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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20화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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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조식까지 조지고 가려고 했는데 아깝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타며 입맛을 다셨다. 문을 닫자마자 아마도 저택에서 온 것 같은 운전기사 분이 새벽이라 아직 한산한 대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약혼자는 사업관련 급한 전보가 왔다며 편지만 남겨둔 채 새벽에 나갔다는 모양이다. 지난번처럼 온갖 미사여구가 붙은 편지를 예상했지만, 정말 급했는지 매우 단도직입적인 내용이었다.

우선 급하게 떠나게 돼서 미안하다는 사과와 이틀 내로 돌아오겠다는 말이 먼저 적혀있었다. 그리고 식사는 믿을만한 사람에게 대행을 시켜놨으니 약혼자의 선물이 온 것이라고 말하고 수령하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마무리가 이랬다.

-위험하거나 불확실한 모험은 자제하시고 언제나 안전을 우선시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로제.

누가 보면 내가 7살짜리 골목대장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게다가 이제는 내 용의자 의심군에서 벗어난 의붓오빠도 독살 사태를 알고 있다. 그러니 굳이 음식조달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지난번 만남으로 오해만 깊어졌는지 약혼자가 걱정도 많다.

사실 오히려 나보다는 의붓오빠 쪽이 걱정되는 안색인데 말이지. 나는 여전히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 옆자리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제릴에게 말을 걸어봤다.

“혹시 몸이 안 좋아? 얼굴이 새파란데.”

“......몸의 문제가 아니지.”

오, 냉소적이지만 제대로 된 문장으로 답변이 돌아왔다. 내심 무시하거나 말 걸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동안 제법 호감도가 쌓인 모양이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자.

“몸이 아니면 뭐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어?”

“......어머니가 외출하고 외박까지 한 걸 알게 될지도 모르는데, 넌 참 태평하군.”

헉, 그러고 보니 그러네! 나는 절대 안정을 부르짖으며 과보호하던 양어머니의 태도를 생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안 계실 때 잠깐 나갔다올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무시하고 외박한 게 되잖아. 가뜩이나 트라우마 있으신 것 같던데 이게 무슨 불효냐.

“사용인들 입단속은 시켜놨어. 너도 어머니가 집에 도착하시면 우리는 나갔던 적이 없던 걸로 대답해야 돼.”

“그, 그러자.”

정말 남매스러운 대화다.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아직 집에 돌아오신 건 아니고 오시는 길이라고 전화라도 받은 모양이다. 의붓오빠는 이제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다. 아마 전화를 받았을 때라도 회상하는 모양이다.

음, 나는 너무 긴장한 것 같은 제릴의 초조함을 조금 풀어주고자 사담을 꺼내보기로 했다.

“아, 외출해서 볼 일은 다 봤어?”

분명 전해 듣기로는 의상점에 간다고 했었다. 고로 이것은 신상 옷을 많이 샀냐는 물음이다. 이후 이어질 즐거운 덕토크를 예상했지만 방어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개인적인 일이야.”

음, 이거 혹시 자기만 관심 있는 분야 막 열정적으로 떠들다 갑분싸될까봐 대답 못하는 거지? 이해 못해줄 건 아니야. 나는 사회성이 부족한 의붓오빠를 따스한 관점으로 바라보기로 마음먹었다. 나쁜 녀석은 아닌 것 같으니 천천히 다가가 보자.

그리고 의붓오빠는 머뭇거리더니 역으로 내게 질문했다.

“그러는 너는, 왜 외출했는데.”

“와, 자기는 개인적인 일이라고 넘겼으면서, 너무한다!”

“그, 그럼 너도 대답하지 말던가!”

됐다. 뭐 별 거 한 것도 아니고. 나는 얼굴이 시뻘게진 의붓오빠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래도 혈색은 돌아왔네 그래.

“나야 저녁 먹고 쇼핑했지. 아, 사진기도 샀다?”

“뭐?!”

내가 소중히 안아들고 탄 박스에서 사진기를 꺼내 보여주자, 의붓오빠가 경악했다. 역시 그 결혼식 이후로 사진기는 이 집에 암묵적으로 안 들이는 물건이 맞나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 마, 어머니께는 안 보여드릴게.”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찍은 사진부터 살짝살짝 자연스럽게 집에 스며들게 만들어야지! 거기에 약혼자의 미모가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 보여드리지 마.”

의붓오빠는 내 사진기를 얼른 뺏어서 도로 박스에 넣더니 박스를 다시 꽁꽁 닫았다. 백화점 로고만 보이게 만들고서야 안심했는지 손을 뗀다. 그래그래, 이대로 들고 갈 테니까 걱정 마라.

“혹시 인화하면 나한테도 꼭 가지고 와.”

“좋지!”

제법 훈훈한 말도 할 줄 아는 구나 짜식. 나는 웃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그렇게 훈훈히 마무리된 대화를 끝으로 차는 대문 앞에 도착했다.

나와 제릴은 황급히 내려 정원을 종종 걸음으로 걸어갔다. 해가 뜨는 정원은 낭만적이고 아름다웠지만 솔직히 눈에도 안 들어왔다. 무슨 직장상사가 기다리고 있는 산 정상으로 새벽 등반하는 느낌이다.

제릴이 비장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점심쯤 도착하시는 모양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각자 방에 있던 걸로 하자.”

나도 덩달아 근엄하게 대답했다.

“좋아. 어제 저녁은 같이 먹은 걸로?”

“그렇게 하지.”

우리는 그렇게 이상한 동지애 같은 것을 느끼며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굳었다.

“돌아왔군요. 내 따님들.”

오 마이... 스텝마더!

양어머니가 현관문 앞에 서있었다!

심지어 양어머니 양 옆으로 일하는 분들이 줄 맞춰서 대기하고 있다. 인원이 수십 명으로 현관에 사람이 가득하다. 외박하고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데 친척들까지 다 거실에 모여서 날 돌아본다면 이런 기분일까?

만화였으면 난 벌써 식은땀으로 목욕하고 있다. 삐걱거리며 옆을 돌아보자 제릴도 굳어있다. 넋이 나간 표정이다. 아마 나도 저 표정일 것이다......

“나들이는 즐거웠나요?”

“네, 네......”

아냐, 여기선 무조건 말없이 외박해서 죄송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내가 지금 뭐라고 대답하는 거지? 으아아 모르겠다!

“그렇군요. 한창 나가고 싶은 나이니까요. 내가 걱정 때문에 너무 과했나 봐요.”

어라? 양어머니는 의외로 침착했다. 일하는 분들에게 손짓해서 현관에서 해산시키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설마 너무 화나서 오히려 침착해지셨나?

“우리 로제, 그래도 자주 나가지는 말아요. 정말로 몸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답니다. 그리고 약은 꼭 챙겨야 해요?”

아앗... 어쩐지 양심에 더 찔리는 것 같은... 이 기분...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씻고 좀 쉬어요. 그리고 아침식사를 함께 할까요? 며칠 간 어떻게 지냈는지도 궁금하네요.”

그래봤자 이삼일인데요. 분위기 상 말하지는 않았다.

“제릴은... 안색이 나쁘군요. 아침 식사를 같이 해도 괜찮겠나요?”

힐끗 보니 정말 안색이 나쁘다. 거절이 나올 거라고 거의 백 프로 확신했지만, 의붓오빠는 이를 악무는 것 같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양어머니는 미소 지은 그대로 알았다고 대답했고, 나는 솔직히 아침식사가 일대일 면담 분위기가 아니게 된 것에 안도했다.

그리고 씻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아침식사 자리로 소환됐다.

“......후.”

이번에도 내 자리만 메뉴가 푸짐하다. 양어머니 입김인 것 같다.

근데 이거 먹어도 되나 모르겠네. 의붓오빠하고 독살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그때 약혼자가 들어와서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조사를 못했단 말이지.

원래는 오늘 마저 상의하고 뭔가 조치를 취해서 점심이나 저녁부터는 원래대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아무 것도 이야기된 게 없는 지금 당장은 좀 그렇다.

내가 그렇게 접시에 칼을 대고 머뭇거리는 사이, 양어머니가 폭탄 발언을 했다.

“독살시도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뿜었을 것이다. 니가 말했냐? 제릴을 돌아보자 시선을 피한다. 맞구만.

“그래서 더 빨리 오려고 노력했답니다. 다행히 세 시간 전에 도착해서 경찰과 함께 모든 사용인을 불러놓고 심문을 진행했지요.”

네? 새벽에 도착해서 벌써요?

“정황상 의심 가는 사람들이 있었답니다. 전부 서로 이송되었어요.”

양어머니는 좀 슬픈 표정이었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경찰들이 수색하면서 부엌의 찻잎상자에 수상한 흔적이 있는 걸 발견했다고 하네요. 로제가 처방받은 약과 반응하는지 살펴보기 위해 수거해갔답니다. 그리고 의사도 조사를 받는 중이에요.”

미친. 이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양어머니는 슬픈 눈으로도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니 걱정 말고 식사를 들어요, 우리 딸.”

으으음. 나는 고민했다.

이건 너무 급전개인데? 아니 외출해서 놀다 들어오니까 이미 용의자와 증거가 나왔다니, 이렇게 남의 손으로 그냥 해결된다고? 이게 무슨 김빠지는 스토리라인이야.

보통 로판에서 이럴 경우 생각지 못한 곳에서 허점이 있어서 진짜 범인은 빠져나가고 나중에 클라이맥스부분에서 성대한 고구마 대잔치를 벌여준단 말이지.

이건 좀 더 조사과정을 두고볼 필요가 있다.

그래, 일단 보류다. 보류하자!

“네. 근데 제가 어제 저녁을 과하게 먹었는지 아직 배가 고프지는 않아서요. 괜찮다면 한두 시간 후에 먹어도 될까요?”

“당연히 괜찮답니다. 식사 후에 꼭 약을 먹는 걸 잊지 말아요.”

넘겼다! 좋았어. 나는 섣불리 약혼자의 식사 대리배달을 무시한 스스로를 반성했다. 한동안 신세 좀 지겠습니다. 이 은혜는 차후 땅으로 갚겠습니다.

그 후로는 별다른 특별한 주제 없이 가벼운 화제가 오가며 아침모임이 끝났다. 의붓오빠는 이번에도 고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이젠 말도 텄으니 좀 있다가 혹시 채식주의자인지 물어봐야지.

그리고 나는 방에서 사진기를 만지작거리며 잠깐동안 한가로운 오전시간을 보냈다. 주로 창가에서 정원을 찍었는데, 아주 멋진 사진이 나올 것 같았다.

한참 구도를 바꾸고 있을 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아가씨, 마담께서 산책에 동행을 권유하십니다.”

헛, 일단 사진기부터 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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