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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산책을 나가자마자 양어머니가 말을 붙였다.
“로제, 식사는 잘 했나요?”
한국인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화제 선정이다.
“네, 네!”
약혼자 배달대행분이 베이컨 샌드위치를 보냈더라구요. 볼륨감도 훌륭하니 양과 구성모두 훌륭한 아침메뉴선정이었습니다. 맛도 좋았기 때문에 제 별점은 네개 반입니다. 나중에 약혼자 돌아오면 무슨 집이었는지 물어봐서 같이 좀 가려구요.
“다행이에요. 식전 약도 잘 챙겨먹었나요? 유명한 의사를 수소문해서 새로 지어온 약이랍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제 책상 서랍에 잘 보관 중입니다... 대답이라도 잘 해드리자.
“그럼요.”
그러자 양어머니가 안도한 것처럼 활짝 웃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데 양심통이 재발하는 것 같다...... 진정해 양심아. 그렇다고 정상인데 정신과 약을 먹을 수는 없잖아.
잠시 잔잔한 침묵이 흘렀다. 양어머니는 어쩐지 아련한 표정으로 정원을 둘러보는 것 같았다. 연애하던 시절 추억이라도 떠올리시는 걸까?
“우리 로제.”
“넵.”
어후 깜짝이야.
“사실 로제가... 독살에 대해 바로 이야기하지 않아서 무척 속상했답니다.”
양어머니는 쓸쓸한 표정이다. 이 화제, 이 분위기. 낯설지가 않구나. 이건 족보 복잡한 로판에서 흔히 등장하는 대사다.
설마 가족애 회복 이벤트인가...!
“5년이나 지났지만 결국 어머니로서 신뢰받지 못하는 구나했어요.”
양어머니는 담담하게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이다음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열심히 구상 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최대 호감도 대사를 빨리 출력해라 뇌야...!
“하지만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죠.”
양어머니가 몸을 아예 틀어 나와 마주보았다.
“유산을 노리고 독살을 시도한 계모... 어색하지 않은 표현이니까요.”
“컥,”
사레들릴 뻔 했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실 줄이야. 역시 귀갓길 새벽에 경찰까지 대동하고 용의자와 증거를 세시간만에 찾아낸 사람다운 직진이다.
“그러나 걱정은 말아요. 로제, 우리는 안 그래도 로제가 성인이 되면 이 저택을 나갈 생각이랍니다.”
“네?”
아니 쫒아낼 생각도 없었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세요...?
내 내적 당황과는 상관없이 양어머니는 미소 지은 채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이제 제릴도 성인이고, 혹시라도 우릴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그때를 위해 요 몇 년간 일하면서 꾸준히 돈도 모으고 있고, 타운에 살 곳도 알아봐 놨죠.”
그리고 농담처럼 살짝 덧붙인다.
“물론 이 저택처럼 넓지는 않지만요. 안락한 곳이랍니다. 나중에 로제도 놀러와야 해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이렇게 엔딩용 대사치기 있나요 어머님.
이 모든 고난과 갈등이 끝나고 마무리에 나올 법한 대화는 대체 뭐지? 난 빙의해서 한 것도 없는데 왜 주변에서 다 말도 없이 급속 해결해주냐? 설마 이건 공략물이 아니라 사랑받는 주인공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모든 게 해결되는 꿀 빠는 주인공 힐링 로판이었나?
어쨌든 양어머니는 계속 뭉클한 대화를 이어간다.
“로제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우리는 계속 가족일 거예요.”
“네, 네...... 그럼요.”
나도 내가 무슨 대답을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오답은 아니었는지 분위기는 훈훈했다.
좋아, 좀 더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보자.
“어... 요즘 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가요?”
“아, 고고학 탐사대를 지원하고 있답니다.”
예상도 못했던 모험적인 직업이 나왔다...? 저는 양어머니도 로판에서 기본직업처럼 나오는 상단 운영을 하고 계실 줄 알았는데요.
“이제 사람들은 잘 쓰지 않는 언어로 적힌 고문서 번역을 맡아하고 있죠.”
대박. 이런 전공은 그냥 살리기도 어려울 텐데, 바쁘게 일하고 계신 걸 보면 실력이 장난 아닌 게 분명하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진짜 멋지네요!”
“어머, 고마워요.”
양어머니가 밝게 웃었다. 나도 어쨌든 친밀도는 확실히 올린 것 같았기 때문에 즐거워졌다.
에이 몰라, 이러면 힐링물인지 공략물인지 애매하지만 알게 뭐람. 독자층 어필 포인트가 모호하고 클라이맥스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아무렴 어때. 진행이 쉬우면 나야 좋다! 어쩌면 망작에 빙의했나보지 뭐.
아무튼 양어머니, 의붓오빠와의 관계는 순항 중인 게 맞는 것 같지? 약혼자와도 많이 친해진 것 같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로판 빙의자라고 할 수 있겠다.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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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무어는 코웃음을 쳤다.
방안이 엉망이었다. 다 찢어진 휘장과 침대보가 바닥을 뒹굴었다. 책상의 서랍은 모두 빠져나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있다. 선반은 조각조각 분해되어 내용물이 다 쏟아졌다.
그 외에도 물건을 숨길만한 모든 사물과 공간도 샅샅이 파헤쳐져 뼈대를 들어내고 있다. 그 집요함이 휩쓸고 간 흔적이 음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남자는 거기에 대한 큰 감흥은 없어보였다. 단지 그 안에 들어서자마자, 있어야할 것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다. 대체할만한 것은 이틀이면 도착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맞은편 벽에는 보란 듯이 피로 휘갈긴 글씨가 있다. 적은 자의 악의만큼 난폭하게도 컸다.
‘사생아 새끼’
루카스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역시 죽여야겠어.”
남자는 단조로운 억양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냈다.
일기장으로 쓰이던 그 낡은 수첩 하단에는 작은 필기체가 번져있었다. ‘R.오베르’
남자는 문득 헛웃음을 터트렸다. 경멸과 함께 남자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분노가 단어마다 묻어나왔다.
“쓰레기들끼리 잘 어울렸겠군.”
로제의 약혼자는 수첩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얼굴을 매만졌다. 손을 내린 얼굴에는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숨 쉬는 것처럼 하던 모든 시늉들이 어쩐지 요즘에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불편한 일이었다.
아무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공간에서 나왔다. 일을 지체시킨 만큼, 빨리 처리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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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실 시간입니다, 아가씨.”
“아까 했어.”
나는 때마다 칼같이 오는 일하는 분께 손을 흔들어보였다. 양어머니와 산책 소식을 알려준 분과는 다른 분이다. 아마 그쪽이 양어머니 쪽 전담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어, 전담 하녀하니까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나는 무심코 일하는 분에게 선셋은 뭐하고 있냐고 물어보았다. 일하는 분은 의아한 기색이다.
“선셋이라는 이름의 하녀는 없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선셋이라는 건 별명이었지. 결국 나는 본명을 물어보지 않은 과거의 나를 반성시키며 선셋을 최대한 상세히 묘사했다. 내 또래고 검은 머리에 말투가 딱딱하고 단발머리가 어쩌구저쩌구.
그러자 일하는 분의 안색이 바뀌었다.
“그 하녀는...... 심문 중에 용의자 중 하나로 지목되어 지금 이 저택에 없습니다.”
허어억. 역시 그랬던 건가!?
아냐, 침착해. 나도 처음에 바로 정황상 선셋부터 의심했다. 분명 경찰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선셋이 무조건 범인이라는 뜻은 아니야. 용의자 중에 하나라잖아. 그럼 의심가는 사람이 여러 명이라는 뜻이다.
“몇 명이나 갔는데?”
“여러 직군에서 갔기 때문에 저는 정확한 명수를 모릅니다.”
“알려면 누구한테 물어봐야할까?”
“아마도... 퍼킨스 부인께서 아실 겁니다.”
집사 분의 성함이다. 하기야 집사시면 당연히 알 것 같다. 만나서 당시 상황을 좀 자세히 물어봐야지. 나는 지금 퍼킨스 부인이 현관에 있다는 말까지 듣고서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아마 경보 수준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직후에 내 눈을 의심했다.
“엠마 자우어.”
현관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 중 웬 덩치 큰 경관이 엄숙하게 현관에서 양어머니를 불렀다. 이윽고 현관으로 나온 양어머니의 표정에 당혹이 가득하다.
“로제 오베르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
네??
“그리고 5년 전 러셀 오베르에 대한 살인 혐의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예?!
그리고 경악너머로 내 덕질세포가 소리를 질렀다.
거봐! 이거 주인공 우쭈쭈 힐링물 아니라니까! 이건 공략물이라고! 이렇게 쉽게 사건 해결 안 된다고 했잖아 내가!
물론 양심에 따라 삼진 에바로 기각 후 심층심리 아래로 처박았다. 이 심각한 상황에 나대지 좀 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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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무수칙
13. 사용인의 정원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변동이 있기 때문에, 아침 점호에서 인원이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 것은 정상입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