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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오빠가 뛰쳐나간 뒤, 나와 약혼자는 응접실로 이동해서 식사를 계속했다. 의붓오빠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지만 이 판에 약혼자를 두고 가면 정말 호감도가 떡락할 것 같아서 조금 후에 방문하기로 했다.
그리고 약혼자가 조달해온 팬케이크는 맛있었지만 솔직히 체할 것 같다. 약혼자가 끝없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주로 이런 식이었다.
“로제, 특별히 선호하는 맛이 있습니까?”
당근 빼고 다 좋아한다고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선호하는 색은?”
빨간색이라고 대답했다. 순전히 맛 다음에 질문해서 몇 년 전 여름 히트곡이 떠오른 탓이었다.
“예. 혹시 언제부터 붉은 색을 선호하셨습니까?”
글쎄요. 아마 제가 이 몸에 빙의한 열흘 전부터 아닐까요?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서 대충 잘 모르겠고 어느 순간부터 그랬다고 대답했다. 약혼자는 연신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도 끝없는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꽃, 좋아하는 시간대, 싫어하는 장소, 싫어하는......
처음에는 친밀도의 표시인 줄 알았지만 이쯤 되면 심리가 털리는 기분이다. 무슨 심리 검사라도 하는 줄 알았네. 원래라면 나도 같이 호구 조사를 해줘서 상쇄시켰겠지만 약병 생각에 찔려서 그냥 상세하게 대답해줬다. 이걸로 호감도를 좀 복구시켜줘라.
“제게 궁금하신 점은 없으십니까?”
기어코 저 질문까지 나오고 말았구나. 나는 찻잔을 들어 입을 가리며(찻잔과 차도 약혼자가 공수해왔다.) 표정의 동요를 숨겼다. 여기서 없어요라고 대답해도 오답이고 있는 대로 물어봐도 망한다.
좋아! 다년간의 간접 경험으로 볼 때 여기서 정답은 이거다!
“제가 여기 정원이 아름다운 비법을 알아왔는데, 혹시 들어보실 생각 있으신지 궁금하네요!”
크으. 좋아. 약혼자의 흥미와 지난 화제까지 겸비한 센스 있는 대답이었다.
“......”
그런데 왜 반응이 늦니 약혼자야. 왜 대답이 없어.
“어떻게 아셨지요?”
“정원사를 만났거든요. 물어보니까 대답해주던데요?”
“언제 만났습니까.”
심문하냐? 나는 떫은 표정이 되려는 것을 참고 대답해줬다. 네 얼굴에 감사해라 약혼자야.
“어제 밤에 정원에서요. 부엌에 가려다 길을 잃었는데 운 좋게 만났거든요.”
“그렇군요.”
약혼자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한 것 같았다.
“그래도 한밤중에 정원에 나오는 것은 좀 위험할 것 같습니다. 혹시 밤에 급하게 하셔야할 일이 있다면 사용인을 호출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앞으로는 그러죠 뭐.”
야밤에 호출이라니 그 다음날 점심식사 반찬으로 내 욕이 올라올 것 같은 느낌인데요. 나는 걱정하는 말로 알아듣고 적당히 긍정했다. 보고 상황 되면 부르고, 안 되면 알아서 판단해보는 거지 뭐.
근데 정말 정원 가꾸는 비법은 안 들을 거야? 또 물어보는 건 좀 구질구질할 것 같아서 약혼자가 다시 물어보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약혼자는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곧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저는 업무를 위해 제 방으로 잠시 돌아가 있겠습니다. 점심 때 뵙죠.”
“예예.”
그러고 보니 세끼 다 약혼자가 공수해 온다는 건 하루 세 번 꼬박꼬박 약혼자 만난다는 거구나. 저 얼굴을 하루 세 번 볼 수 있다니 그저 개이득이다. 나는 내적 주먹을 불끈 쥐며 겉으로는 사려 깊게 되물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니에요? 이 저택에서 업무도 보시고 제 일도 도와주시고 있잖아요.”
“아, 그 건은 괜찮습니다.”
약혼자가 문고리를 잡다말고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부신 눈웃음이었다.
“저는 언제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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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렇게 열심히 찾으시는지?”
“허억!”
제릴은 잡고 있던 책 더미를 놓쳤다. 카펫 위로 책 모서리들이 부딪치며 둔탁한 소리가 서재를 울렸다.
본인을 ‘무어 경’이라고 자칭한 남자는 서재 문 앞에 서있었다. 그림처럼 완벽한 미소가 얼굴에 달려있다.
소년은 새하얗게 질려서 남자를 피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려했다. 하지만 주머니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로제의 크리스털 약병이었다.
소년은 그 가벼운 부딪힘에 모종의 힘이라도 얻은 것처럼 불쑥 남자를 노려보았다. 명화처럼 아름다운 남자는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묻고 있잖습니까, 뭘 그렇게 열심히 찾는지.”
“......허튼 짓하면 겨, 경관들을 부르겠어.”
“하하,”
남자는 웃음을 터트렸다. 소년은 긴장감으로 가득 찬 채, 서재 한편에 설치된 전화기를 힐끔거렸다. 언제든지 달려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무언의 시위였다.
무어 경은 웃음을 멈췄다.
“귀머거린가?”
무어 경은 제릴 자우어가 서있는 책장으로 이동했다. 발아래 널린 서류와 책이 마치 그곳에 없는 것처럼 짓밟으며, 마치 대로를 걷듯 거침없는 걸음이었다.
그리고 제릴과 눈을 마주쳤다.
“해봐. 전화.”
남자는 마치 눈꺼풀 없는 뱀처럼 소년을 빤히 쳐다보았다.
“네 어머니를 먼저 손발을 잘라 감옥에 처넣어 주마.”
소년은 굳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하나뿐인 아들도 길바닥을 기어 다니게 해주지.”
남자는 활짝 웃었다. 보석처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참, 아드님이 아니라 큰 따님이신가요?”
마담 자우어의 아들은 대꾸할 수 없었다.
무어 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자신의 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소년은 마치 남자가 총이라도 꺼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는 그런 소년에게 비웃음도 가치 없다는 듯, 반응 없이 그것을 툭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
“안 주워? 찾던 거 아니십니까?”
소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의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빛바랜 종이 한 페이지가 말린 그 두루마리는 소년이 찾던 것에 일부였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결국 소년은 토해내듯 말을 뱉었다.
“훔쳐간 나머지는, 나머지 내용은 어떻게 한 거야!”
“선물로 줬답니다.”
로제의 약혼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훔친 건 내가 아니라 네 멍청한 어머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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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다.”
나는 서재 소파에 대자로 뻗어 중얼거렸다. 산책도 거절하고 누워서 세월을 잉여하게 때우는 중이다. 아까 아침식사가 끝나고 결국 사진기도 주문해서 쇼핑욕구도 그다지 안 생긴다. 이 모습을 일하는 분들이 보신다면 기겁하시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 분들이 서재에 오시는 시간대가 아니다.
나는 치마를 팡팡 차며 멍 때리다가, 부스스한 몰골로 중얼거렸다.
“뭐 소설이라도 볼까.”
솔직히 여기가 로판 속인 걸 안 뒤로 이 동네 연애소설들이 좀 심심하게 느껴져서 안 땡기긴 한다.
그러면 대충 아무 생각 없이 볼 만한... 흠, 역시 동화책인가. 이쪽 동화책을 읽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아침에 ‘정원사 장미요정설’이 조금 더 유력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아침식사 후 약혼자가 나가자마자 응접실로 집사 분을 불렀다. 사진기 이야기하면서 덤으로, 혹시 야간 근무하는 소년 정원사의 처우가 어떠냐고 살짝 운을 떼자 집사 분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이다.
“정원사들이야 있지요. 하지만 이른 아침에만 일한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린 정원사는 고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군요.”
설마 무단 작업이었냐!
어쩐지 이상하다했지. 이게 무슨 야밤에 굴다리에서 그래피티하는 것도 아니고 뭔 일이래. 다음에 만나면 한 소리 해주고 타일러서 돌려보내든가 사정 봐서 고용하자고 말해보든가 해야겠다. 아무리 그래도 야밤에 애가 작업하는 걸 허가해준 게 너무 괴상하다 했어.
헛, 잠깐. 근데 평범한 소년이 야밤에 남에 집 정원에서 허가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역시 요정이라서 특수능력으로 안 잡히고 있던 건가? 나는 로판 주인공이라 운 좋게 만난 거고!
나는 그건 제법 그럴싸한 추측이었다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화책을 뽑아들었다. 요정이 나오는 동화책을 좀 읽어두면 정원사 호감도 힌트 같은 게 전개상 나오지 않을까하는 기대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렇게 대여섯 권을 들어서 책상에 옮기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첫 번째 동화책에 손을 뻗는데, 내가 가져오지 않은 책이 동화책 옆에 놓여있는 것을 봤다.
“어?”
뭐지. 원래 책상 위에 있던 책인가 보다. 동화책 두 권정도 두께의 그 책은 가죽 양장본이었다. 오래된 가죽인지 다 닳아서 반질반질하다.
원래 로판에서 이렇게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책은 막 조상이 남긴 마법이나 잊힌 광산 문서 같은 게 적혀있던데. 나는 신이 나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민둥한 책등과는 달리, 앞면에는 강렬한 검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옛 영주들.’
오오, 오래된 땅 문서 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