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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남. 그야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로맨스 장르의 꽃이다. 서사를 고조시키고 몰입도를 높이면서도 고구마는 피해갈 수 있는 드문 전개 요소 중에 하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독자들의 만족도를 높이지만 동시에 약도 없다는 서브병을 양산하기도 한다.
참고로 나는 한 번도 남주 주식이 종이쪼가리가 된 적이 없는, 백발백중의 메인남주 타율을 자랑한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블론드 미남은 내 취향하고는 조금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너무 머글 인싸처럼 보여.
“사실 나한테 능력이 하나 있거든요.”
“......”
“어떤 고민이든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떨떠름하게 쳐다보는데도 자연스런 말투와 표정으로 이런 플러팅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라니 오히려 내 쪽에서 식은땀이 날 것 같다.
저건 분명 자기가 잘생긴 걸 너무 잘 아는 놈이다. 아마 시간단위로 모임 약속을 잡는 타입일 거야.
“우선 아가씨의 고민이 뭔지 맞춰보죠.”
청년이 새파란 눈으로 내 쪽을 보며 과장스럽게 한 손을 자신의 턱밑에 댄다. 그리고 한 눈을 찡긋거렸다.
“후식이 늦어서 웨이터를 부를까말까 고민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이놈 뭐하는 놈이지? 날 너무 잘 아는데?
지금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꼭 내가 했을 것 같은 고민이다.
인싸들은 저런 것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한 눈에 보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
“맞죠?”
“아뇨.”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튼 틀린 건 틀린 거지. 얍, 퇴치 당해라 인싸야.
“후식코스를 둘 다 시킬까를 고민했는데요.”
“아.”
청년은 잠시 말이 없더니, 곧 웃음을 터트렸다. 민망한 기색도 없이 시원한 웃음이다.
“그래요? 미안합니다. 내가 헛발질했네요.”
그리고 5초 뒤, 직원이 테이블에 후식을 차려줬다. 커피와 초콜릿케이크,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다. 청년은 웨이터가 사라지자마자 양 손을 살짝 머리 옆에 들며 말했다.
“짜잔!”
그리고는 양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도 얼른 나오게 해봤습니다. 나쁠 건 없죠?”
박수라도 쳐주리?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때 돼서 후식 나온 것 같은데요.”
“아니죠.”
청년이 테이블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 비밀 이야기를 하듯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기 왼쪽에 있는 대로 젠체하는 남자 둘이 앉은 테이블 보입니까? 사실 이 접시는 그쪽에 먼저 서빙될 예정이었던 겁니다.”
“예?”
“근데 내가 약간 손을 써서... 이쪽에 먼저 오도록 만든 거죠.”
무슨 개소리야.
“난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약간, 다른 사람보다 융통성 있게 재미를 볼 수 있는 거죠.”
나는 공중도덕을 개무시하는 것을 로망으로 아는 이 시대의 아이콘 같은 블론드 미남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결론 내렸다. 얼른 내쫒자. 서브남 필요 없어.
하지만 청년이 먼저 말을 이었다.
“혹시 아가씨에게 다른 고민이 있다면 연락 줘요.”
그리고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내 쪽 접시 옆에 올렸다. 명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마이어 테일러 탐정 사무소
당신의 모든 고민을 해결해드립니다.
슈어타운 7-14 번지 / T. 143-451-865
미친 플로팅이 아니라 영업이었냐.
프리랜서의 영업 고충을 얼핏 느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약간 측은한 감정이 들어 명함을 챙겼다. 그래, 다들 먹고 살려고 노력하는구나. 나도 졸업하고 어디라도 인턴 직으로 입사했으면 실적 때문에 맨날 욕하면서 영업했을 거야.
“조사, 탐색, 뭐 가끔 일손이 필요할 때도 괜찮죠. 소정의 요금만 지불하면 됩니다.”
“네네.”
읊는 라인업을 듣고 있으니 중세 판타지 배경으로 따지자면 정보 길드 같은 느낌이다. 막 수도에서 제일 큰 정보 길드로 찾아간 주인공이 재치 있는 문답으로 마스터에게 감명을 주고 돈을 뿌리며 엄청난 의뢰를 하는 클리셰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구나.
물론 여기는 그냥 열심히 사는 프리랜서 같긴 한데, 오히려 괜찮다. 업체 스케일이 작은 건 일어날 사건도 별 거 아니라 그런 걸 거야. 그래도 예의상 한 번 물어봐주자.
“혼자 하는 거예요?”
“사무실에는 나 혼자죠.”
청년 탐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지만 여러 명이 처리해야할 일도 맡을 수 있습니다. 친구가 많다니까요.”
네 잘 알겠습니다. 인싸님...
“사실 돈 많은 친구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늘 생각했죠.”
탐정이 가볍게 윙크했다. 뭐야. 아, 나 말하는 건가? 맞다. 나 이제 금수저지!
“나 말하는 건가요?”
“그럼요.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목걸이를 하고 있잖아요? 알이 개당 5캐럿은 돼 보이는데... 어떻습니까? 맨션을 목에 걸고 다니는 기분은?”
하마터면 목이 부러져라 시선을 아래로 꺾을 뻔 했지만 가까스로 슬쩍 보는 정도로 참았다. 휴.
아무튼 청년탐정의 말투에는 비꼬거나 비아냥거리는 기색은 없고 순수한 감탄과 호기심만 있었다. 그래서 나도 순수하게 내 목걸이에 감탄할 수 있었다. 수정하고 섞은 줄 알았는데 이게 전부 다이아인가 보구나. 혹시 야반도주하게 되면 얘만 챙겨가도 살 곳은 구하겠군. 기억해둬야지.
“명함에 적혀있긴 하지만 이런 건 직접 듣는 게 또 의미가 있죠? 내 이름은 마이어 테일러입니다. 괜찮으면 내가 만나본 아가씨 중에 가장 부자인 것 같은 아가씨 이름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서늘한 목소리가 청년의 목소리를 뚝 잘랐다. 어느새 돌아온 약혼자가 빤히 청년탐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안 그렇습니까?”
약혼자가 빙그레 웃었다. 청년 탐정도 시원하게 웃는다.
“아가씨 일행입니까?”
“약혼자입니다.”
“아하.”
이게 바로 주인공을 사이에 둔 남주 후보들의 기 싸움인가?
약간 기대감을 가지고 둘을 쳐다보았으나 당연히 아니었다. 하긴 방금 처음 봤는데 그럴 리가 있나.
“아, 그쪽 자리에 앉아서 미안합니다. 워낙 약혼녀분이 재치 있으셔서 대화 좀 했죠.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청년 탐정은 쾌활하게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살짝 고개인사를 하는 척하더니, 약혼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웃으며 손으로 전화기 표시를 만들어보이고서야 계단으로 사라졌다. 투철한 영업정신이 아닐 수 없었다.
약혼자는 후식에 손도 대지 않고 옆으로 치우며 눈을 내리깔았다.
“생각보다 이 레스토랑의 손님 질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 불쾌한 소리를 하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입 떠먹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뇨 뭘 영업하려던 것 같았어요.”
“예?”
“돈이 많아보여서 말 걸었대요.”
약혼자는 좀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더니, 곧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직원을 불러서 자신의 후식을 치워달라고 부탁한 뒤 새롭게 시켰다. 크림타르트와 블랙커피였다.
“아,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
안 그래도 그것도 먹고 싶었는데 잘 됐다. 여기 후식 잘 하네. 후식 맛집이야.
“네... 모쪼록 만족하실 만큼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약혼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웃었다. 1인 1닭부터 짐작했지만 슬슬 내 식사량이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좋은 적응이구나.
그렇게 마무리가 만족스러웠던 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을 나왔을 때, 바깥은 거의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는 불빛으로 가득했고, 사람들은 아까보다 오히려 많아진 것 같다. 그리고 약혼자는 차를 몰아 그 거리에서 가장 번쩍거리고 사람이 몰린 건물로 이동했다. 뭐지? 실내 테마파크?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사람들이 입장을 위해 줄을 서있는 게 아니라, 건물 주변에서 건물을 힐끔거리며 구경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뭐하는 곳인지 짐작도 안 간다.
약혼자는 도착한 건물입구에서 직원에게 카드 같은 것을 내밀었다. 직원은 공손한 인사 후에 차를 통과시켜줬다.
“로제, 로고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엇.”
그러고 보니 정문에 달린 간판이 낯이 익다.
어엇, 이거 내 방에 쌓인 카탈로그 맨 앞에 있던 로고다!
“때로는 물건을 직접 구매하는 즐거움도 있죠.”
여기 백화점이구나!
“로제 양께서 자주 보시던 카탈로그가 생각나서 안내했습니다. 괜찮으신가요?”
“좋죠!”
와, 이런 세심한 고려라니. 역시 이쪽이 이 로판 메인 남주다. 절대 내 주식은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보는 카탈로그를 약혼자에게 말했던 적이 있던가? 뭐, 내가 이 몸에 들어오기 전에 말했겠지. 아무튼 기대된다. 주문해놓은 사진기 실물도 확인할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