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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17화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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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식사가 끝나자마자 일하는 분들이 또 산책을 권유했다. 하지만 오늘같이 쨍쨍한 날 이 시간대의 산책은 너무 더울 것 같아서 슬그머니 또 미뤘다.

대신 의붓오빠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우선 지난번에 마주쳤던 어머니의 서재로 가보자.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돌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노크 후 충분히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저기요?”

대답이 없다. 그냥 안에 없나보다. 살짝 문을 열어보려했는데, 아예 잠겨있다.

“흠.”

아마 양어머니의 업무공간이라서 평소에는 잠겨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의붓오빠가 서재를 쓰느라 열어뒀던 거지. 혹시 모르니까 나도 열쇠를 달라고 해봐야겠어. 이런 게 의외로 나중에 결정적인 아이템이 될 수도 있다.

서재에 없다면 본인방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겠지?

“제릴 아가씨께서는 잠시 외출 중이십니다. 급한 일이시면 그쪽으로 전갈을 보낼까요?”

“아니...... 괜찮아.”

만남 이벤트가 실패했다. 나는 아련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그렇지..... 지난번에도 아침에 밖에 나가려다가 마주쳤었지? 이 몸은 병약해서 잘 안 한다 쳐도 보통 사람이 집밖으로 외출도 하고 그러는 게 당연하다.

그때 이복오빠가 로브 같은 걸로 친친 싸매고 있어서 몰래 나가는 건 줄 알았는데 일하는 분 대답을 들으니 적어도 이번 외출은 다들 아는 일정인가 보다. 좀 궁금해지는데?

“근데 왜 외출한 건지 알아?”

“의상실에 들리시는 걸로 저희는 전달받았습니다.”

그, 그렇구나. 아마 즐겨가는... 즐겨가는 의상실이 있나보다. 나는 애써 머리에 떠오르는 편견을 지우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정이 있어서 여장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굳이 의상실 직원을 안 부르고 본인이 찾아가기까지 하는 열정을 보면 덕질이 맞나봐. 그래 자기가 원하는 거 입고 사는 거지 뭐.

그러고 보니 나도 이 동네가 어떤지 궁금해진다. 나가볼까?

“아, 그럼 나도 외출할래.”

“예? ...저, 아가씨. 마담 자우어께서 되도록 요양을 권유하셨습니다만......”

“아니 뭐 멀리가는 것도 아니고 근처에 잠깐 구경 좀 하려는 거야.”

나는 매끄러운 전개를 위해 되도록 일하는 분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만일 이 몸이 이 집에서 홀대받는 위치였으면 여기서 ‘나는 고용인이고, 너는 사용인이야.’ 클리셰를 컨닝했겠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꿀 빨고 지냈는데 그러기는 좀...

결국 내 ‘바깥바람을 적당히 쐐야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어르신 민간요법 설득에 일하는 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차와 운전기사를 대기시키겠습니다. 방문지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나는 근엄하게 대답했다.

“이 근방 30분 거리 내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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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방금 들은 소리는 내 ‘나가서 비싼 밥을 사겠습니다. 찡긋’에 대한 약혼자의 반응이다.

나는 일하는 분이 준비해주신 외출복을 한껏 빼입은 상태다. 약혼자는 마치 처음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족외식을 하는 80년대 젊은 부부처럼 힘줘서 착장을 갖춰 입은 나를 확인하더니 오묘한 표정이 됐다.

“......제가 드리는 요리가 입맛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지금 쟤 표정이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잘 먹던데’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아뇨, 그냥 갑자기 외출하고 싶어져서요. 요 근래 너무 집에만 있었거든요.”

“예......”

약혼자는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지만, 곧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제가 환복하고 나올 시간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저도 저녁을 나가서 함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약혼자는 깔끔한 정장차림이었다. 지금도 충분히 외출하기에 문제없을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내 외출복하고 좀 화려함의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얼굴이 워낙 화려해서 방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네. 나는 오늘도 흐뭇한 그 얼굴을 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좀 느지막한 오후에 정원을 지나 정문 앞에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가게 됐다.

길쭉한 모양새의 남색 승용차는 흑백영화에서 스치듯 본 것처럼 고전적으로 생겼었는데, 몹시 비싸보였지만 승차감이 대단히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시대적 한계를 자본으로 메꾸는 수준으로 널찍하고 편안해서 나는 내적 건배를 했다. 역시 돈이 최고야. 늘 짜릿해.

“식사 후에 들리거나 보고 싶은 곳이 있으십니까?”

“추천해주시는 곳이 있나요?”

약혼자가 내 쪽을 힐끗 보았다. 본인이 직접 운전하겠다면서 굳이 운전기사를 돌려보낸 그 사람은 정말로 흔쾌히 운전 중이었다. 제법 운전을 오래했는지, 나와 대화하면서도 손은 그대로 능숙하게 핸들을 조정하고 있다.

“그럼요. 재밌을 겁니다.”

그 눈이 그동안 본 적 없던 장난기로 반짝였다. 평소보다 격식 있게 차려입었지만 장갑은 바뀌지 않은 게 또 은근한 귀여움이 느껴지는구나.

크, 이러면 소년미가 넘치는군. 절경이네요. 장관이고요.

“예약하신 레스토랑은 번화가 중심부에 있습니다. 지금 시간대라면... 약간 길이 막힐 수도 있겠군요. 가는 중에 불편해지시면 꼭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괜찮아요, 괜찮아.”

그래봤자 30분일 텐데 뭘요. 서울 외곽에서 경기도로 빠져나가는 러시아워를 겪고 나면 모든 종류의 교통체증에 면역이 생긴다. 나는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약혼자는 본인 차가 아니라 평소와 차종이 다를 텐데도 운전이 편안해보였다.

이윽고 차량이 시가지에 들어갔을 때, 나는 놀라서 몸을 일으킬 뻔했다.

시가지가 놀랍도록 화려했던 것이다.

아직 해가 제대로 지지 않아 주변이 밝은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곳곳에 등이 들어와 있었다. 온갖 건물에서 번쩍이는 간판불빛들이 요란했고, 그 불빛에 번들거리는 차들이 도로에 가득 차 있었다. 영업 중인 가게마다 재즈가 흘러나오고 길거리에는 화려하게 꾸민 사람들이 저마다 담배를 물고 팔짱을 낀 채 걸어가고 있다.

완전히... 생동감으로 가득 찬 근대 번화가였다.

물론 거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청소년들까지 담배피고 침 뱉는 등 공중도덕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온갖 모습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먼저 발전기, 급속성장기 특유의 발랄함과 희망이 가득했다. 사람들 마음의 여유가 느껴진 달까.

그리고 번개처럼 깨달음이 스쳐지나간다.

아니, 그럼 이 도심지 10분 거리에 그 큰 땅덩어리 차지하고 서있는 우리 저택은 도대체 얼마짜리인 거지?

이 몸은 도대체 얼마나 부자인거야?

“슈...슈퍼볼.”

“예?”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단지 로또정도가 아니라 미국 슈퍼볼 급의 복권이 맞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전율이 밀려올 지경이다. 하지만 여기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는 말일 테니 굳이 대답해주는 대신 고개만 저었다.

약혼자는 굳이 다시 되묻지는 않았다. 그 대신 이 번화가에 대해 느긋하게 설명했다.

“이 곳이 베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 중 하나죠. 로만타운이라는 별칭이 더 유명한 것 같더군요.”

“오오......”

내 감탄에 약혼자는 거리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다. 실은 머릿속에 땅값 계산으로 가득 차서 그걸 감탄한 거였어.

“로제 양께서는 병약, 네. 일신상의 문제로 그다지 이곳이 친숙하시지 않겠지요. 저희 본가로 오시면 더 크고 화려한 도심지도 자주 방문하실 수 있도록 특별히 더 신경 쓰겠습니다.”

“네. 좋죠.”

보자. 이 정도 재산이면 양어머니나 의붓오빠하고 나눠가져도 평생 놀고먹을 만큼은 나오겠다. 좋아. 혹시 약혼자 본가로 튀어서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 정도만 받으면 내 인생은 성공이다.

그 자본으로 무조건 부동산 투기해야지!

“아, 저기 레스토랑이 보이는 군요.”

약혼자가 황금빛 조명으로 번쩍거리는 하얀 건물을 가리켰다. 적당히 지저분하고 활기찬 이쪽 구역과는 달리 그쪽 거리는 육안으로 보기에도 더 우아하고 화려해보였다. 크, 저쪽이 더 가격대가 높은 상권이 형성돼 있나보다. 확 티가 나네.

그러고 보니 길거리 지나는 사람 몇몇이 이쪽 차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멈춰서기도 한다. 아마 이 차도 대단히 비싼 기종인가보다. SNS에서 온갖 명품 인증샷을 줄지어 올리는 사람들은 이 기분을 맛보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괜히 차문 열고 태워주겠다고 외치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싶은 기분이다.

물론 내가 그 정도로 관종은 아니었기 때문에 차는 문제없이 레스토랑을 향해 잘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화려한 하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자리가 괜찮군요.”

일하는 분들이 예약해주신 자리는 테라스가 딸린 독립된 창가 석이었다. 약혼자는 턱을 괴고 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고, 나는 일하는 분들께 이 영광을 돌렸다. 미남이 좋아합니다, 다 여러분 덕분이에요.

“참 매력적인 곳인 것 같아요, 활기차고 좋네요!”

“아, 이 로만타운 말입니까? 그렇죠. 모든 번화가가 가지는 매력을 이곳도 가지고 있죠.”

슬슬 해가 거의 저물어가는 도심의 야경을 보며 즐겁게 말하자 약혼자가 동의한다.

“하지만 그다지 특색이 있는 곳은 아닙니다. 석유 덕분에 갑작스럽게 떠오른 곳이니까요.”

“아하.”

대박 이 동네 석유 나오나보다. 적어도 50년은 안 망하겠어. 지금 여기선 석유가 신에너지원인 거 맞지? 와, 혹시 나 상속받는 거에 석유생산지는 없나? 속으로만 오두방정을 떠는데 약혼자가 차분하고 다정한 어투로 말을 잇는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대체될 수 없는 대단한 도시들이 다른 지역에 많이 있지요. 꼭 같이 방문하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죠!”

우리는 계속 담소를 나누면서 식사를 계속했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저택에서 나오는 요리보다 훨씬 맛있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워낙 좋아서 비싼 값은 충분히 했다.

“좋네.”

후식이 나오기 직전에 약혼자는 업무 관련 연락이 있다며 잠시 카운터로 내려갔다. 나는 후식과 미남을 기다리며 의자에 슬쩍 늘어져 있다.

홀에는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득했다. 홀 저 편에서 열정적으로 연주 중인 사람들에게 감탄하며 포만감에 행복해하고 있을 때였다.

웬 사람이 맞은편에 앉았다.

“아가씨, 고민 중인 표정인데요.”

처음에는 약혼자하고 체구가 비슷해서 언 듯 보고 약혼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보니 영 낯선 청년이었다.

얇은 코트를 걸친 체격 좋은 그 청년은 서글서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뚝뚝 떨어지는 강인한 얼굴선과 가르마를 타 정리했지만 다소 자유분방한 금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새파란 눈이 빛났다.

그리고 나는 알아차렸다.

저 대사, 저 등장 타이밍, 그리고 결정적으로 약혼자와 다른 타입으로 잘생긴 얼굴. 단언컨데 쟤가 이 로판의 서브남이다!

========== 작품 후기 ==========

아앗...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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