았다. 냉장고는 맞는지 냉기가 훅 끼쳤지만,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흔한 양념이나 절임도 보이지 않아서 놀라울 따름이다. 안 쓰는 것이라고 하기는 너무 멀쩡하고 안에 먼지 한 톨 없다.

그럼 설마 매일 필요한 양만 딱 주문해서 쓰고 나머지는 폐기해버리는 건가?

“그 정도면 치킨 시켜서 바삭한 껍질만 떼먹고 살은 버리는 수준의 사치다......”

나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며 찬장과 다른 곳도 열심히 열어보았다. 대부분은 조리도구가 차있었고, 온갖 향신료들이 담긴 보관함만 하나 발견했다. 그것마저도 오래된 것은 없는지, 꽉 찬 주머니들이 새거나 빠져나온 것 없이 단단히 새것처럼 봉해져 있었다.

하지만 몇 군데는 살펴볼 만했다. 가령 유리장 옆의 서랍장에는 각종 찻잎통이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혹시 이 중에 독이 든 것도 있을까? 살펴보고 싶어도 이 몸이 어떤 차를 주로 마셔 온 건지 몰라서 문제다. 솔직히 나한테는 여기서 타주는 차는 다 똑같이 향긋하고 고소할 뿐이다. 그저 믹스커피와 티백 녹차만 마셔온 입맛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뭐, 대놓고 찻잎에 독을 남겨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우선 대충 종류만 눈에 넣어두자. 나는 로고나 브랜드명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서랍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피로해져서 시선을 구석으로 돌렸을 때, 아까는 보지 못했던 것을 발견했다.

“액자?”

검은색 액자 같은 것이 창문 옆 구석에 세워져있었다. 그림자에 가려져 절묘하게 음영이 없어진 그 물체는, 솔직히 시선을 정확히 두기 전까지는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존재감이 흐릿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나는 내가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이잖아?”

그렇다. 그것은 검은색의 작은 문이었다. 이 집의 평범한 문들보다는 아담한 크기가 마치 창고로 통하는 외진 쪽문을 연상하게 했다.

숨겨진 작은 문이라니. 완전히 모험심을 자극하는 그 모습에 나는 두근거리며 문을 열었다. 문은 기름칠이 잘 되어있는지 아주 부드럽게 안쪽으로 열렸다. 그리고 작은 공간이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방바닥에 가득 놓인 의자들이었다. 모양도 색도 제각각이라 통일성은 없었지만, 동그랗게 원형을 그리며 서로 마주보고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예상외의 것들도 즐비했다.

“사진?”

벽면 가득 여러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대부분은 흑백사진이었고, 색 있는 사진들은 별로 없을뿐더러 몇 개는 자세히 보니 초상화였다. 나는 교복을 입은 학생의 초상화를 확인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그러다 낯익은 문양의 근무복을 입은 흑백의 단체 사진이 발견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분들이 입는 근무복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위생적으로 보이는 차림새였다.

“아하, 알겠다.”

여기 사진들, 부엌에서 일하는 분들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의자도 그렇고, 여기는 아마 일하시는 분들의 사적인 휴식공간인가 보다. 그래서 이렇게 사진도 막 붙여놓은 걸까? 마음이 푸근해진다.

그렇게 보니 사진들이 다 무표정한 것도 익살 맞았다. 옛날 사람들이 사진 찍을 때 그 특유의 무표정 같아서 좀 귀엽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액자 하나하나를 살펴보다가, 문득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것을 깨닫고 굳었다.

이거 꼭 알바생 고용한 사장님이 알바생 비공개 SNS 염탐하는 것 같은 행동 아닌가? 이러다 들키면 마치 알바생이 남자친구하고 여행 갔다 온 사진에 실수로 좋아요를 누른 것 같은 소름끼치는 행위가 될 수도......

“히익.”

안 돼! 나는 스스슥 뒷걸음질 쳐서 검은 문 밖으로 나왔다.

휴, 금방 깨달아서 다행이었지. 식은땀 난 거 아니야? 문을 닫고 마치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서랍장 앞으로 복귀하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약혼자의 잘생긴 얼굴이 나를 반겼다. 약혼자는 내 엉거주춤한 동작을 보았는지, 의아한 표정이다.

“로제?”

“아, 저기 문이 있어서 그쪽을 좀...”

약혼자는 의아한 표정 그대로 내 손이 가리키는 쪽을 유심히 보더니,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저건 문이 아니라 액자 같군요. 그림자 때문에 착시현상이 생긴 겁니다.”

“네?”

아, 그게 사실 액자처럼 보이는 검은 문...까지 말하려던 나는, 곧 일하는 분들의 저런 사적인 휴식공간을 굳이 있다고 말해서 또 들어가볼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에도 아무 수상한 건 없었고 그냥 액자와 의자만 늘어놓은 방일 뿐이었으니까. 저 안에는 독살 시도 증거품 같은 걸 숨길 공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그런가 보네요. 그럼 다음 방으로 가볼까요?”

“아, 저는 우선 이걸 우편으로 부치고 다시 오겠습니다. 생각해보니 사용인들이 없는 지금이 부치기 적절한 시점인 것 같아 굳이 미룰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어, 그러고 보니 약혼자의 손에 갈색 봉투가 들려있었다. 크기를 보아 찻잔을 포장한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전 이 주변을 좀 돌아보고 있을게요.”

“알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시고, 1층을 다 돌아보시면 현관에서 절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럼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약혼자는 미소와 함께 현관으로 나갔고, 나는 짧은 배웅을 끝내고 1층 탐색으로 복귀했다. 보자, 약혼자가 다녀오는데 30분정도 걸린다고 치면...... 1층 정도야 가뿐히 끝낼 수 있겠어. 나는 주먹을 쥐고 빠른 속도로 나머지 문들을 열어보기 시작했다.

달칵. 여긴 손님방. 여기도 손님방. 아, 여기는 작은 서재구나. 달칵. ...아니 이 방은 웬 하프가 있지? 구석에 피아노도 있는 걸 보니, 아마 예전에 이 몸이 교습이라도 받았던 모양이다. 자, 그 다음 방은... 여기도 손님방이구만.

대충 1층을 돌아보자 대충 감이 잡혔다. 1층은 식당하고 부엌을 제외하면 주로 손님방이나 교습용 방처럼, 외부사람들을 초대할만한 곳으로 구성되어있었다. 말인 즉 저택에 살던 사람들의 흔적은 별로 없어서 특별히 볼 게 없었다는 말이다.

가끔 부엌에서 봤던 것처럼 검은 문들을 방안에서 보긴 했지만, 슬쩍 열어봐도 비슷하게 액자와 의자가 가득한 일하는 분들 휴식용 공간 같았다. 그래서 두 세번 이후에는 굳이 건들지 않았다.

“결국 여기뿐인가.”

나는 낡은 나무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부엌 쪽 복도 중간에서 다시 돌아 계단 구석으로 간다는 복잡한 동선을 거처야 겨우 볼 수 있는 이 문은 누가 봐도 창고로 이어지는 것처럼 볼품없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창고라면 왠지 그런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이 몸 주인이 어릴 때 썼던 낡은 일기장을 발견한다든가, 이 집안에 엮인 출생의 비밀을 암시하는 문서가 슬쩍 끼워져 있다든가!

역시 답은 창고군. 나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나무문을 호기롭게 열어 재꼈다. 서늘하고 약간 텁텁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열린 문 뒤에서 들어오는 빛에 문 안이 보였다. 계단이었다.

“워후.”

이거 점점 흥미로워 지는데? 창고가 지하에 있나보다. 이러면 왠지 더 비밀스러운 무언가가 있을 것 같잖아!

나는 신이 나서 손님방에서 랜턴을 하나 찾아든 뒤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물론 지하에 갇힌다는 클리셰는 재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문은 활짝 열어둔 채였다.

예상대로 그렇게 깊진 않은 지점에서 계단이 끝났다. 나는 그대로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창고가 펼쳐질 것을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단정히 정리된 지하실의 모습에 약간 실망했다. 나무통과 서랍장 몇 개를 제외하면 주로 와인이 담긴 나무 선반들이 줄지어 서있다. 아마 와인저장고로 쓰고 있는가보다. 서늘한 게 딱 맞는 용도긴 하다.

나는 의미 없이 와인 몇 가지를 이리저리 살펴봤지만, 별 건 없었다. 나무통은 비어있었고, 서랍장 안도 와인목록이 기록된 장부가 방치되어있을 뿐이었다.

에이, 김새는 군. 나는 입맛을 다시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제? 로제!?”

“아, 무어 경! 이 밑이에요!”

나는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목청껏 대답해줬다. 그러자 곧 무서운 속도로 계단을 내려온 약혼자의 모습이 보였다.

와, 30분도 안 걸린 것 같은데, 어젯밤에도 그랬지만 정말 발이 엄청 빠른가 보다. 하지만 내 태평한 생각과는 다르게, 약혼자는 이유모를 조급함에 시달리는 것 같았다.

“왜 여기 들어온 겁니까?!”

“네? 그냥 1층 둘러보는 김에 한 번 들어와 본 건데요. 계단이 있길래 혹시 해서 문도 활짝 열어놨죠.”

내 논리적인 대답에 약혼자가 미소 지었다.

“그렇군요. 다 보셨으면 이제 나가죠. 공기가 찹니다. 다른 곳도 둘러보려면 시간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그럼 와인 한 병 챙겨서......”

“여기 있는 와인은 그다지 질이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제가 한 병 주문해드리겠습니다.”

“......뭐, 그래요.”

나야 좋지 뭐. 나는 뛰지 않고 나올 수 있는 가장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약혼자에게 들려가듯 창고를 빠져나가며 짐작했다. 혹시 쟤 폐소 공포증이라도 있나?

※※※

근무수칙

10. 이 저택에는 검은 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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