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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19화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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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휘황찬란한 쇼윈도를 구경하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주세요.’를 외쳐보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래서 백화점인걸 알았을 때, 혹시 그 대사를 외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두근거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게 아니었다.

“또 보고 싶은 제품군이 있으십니까?”

“로제, 외출복을 새로 맞추는 건 어떻습니까? 3층에 마침 캘러타의 디자이너가 와있다고 합니다.”

“하하하......”

제가 기성복 중에 고르는 게 아니라 디자이너를 불러서 맞추는 거로군요. 알겠습니다.

우리는 입장하자마자 한 뭉텅이의 사람들에게 웬 널찍하고 화려한 독방으로 안내되었다. 그리고 직원들은 다과를 차려주고 각종 고급스러운 물건들을 방에 들여와 우리에게 설명하며 보여주고 있다.

이건... 뭐랄까, 홈쇼핑을 TV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하는 느낌이다. 내가 생각했던 쇼핑의 범주가 아니다. 고르는 즐거움 대신 이렇게 정성들여서 설명하는데 왠지 사야할 것 같은 묘한 압박감만 느껴진다. 서비스직의 입장에 공감하게 돼서 그런가보다.

결국 나는 탈출을 시도했다.

“잠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화장실에 가고 싶은 걸 돌려 말한 게 아니다. 정말로 냉수로 얼굴을 좀 때리고 오고 싶었다. 두 시간 동안 필사적이고 정중한 호객 행위를 듣다보면 누구든 이럴 거라는데 저녁에 먹은 후식을 걸겠다.

결국 나는 안내해주겠다는 직원 몇 명과 함께 방을 나왔다. 종종걸음으로 대리석 복도를 걸어 화장실로 향하는데, 예상치 못한 것을 봤다.

“공중전화기?”

그렇다. 고상해 보이는 어두운 원목으로 만들어져서 무슨 장식물인 줄 알고 지나칠 뻔 했는데, 잘 보니 공중전화박스였던 것이다.

그러자 머릿속에 아까 받은 명함이 스쳐지나갔다. 헛, 그 탐정한테 전화해서 이 몸의 집안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의뢰해보는 건 어떨까? 충동적인 생각이었지만 시도해서 나쁠 건 없어보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얼른 공중전화박스에 들어갔다.

그리고 삼십초 뒤에 다시 머리를 내밀었다.

“죄송하지만... 잔돈 좀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오늘 내로 두 배로 갚겠습니다. 제발!!

다행히 민망의 도가니탕에 허우적거리는 나를 동정했는지 한 직원분이 잔돈을 빌려주셨다. 결심했어. 오늘 하루 이 직원분이 권하는 제품은 뭐든지 세 개까지 지르자. 다짐하며 다시 박스 안으로 들어갔다.

상아색 전화기는 손가락으로 돌려서 번호를 맞추는 형식이었다. 와, 실제로 써보는 건 처음이다. 나는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야 명함의 번호로 연락할 수 있었다.

달칵. 작은 신호음이 끊기며 거침없이 힘 있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마이어 테일러 탐정 사무소입니다.

“음... 아까 명함 받은 사람인데요.”

-아, 맨션을 목에 걸고 다니던 아가씨!

탐정청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빠른 연락이군요. 좋아요. 내가 도와줄 일이 있습니까?

“음... 뭘 좀 조사해줬으면 좋겠는데요”

-조사! 내 특기죠.

탐정은 왠지 자신감에 찬 말투로 물었다.

-그 소름 돋는 약혼자 분 뒷조사입니까?

우리 메인 남주가 좀 소름 돋게 잘생기긴 했지만 뒷조사라니, 너무 갔다. 이 친구 영업할 때도 그렇고 너무 깊은 인상을 주려다 도리어 김칫국을 많이 마시는 듯.

“아뇨. 어떤 집안에 대해서 좀 알아봐줬으면 좋겠어요.”

-흠, 정확히 어떤 집안이죠?

“아, 이 근처에 엄청 큰 장미정원이 딸린 대저택에 사는......”

-......오베르 가문?

단번에 맞추다니 역시 부자라 유명한가보다.

“아, 네. 거기요.”

-......

전화기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들린 목소리는 어쩐지 약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설마 아까는 후식도 빼돌렸으면서 이제 와서 ‘그런 걸 조사하는 건 좀... 프라이버시 침해 같잖아요.’같은 현대 윤리적 발언이 나오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흐음... 이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네?”

-아가씨, 혹시 왜 알고 싶은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여기서 내가 그 집 딸인데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정보수집 중이라고하면 그 다음날 지역신문에 실리는 거 아냐? ‘대부호의 딸, 정신병자 되다!’ 뭐 이런 타이틀이 예상된다.

역시 대충 둘러대자.

“좀 흥미가 생겨서요. 막 깊은 사정 같은 걸 알아봐달라는 건 아니고, 그냥 요즘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나 객관적으로 알려진 과거정도면 될 것 같아요.”

탐정이 뭔가를 메모하고 있는지 펜촉소리가 들렸다.

-음음, 소문과 과거사라...

청년은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렵지 않죠. 네. 물론 가능합니다.

“네네.”

-그럼 1차 보고는 한 이틀 후정도로 할까요? 우선 들어보고, 그 다음 보고를 받을지 말지 결정해 봐요.

생각보다 빠르다. 괜찮은데?

“그래요.”

-좋습니다. 아, 나는 이런 조사 건은 보통 3차까지 염두에 두고 선불로 의뢰를 잡는 편인데요.

탐정은 약간의 애교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덧붙였다.

-우리가 친구가 된 기념으로, 1차 보고는 우정에서 우러나온 무료로 해드리죠.

“그냥 돈 낼게요.”

이 느낌... 길거리에서 폰 파는 사람한테 잡히는 느낌이다. 단호히 거절한다.

하지만 의외로 탐정청년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전화기를 타고 귀가 울렸다.

-하하, 돈 주면 나야 좋죠. 그래도 난 언제든 친구가 될 준비가 되어있을 겁니다.

“예예.”

그 후로 지불방식과 정보를 들을 방식에 대해 짧게 대화했다.

먼저 돈은 내일 중으로 은행 편으로 송금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 번호로 이틀 뒤에 내가 전화를 다시 걸어 정보를 듣기로 했는데, 괜히 전화번호로 내가 이 집안사람인 것을 유추당할 수도 있다는 논리적 이유와 이 몸의 집 전화번호를 아예 모르겠다는 현실적 이유의 결합이었다.

-그럼 이틀 후에 보죠.

“예. 잘 부탁해요.”

통화를 마치고 얼른 전화박스를 나갔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흘러서 나는 그냥 화장실에 들르지 않고 곧바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기다려준 직원들에게 감사인사를 하며 방으로 함께 돌아가자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로제. 주문한 물건이 맞습니까?”

“와.”

나는 약혼자가 내미는 사진기를 덥석 받아들었다. 카탈로그에서 본 것보다 더 크고 묵직한 게 안정감이 느껴져서 딱 좋았다. 최종 후보였던 두 가지 기종 중 성능확인을 위해 먼저 주문한 기종이었다.

“한 번 써 봐도 괜찮을까요?”

“예. 정상작동 중입니다.”

정중한 직원분의 말에 나는 사진기를 들어 약혼자를 향했다. 약혼자의 눈이 좀 커졌지만, 거부의 말을 하는 대신 작게 미소를 지어줬다. 그 웃음이 청량하고 아련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눈가나 턱밑 선에 관능적인 느낌이 있었다.

이건 장당 폭리수준으로 돈 받고 팔아도 팔린다. 장담할 수 있다. 나는 손을 떨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손 떨림 보정이 아직 안 나왔단 말이야.

이윽고 내가 완벽한 한 컷을 찍었다고 확신하고 나서야 나는 사진기를 놓을 수 있었다. 내가 반드시 이걸로 약혼자의 온갖 모습을 찍어서 포토북을 만들리라. 원대한 꿈에 한 걸음 가까워진 이 느낌이 아주 좋다.

약혼자는 사진기를 내려놓은 나를 의자로 안내했다. 그리고 어느새 직원들이 가지고 들어온 여러 종의 사진기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제가 사진기에 조예가 없어서 잘 몰랐는데 다양한 종류가 있더군요. 그래서 몇 가지 더 주문해서 저택으로 보내놨습니다.”

대박.

“혹시 더 가지고 싶은 사진기가 있습니까? 편하게 둘러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맙다. 이 모든 게 네 포토북을 위한 자산이 될 거야.

나는 그 자리에서 사진기 세 대를 더 구매했다. 덕질욕구가 넘쳐나니 쇼핑형태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아서 매우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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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이 끝나고 백화점을 나왔을 때는 이미 한 밤중에 가까웠다. 나는 저택에 보내지 않고 따로 챙겨온 사진기를 들고 만족스러워했다. 집에 돌아가면서 운전하는 약혼자 찍어야지. 하하하!

하지만 약혼자는 다른 제안을 했다.

“너무 어두워서 정원을 가로질러 들어가기 위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대문에서 잘 갔던 것 같은데...”

“음, 언제나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쪽은 요행이 아니라 진짜 잘 찾는 것 같았는데요...?

아니 그보다 왜 정원 가운데 승용차용 대로를 안 뚫어놓은 걸까? 차가 상용화되기 전에 정원이 먼저 만들어져서 그런가? 어쩌면 중세시대에 저택 방비용도 겸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아무튼 약혼자의 권유는 이거였다.

“저 호텔에서 주무시고 들어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저택에는 따로 연락을 해두면 되겠지요.”

설마 이건...... 그, ‘라면 먹고 갈래’ 의미인가...?

“안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가장 위층에는 객실이 2실뿐인데, 제가 로제양의 반대편 객실을 쓰겠습니다.”

아니었다. 에, 에이. 나는 기대인지 안도인지 모를 기분을 느끼며 결국 그 말을 승낙했다. 비싼 호텔 최고층에서 묵어보는 것도 좋지 뭐.

그리고 자본주의의 맛이 느껴지는 초호화 호텔에서 마사지까지 받고 잠든 그 다음날, 새벽에 뜻밖의 손님이 들이닥쳤다.

“일어나!”

고함소리에 눈을 뜨자 거기에는 완벽한 여장차림의 의붓오빠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있었다.

어후, 깜짝이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대? 누가 문 열어준 거야? 게다가 왜 이 이른 시간부터 난리람. 시계를 보자 6시 반이다. 졸려.

“뭐야... 이 새벽에.”

“이 정도면 아침이야. 빨리 일어나서 돌아갈 준비해.”

의붓오빠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머니가 돌아오셨어.”

※※※

근무수칙

12. 사용인 숙소를 포함한 모든 구역에서 사진기는 반입금지 품목입니다. 발견 시 필름은 즉시 소각되며 절대 인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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