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16화 (16/57)

<-- -->

땅 문서 좋지. 역시 부동산만큼 좋은 자산도 드물단 말이야. 책 제목이 ‘옛 영주들.’이라면 이 지방의 옛날 영주들이 비자금으로 빼돌린 부동산이 내용에 암시되어있을 수도 있다. 나는 기대에 차서 책장을 넘겼다. 날카롭고 화려한 손 글씨가 눈에 먼저 들어왔다.

첫 장은 이렇게 시작했다.

-현재를 담보로 잡지 말고 지금이라도 책을 덮어라.

대놓고 협박조였다. 어마어마한 권력자가 쓴 게 틀림없다. 이거 하인이 실수로 정리하다 책을 보거나 해서 자기 비자금 소재 들킬까봐 일단 첫 장부터 경고문으로 지른 거 아닌가? 나는 팝콘을 씹는 기분으로 다음 장으로 넘겼다.

-옛 영주들. 우리는 그렇게 부르곤 했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끔찍함이 상식과 윤리의 기준을 뭉개며 흔적처럼 아직도 우리의 공동체에 불문율로, 의식으로 남아있는 것을 느낄 때마다 나는 어쩌면 인간문명의 무용함을 체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경악했다.

이거, 이건......

사상계몽용 수필이잖아. 나는 금방이라도 ‘옛 체제의 불합리함을 지우고 우리의 가치기준을 새롭게 새울 시간이 다가온다. 인민을 위한!’ 같은 문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동공지진 했다.

이, 이거 꼭 전공수업 중에 맨날 미달 나는 강의에서 다룰법한 글이다. 반쯤 졸면서 들은 온갖 노어노문 강의들을 떠올리며 나는 휙휙 책장을 넘겼다.

빼곡히 적힌 글들에 언 듯 보기에도 과거의 나쁜 관습과 괴물로 비유한 과거 통치자들의 야만적이고 비상식적인 사례가 가득했다. 나는 통치자를 굳이 녹아내리는 거대 오징어로 삽화 편찬한 저자의 집념에 식은땀을 흘렸다. 정말 엄청나게 신념어린 사람이었나 보다.

왜 책 앞에 경고문이 붙어있는지 알겠다. 이곳의 시대상으로 미뤄볼 때 아마 이 책은 불순사상 서적으로 찍혀서 금지도서가 된 책일 것이다. 책 소유주가 읽으려는 사람의 안위를 생각해 덧붙여 적어놓은 것이 틀림없다. 다시 확인해보니 책 내용의 필체와 경고문 필체도 다르네.

나는 이걸 제대로 읽어볼 필요가 있을까 고민하면서 대충 페이지를 술술 넘기다가, 책의 몇 장은 찢어져있기까지 한 것을 발견했다.

와 이렇게까지 또 물리적으로 검열해 놓다니, 이게 핵심내용이었나 보다. 혹시 해서 앞장 내용을 살짝 읽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서우리만치 비장한 내용이다.

-잊기도 기억하기도 너무나 궤괴한 그곳의 옛 영주 때문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버릇과 관습에만 남은 공포가 아직도 인근을 떠도는 곳이다. 베른.

헛, 베른은 이 저택이 있는 동네 이름이잖아.

음, 아마 이 다음 장은 이 지역의 옛날 통치자를 고발하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이라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어서 뜯어낸 모양이다. 아니면 더 비밀스러운 장소에 따로 보관 중인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절대 비밀 땅문서 힌트 따위가 있을 것 같은 책은 아니다. 비밀 땅문서의 존재를 신랄하게 비난한다면 모를까.

그, 그렇지. 사실 비자금 조성은 나쁜 게 맞아. 나는 현대인의 가치관에서 오는 양심 통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아무튼 이 세상과 관련해서 이런 글을 읽기에는 좀 이른 타이밍에 책을 발견해버린 것 같다. 내 안의 빙의 감성이 부서진 느낌이야.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책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책을 내려놓으면서 생긴 진동으로 책장이 팔락팔락 몇 장 더 넘어갔다.

또 찢어진 페이지가 있었다. 아까 본 것이 깔끔하게 페이지를 찢어낸 느낌이었다면, 이쪽은 마치 주먹으로 페이지를 우그러트려서 갈기갈기 찢은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페이지 끝단에는 아직 알아볼만한 단어들이 몇 개 보였는데, 익숙한 단어에 나는 그만 기겁해버렸다.

-무어 가문의 악랄함은...

네? 무어 가문?

“......”

약혼자 성이 ‘무어’였지? 그래서 무어 경이라고 부르는 거지? 나는 찢어진 페이지를 들춰봤지만 두세 장이 한꺼번에 뜯겨 내용이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침을 삼키며 책을 덮었다.

약혼자가, 무슨 대지주 가문의 상속자라고 했었지. 옛날에 저 가문이 영주가문이었던 거 아니야?

그렇다면 약혼자의 가문은...... 마치 조선시대의 세도가처럼 수탈을 일삼으며 악랄하게 대지주 집안이 됐나보다......

아마 이 책의 소유자는 이 몸이 무어가문 후계자와 약혼한 뒤, 그런 사실이 수록된 책을 소장 중인 걸 들킬까봐 황급히 없앴을 것이다. 나는 어쩐지 강렬한 현타를 느끼며 책을 서랍에 넣었다.

얼굴천재 약혼자는...... 사실 사람들을 핍박해서 모은 돈으로 관리를 받아서 그렇게 얼굴이 반짝반짝한 건지도 모른다......

그, 그만 생각하자. 동화책, 동화책이나 읽는 거야.

나는 그 후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내내 동화책을 읽었다.

그러나 미취학 아동용 그림책은 내 타격 입은 멘탈을 회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의 사고는 맹렬히 현대 윤리관에 맞추어 돌아가며, 심지어 요정이 숨어살면 주민등록도 안 되어있고 세금도 안 낼 텐데 괜찮은가 하는 생각따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점심시간에도 퀭한 눈으로 약혼자와 마주보게 된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약혼자는 당황한 것 같았다. 왠지 의기양양한 태도로 커다란 흰색 종이봉투를 들고 있던 그 미남은 내가 응접실에 들어오자 왠지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었다. 눈뿐만 아니라 내 몰골자체가 눈에 띄게 퀭해 게 분명하다.

“안색이 굉장히 창백하십니다.”

약혼자는 내가 테이블 앞에 앉자마자 장갑 낀 손을 뻗어 내 손등을 잡았다. 이걸로 한 세 번째인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다지 감흥이 없긴 개뿔 진짜 저 얼굴은 정말 너무 대단하다.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그래 저 얼굴은 타고난 거야. 아무리 돈을 처발라도 만들 수 없을 거야.

게다가 그 책 내용을 꼭 다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 어쩌면 저 내용으로 갈등이 일어나서 서로 오해가 생기고 고구마 처먹는 전개로 이어지라고 놔둔 걸 수도 있어.

나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손 사레 쳤다.

“괜찮아요. 그게 뭐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뭘 바꿀 수 없다는 말씀이신지?”

“아니 뭐 사람이 부모님을 고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으억!”

마지막 소리는 절대 고의로 낸 소리는 아니다. 단지 약혼자가 내 손등을 덮고 있던 손에 힘을 주는 바람에 놀랐던 것이다. 스킵쉽의 농도가 갑자기 진해졌어!

하지만 약혼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땠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안 아팠어요.”

“......”

아니 정말 안 아파서 괜찮다고 한 거야. 나는 고통으로 빈말 안 한다. 아프면 벌써 진단서 끊어서 합의금 조정을 신청했을 거라고. 몹시 믿음직한 표정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렸지만 약혼자는 여전히 별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정말 안 아팠다니까요. 그것보다 그 흰 봉투는 뭔가요? 점심?”

“......예. 근방에서 가장 포장하기 좋은 집이라고 하더군요.”

약혼자가 좀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아니 왜 사과를 하고 본인이 새치름해지고 그러세요? 에이, 그래. 일단 먹고 생각하자.

그리고 약혼자가 봉투를 뜯는 것을 보며 하마터면 개강 총회에서 잔 돌릴 때처럼 환호할 뻔 했다.

대박, 버터양념 발라서 오븐에 구운 닭인 것 같아! 그것도 1인 1닭이야!

“와, 맛있어 보이네요! 정말 감사해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나는 즉시 닭을 해체해서 냠냠 먹기 시작했다. 약간 식긴 했지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것이 버터가 스며들었는지 아주 풍미가 농후하고 자극적인 맛이었다.

식사를 하며 더더욱 마음에 여유가 생겨 슬그머니 이런 것도 물어볼게 됐다.

“무어 경, 하신다는 사업 말인데요. 혹시 부모님께 물려받으신 건가요?”

안 그래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던 약혼자가 포크를 내려놓더니 피식 웃었다.

“아뇨. 먼 친인척의 초기사업을 제가 인수해서 하고 있는 겁니다.”

오 그렇구나. 현재 재산 축적에 도덕적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성큼 물러난다.

“괜찮게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로제 양께서 지금처럼 편안하게 지내실 만큼의 금전사정은 꾸준히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약혼자로서의 자신감 넘치는 다정한 말이었지만 나는 갑자기 훅 나간 진도에 닭고기가 목에 걸릴 뻔했다. 그 와중에도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로제, 그런 의미에서 성인이 되실 때까지 제 본가에서 지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분명 지내시는데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독살 문제도 그렇고, 이 저택은 이제 지내시기에 그다지 안전한 곳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재산은 반년 후 성인이 되시면 법적 절차를 통해 상속하시면 되니까요.”

“......음.”

그렇군. 전 대사는 이 제안을 위한 밑밥이었구나. 나는 괜히 나 혼자 수긍하며 약혼자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명쾌하게 답을 내렸다.

“좋은 생각인 것 같아요!”

약혼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지요?”

“네. 근데 일단 제릴 언니한테 독살시도 관련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구요.”

의붓오빠도 아침에 약혼자 때문에 놀란 심정이 이젠 좀 진정됐을 것이다. 여차하면 선셋까지 불러놓고 삼자대면으로 독살시도에 대해서 좀 이야기해봐야겠어. 이걸 마무리 짓지 않으면 서사적으로 봤을 때 또 어떤 전개로 툭 튀어나올지 모른단 말이다.

게다가 이 로판은 공략물인 것 같으니 되도록 이 집안의 갈등을 풀고 여기서 해결을 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래도 잘 안 되면 어쩔 수 없이 강경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경찰에 신고하고 튀어야지! 제일 소중한 건 내 목숨이니까!

“......그렇군요! 뜻대로 하시길 바랍니다.”

약혼자는 빙그레 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