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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26화 (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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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릴은 차마 로제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의아하고 걱정 어린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마치 서로가 없는 것처럼 지내던 의붓여동생은 보름쯤 전부터 태도가 변했다.

모든 걸 놓고 체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정신이 나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결국 저 애도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무언가를 직감한 것이다. 피부로 느낀 것이다. 그래서 도피를 위해 실성이든 유아퇴행이든 저렇게 아무것도 겪지 않은 천진한 또래 애들 같은 모습이 됐겠지.

‘차라리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제릴은 숨을 몰아쉬었다.

처음 이곳에 오던 날을 떠올렸다.

이 거대한 저택의 대문이 우아하고 아름답게 보였던 첫날. 항상 악몽을 꾸던 어머니는 깊은 잠에 빠졌다. 미성숙한 정신은 그것만으로도 안심했다. 기괴한 안광의 새아버지와 조용한 여동생, 음울한 사용인들과 음산한 대저택의 공기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긴장으로 숨 가쁜 하루였다.

다음날, 또 다음날...... 물처럼 흐르는 유년기.

어긋남은 천천히 일어났다.

처음에는 속삭임이었다. 멀리서 들리는 메아리 같은 울림.

“시작된다.”

느리고 끈적한 목소리였다.

“수복된다.”

어머니는 자신의 팔을 아프게 꽉 붙잡고, 단순한 환청이며 들리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날 저녁 제릴의 침실은 의붓여동생의 의상으로 가득 찼다.

메아리였던 것은 어느새 숨결이 느껴질 만큼 바싹 가까워졌다. 침대에 누울 때면 귓가에 느릿느릿 속삭인다. 선명하고 생생한 그 목소리.

“도래한다.”

그때까지도 견딜만했다.

“위대한 영주의 영토가.”

소리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어디서 소리가 나는지 몰랐으니까.

“곧”

“맥동하는”

“곧”

“아래로부터”

“곧”

“기어오는”

한때 살아있는 무언가의 일부였던 죽은 살점들에 입이 달려 벙긋거린다. 각각의 입 모양새는 모두 다르게 생겼다. 매혹적으로 혀가 빨간 입, 유치 네 개만 난 조그만 입,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추레한 입.

살아생전 크기가 컸을 것부터 차례대로 입이 생겼다.

제릴은 서서히 고기에 식기를 대지 않게 되었다.

그 모든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맹물에 든 개구리가 천천히 삶겨지듯, 저택은 느릿느릿 천천히 자신의 몰골을 바꾸었다. 결국 소년이 사리분별을 할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이미 이 저택은 사악한 속삭임으로 가득 차있었다.

“......”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년은 간신히 도망칠 준비를 해왔다.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시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쭙잖은 예감이 든다.

동생이 마음에 걸렸다. 이대로 떠나면 ‘그것이 동생의 모습을 본 마지막이었다.’가 제릴이 로제를 회상할 마지막 문장이 될 것만 같았다.

그냥 둔 채 도망칠 수가 없다.

제릴이 입을 열게 된 동력은 그것 하나였다. 그래서 소년은 위험을 무릅쓰고 최소한의 경고를 위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말하려고 애썼다.

“......이 저택에서 사람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하지만, 하지만......

저기서 노려보는 저 눈은 뭐지?

--

로제 오베르가 떠난 직후, 장미정원에는 붉은 석양의 시간이 도래하고 있었다.

소년의 외양을 가진 정원사가 뿌린 물줄기에 장미꽃잎마다 물방울이 가득했다. 그 모든 방울방울이 마치 수정처럼,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붉은 광선들을 난반사한다. 난잡하고 이상야릇한 붉은 난선으로 가득한 정원 속에서 선셋은 가만히 서서 그 멋진 순간을 즐겼다.

그리고 루카스 무어의 얼굴은 그저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어떤 감흥이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정원사가 말을 걸었다.

“무어 경이라... 네. 안녕하세요. 무어 경.”

선셋은 공구함에서 원예 공구를 뒤적거리며 가벼운 인사말을 했다.

“오베르 아가씨는 참 좋은 분인 것 같아요. 그쵸?”

“글쎄요.”

“하시는 일은 순조로우신가요?”

“여전합니다. 다만 하나 보태고 싶습니다.”

“어떤 건데요?”

“아무 쓸모없는 어린 멍청이대신 더 크고 가치 있는 공양.”

“네?”

소년의 모습이 마치 그 뜬금없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하지만 곧 함박웃음을 지었다. 뒤틀린 입가가 모자 그림자 안으로 사라졌다.

“오베르는 절대 안 돼요. 절대! 그리고 흥정은 동등한 사이에서만 하는 거예요.”

정원사가 장미를 다듬던 공구로 남자를 가리켰다.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쪽은 밑바닥을 기며 싹싹 긁어모아야하는 걸요. 그래야 진짜 루카스 무어가 될 거 아니에요.”

깔깔깔깔. 장미를 타고 끝없이 웃음소리가 돌았다. 깔깔, 깔깔깔......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남자는 마치 정원사를 따라하듯이 활짝 웃었다.

“나는 이미 진짜 루카스 무어야. 고작 기생망령 주제에 아직도 가주처럼 구는 꼴이 우스운데. 네 몰락한 버러지 가문 따위에 기고만장해서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는 구나.”

웃음소리가 멈췄다.

--

의붓오빠는 더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리고 있다. 나도 더 집중했다. 저택 밑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거대한 것이... 이 밑에서, 깨어나고 있으니까......”

“......뭐?”

제릴이 침을 삼킨다.

“그건...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야. 그 힘이... 이 저택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전부... 그게, 그게 하는 거라고.”

“......그렇구나.”

일단 제릴이 어머니가 체포당한 충격으로 신경쇠약에 걸린 게 아니라 사실을 담백하게 말하고 있다고 믿고 객관적으로 한 번 생각해보자.

저택 밑에서 깨어나고 있는 거대한 존재.

그 여파로 사람이 할 수 없는 기묘하고 마법적인 일들을 이 저택에 일으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드래곤 묘사 같은데...?

아니 대놓고 완전히 긴 수면기 끝에 막 깨어나려고 하는 드래곤이잖아.

정통 시대물이 아닌 판타지요소가 듬뿍 섞인 로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종족 TOP3를 뽑자면 무조건 들어갈 종족인 드래곤이잖아. (다른 두 종족: 마족과 엘프)

아니 근데 드래곤이 왜 여기서 나와......?

이거 키워드로 병약한 아가씨, 약혼자, 독살, 장미대저택, 탐정이 잡히는 정통 근대 빙의물 로판 아니야...?

왜 갑자기 던전앤드래곤을 기반으로 하는 2000년대 한국형 판타지 여주인공물에서 유행했던 속성이 등장하는 거냐구요.

역시 망작이라 그래? 혹시 작가가 연독률이 떨어져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전개 중인가? 아니면 독살사건 개연성 있게 풀 역량이 안 돼서 설마 드래곤이 범인 알려주는 미친 개막장 전개로 푸나?

게다가 제릴은 이걸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그런 걸 알게 된 거야?”

“들리, 들리니까. 목소리가......”

제릴은 처음에는 더듬거렸지만 곧 ‘일어나는, 깨어나는, 영토, 도래한다.’ 따위의 단어를 줄줄 내뱉었다. 그 동안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그 단어들을 모두 체크했다. 정말 드래곤스러운 단어 선택이다.

맞는 것 같군. 어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를 않는다.

근데 왜 하필 의붓오빠한테만 들리는 거지?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게 들렸으면 분명 번화가까지 소문이 나서 기자들이 몰려들거나 다 도망갔을 텐데 아주 저택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는 말이지. 물론 독살 사태 대난장판으로 사람들이 줄줄 잡혀가기 전까지를 말하는 것이다.

혹시 막...... 사실 제릴의 핏줄에 드래곤에게 선택받은 혈통이 흐르고 그런......

으윽, 아냐. 그만 생각하자. 왠지 중2병 정원사 소년이 생각나서 괴로워.

일단 주인공인 이 몸에도 혹시 무슨 능력이나 연관이 있는지 확인해보자. 물론 당연히 있겠지요. 드래곤 조연이 등장하는 거라면 전개상 무조건 주인공은 드래곤에게 관심을 받게 되어있다. 마치 인소에서 일진짱 사천왕에게 관심 받는 것과 유사한... 음, 자꾸 오그라드는 쪽으로 비유가 흐르는데.

“지금도 들려?”

“......어느 정도는.”

와, 어떤 드래곤 놈인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요란법적하게 자기 깨어난다고 광고하고 싶은 모양인 듯.

나는 일단 정석에 따라 제릴의 귀에 양손을 올려보았다. 얍 들리지 말아라.

“잠시만,”

“너, 너 뭐하는......”

의붓오빠가 얼굴이 시뻘게졌다. 화내지 말고 있어봐라 좀.

“혹시 이러면 안 들려?”

“그럴 리가 있어? 이건 그런 게 아니.......”

갑자기 의붓오빠의 일그러졌던 눈썹이 확 펴졌다. 놀란 토끼눈이 따로 없다.

“......안 들려.”

“흠.”

역시. 이런 근본 없는 주인공 보정이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이 로판 진짜 어쩌려고 이러지? 도대체 내용이 어디로 흘러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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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제릴은 주인공 보정 능력을 목격했기 때문인지 반쯤 넋이 나갔기 때문에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했다. 적당히 다독거리고 서재를 나왔다.

이제 할 일은 하나뿐이다.

“보물 찾자.”

나는 품에서 보물 수수께끼가 적힌 쪽지를 꺼내들었다. 언제나 전개를 늘리기 위해 이런 쪽지는 훼손되거나 망가지기 마련이라 하나 필사본을 떠놨다. 역시 다독을 통한 선경지명은 언제나 통한단 말이지.

드래곤이 등장하는 거 빼고......

아, 이거 어떡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고 싶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드래곤설이 너무 뜬금없어서 오히려 사실 같다는 말이야. 만약에 제릴이 심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망상증에 걸렸다고 해도 뜬금없이 이런 걸 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자기도 독살당하는 것 같다고 하면 몰라.

잠깐만, 그러면, 그러면 혹시......

“이거... 드래곤 건가?”

드래곤 레어에 있는 거야? 이거 드래곤 레어의 보물방으로 통하는 힌트냐고. 나는 동공지진하며 쪽지를 훑어보았다.

그나마 직관적인 표현이 밑으로 내려가라는 말, 그리고 와인병 그림이다.

우선 지하실로 가보자. 확인이라도 해봐야겠다.

========== 작품 후기 ==========

로제야 드래곤 안 나오니까 걱정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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