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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단 침착하게 현실적인 설득부터 해보자.
“저기... 일단 도망가면 뭐라도 벌어먹고 살아야할 텐데, 혹시 취직에 엄청 자신 있어? 자격증이 있거나......”
참고로 나는 없어. 있는 건 토르플 1단계 자격인증 뿐이야. 아 토르플이 뭐냐고? 러시아어 자격 시험인데 여긴 러시아가 없단다! 한마디로 난 여기서 노교육 노쓸모 잉여인력이라는 뜻이라고!!
“일단 몸을 숨길만한 곳은 알아봐뒀어.”
제릴이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어딘데?”
“......지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동하면서 말해줄게. 이 저택 물건이 있는 곳에서는 말하면 안 돼.”
나야말로 안 된다. 이 상황이 판단이 안 된다.
애꿎은 저택 물건은 왜요. 혹시라도 추적당할까봐? 그럼 정말 말 그대로 맨몸으로 나가자는 뜻...?
아냐 이건 내가 널 남주로 점찍었어도 거절했을 판이야. 절대 안 된다.
이건 아무래도 현실적 이유를 통한 설득 후 거절은 안 될 것 같으니 방법을 바꿔보자. 이번에는 도망가는 이유를 파고든다.....!
“근데 대체 왜 지금 저택을 떠나자는 거야?”
“어제부터 갑자기 그 속삭임이 안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이건 기회야, 길지 않을지도 몰라.”
아 그 드래곤 때문이었구나. 솔직히 약간 안도했다. 약혼자 버리고 사랑의 도피하자는 게 주된 이유는 아니었나보다. 설득하기 한결 낫겠어.
음, 그럼 그동안은 신경쇠약에 걸릴 만큼 시끄러워서 분노와 불안만 치밀어 오르다가 마침 들리지 않게 되니 생산적으로 앞으로 영원히 그 소리를 안 들을 방법을 생각해보려고 한 건가.
근데 어쩌다 방법이 도망으로 나왔냐. 너무 일차원적이잖아. 아니, 드래곤이 쫒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여길 떠나면 안 들릴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멀어질수록 빈도가 줄어들었어.”
“쫒아올 수도 있잖아.”
내 말에 제릴의 얼굴이 허옇게 질린다. 제릴은 한 손에 내가 준 권총을 아플 만큼 꽉 쥔 채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안 들리는 지금 도망가자는 거잖아......!”
“진정, 일단 좀 진정하고......”
어허, 그거 아니야. 컴다운, 컴다운. 일단 총부터 내려놓고...... 어우 시벌 지금 권총 주지 말 걸 그랬어. 얘 지금 완전히 층간소음에 5년쯤 시달리다 갑자기 소음이 사라져서 다시 들릴까봐 불안해하는 사람처럼 굴고 있다. 나는 우선 여기서 떠나면 생길 당장의 문제들부터 언급하기로 했다. 우선 첫 번째는 역시 가족이지.
“아니 재판도 있고...... 일단 어머니를 여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잖아. 지금 피의자 신분이신데 우리 다 사라지면 더 큰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제릴은 무언가 살피듯이 내 쪽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왜 어머니를 걱정하지?”
“뭐?”
“어차피 진짜 어머니도 아니야. 그냥 마치 어머니처럼 굴었던 것뿐이지. 게다가 널 독살하려고 했을 수도 있는데?”
아니 친아들인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냐......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건 고맙긴 하지만 말이지. 나는 뒷목을 주물럭거리며 대답했다.
“뭐 범인으로 확정 난 것도 아니고... 아닐 수도 있잖아. 물론 나쁠 경우도 대비해야하지만, 그래도 사람을 볼 때는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대해야 후회가 없는 것 같아.”
왜냐하면 로판에서 누명 쓴 사람을 끝까지 믿어주는 것만큼 좋은 공략 루트가 드물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너무 쓰레기 같으니 이 생각은 그만하자.
제릴은 어쩐지 말이 없어졌다.
“......”
“그러니까 일단 재판 끝날 때까지만 다시 기다려보고 생각하자고. 그때 내가 어? 귀 막으니까 딱 안 들렸잖아. 혹시 다시 들려도 그러지 않겠어?”
“웃기는 소리. 그건 우연이야.”
말은 그렇게 했지만 권총을 잡은 제릴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좀 혼란스러워보였지만 다시 도망을 제안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음, 좋아. 넘겼어. 훌륭했다. 오늘도 다른 루트로 빠지는 일 없이, 배드 엔딩 각 나오는 일 없이 잘 해쳐나간 나 자신을 칭찬해주자!
캬, 이런 보람찬 날은 치킨과 맥주 한 잔 딱 해줘야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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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약혼자가 치킨을 들고 온 것은 우연이었을까요.
“로제, 식사를 못 하셨을 것 같아서 챙겨왔습니다. 급하게 주문하느라 그다지 유명한 곳은 아닙니다만...”
아니야. 우연이 아니다. 치킨과 나 사이에 운명인 것이 틀림없다. 비록 맥주는 없지만 닭튀김의 자태는 정말 끝내줬다. 나는 홀린 듯이 치킨을 받아들려고 했지만 갑자기 약혼자가 치킨을 뒤로 물렸다.
어, 내 치킨......
“아, 죄송합니다. 사진을 먼저 드렸어야하는데.”
“아뇨. 괜찮아요.”
사진 나중에 봐도 괜찮으니 선생님 어서 그 치킨을 내 입에...!
“여기 인화한 사진입니다.”
“......감사합니다.”
확인 안하면 치킨 안 줄 것 같다.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보는 약혼자에게 힘겹게 감사인사를 하고 사진이 담긴 직사각형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첫 장을 보는 순간 충격에 휩싸였다.
맨 처음 찍은 약혼자의 사진이다.
사진이 다 흔들렸다.
이목구비가 곤죽이 됐어.
“로제 양?”
아, 아냐 괜찮아. 침착하자. 다음 장은 괜찮을 거야. 나는 재빨리 다음 장으로 사진을 넘겼다.
이번에도 난리 났다.
뭐지, 이건 정원을 찍은 건가? 초록하고 빨강이 무슨 추상주의 그림처럼 사진 사방에 널브러져있다.
“......”
나는 빠르게 사진들을 넘겨보았다. 제대로 찍힌 걸 찾는 게 더 어려울 지경이다.
게다가 지하실 대탐험에서 찍은 건 더 심했다. 무슨 불빛이 하나 땡그랗게 보이는 사진이 대다수에 다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다. 벽을 찍은 한 컷 빼고는 전멸 수준이다.
심지어 나머지 사진들 중에 일하는 분들이 작게 찍힌 사진들마다 다 눈이 시뻘게. 적목 현상이 이렇게 오지게 나온 걸 보는 건 나도 처음이야.
이 충격과 공포의 그지깽깽이 사진들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약혼자가 굉장히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뭔가 오해한 것 같다.
“하필 저희가 같이 찍은 사진이 현상 중에 문제가 생겨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피해 보상은 제대로 청구했습니다. 사진은 또 같이 찍으면 되니, 너무 상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네.”
아니 그것도 문제긴 한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설마 나...... 장비빨이었나?
내 촬영 기술이 전부 장비빨이었다고?
아냐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구!!
분명 난 사진 잘 찍었단 말이야. 어느 정도냐면 찍덕인 내 랜선 친구가 행사 못 갈 때는 나한테 대리 찍사를 부탁할 정도였어!! 데이터 값도 장당 두둑이 쳐줬단 말이야! 객관적인 금손이었는데!
그러자 머릿속에서 부정적인 자아가 반박한다.
뭐어? 바보야, 기술이 아니라 장비빨이겠지! 네 기술은 이미 미국 갔어! 현대 장비하고 같이 손잡고 미국으로 갔다고!
그, 그럼 내 포토북은?
걔도 미국행이지!
“미국......”
“예?”
“아닙니다...... 아, 고마워요. 치킨도 맛있겠어요......”
나는 혼미한 채 약혼자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느릿느릿 치킨을 뜯었다. 분명 끝내주는 감칠맛이 나야할 치킨에서 무맛이 났다. 아닌가? 눈물 맛인가? 아니면 날아간 내 포토북의 원대한 꿈의 맛일지도 모르겠다.
“로제,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치킨 맛있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기계적으로 중얼거리며 식사를 마쳤다. 식사가 끝나는 순간까지 약혼자가 무슨 걱정의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좀비처럼 침실로 비틀비틀 걸어가서 씻지도 않고 쓰러졌다.
내가, 내가 똥손이라니...!!
오늘은 이만 자자. 충격이 너무 컸어. 뭐든지 내일 생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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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릴은 숨도 쉬지 않고 계단을 내려왔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현관만 나가면 된다. 이제는 밤에 정원을 가로질러도 괜찮을 것이다. 중요한 건 아직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에, 얼른......
로제는 어쩌지?
‘나중에, 자리를 잡고 데리러 오자.’
로제는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지도 않고, 자주 번화가에 나가는 것 같으니 많이 오염되지도 않을 것이다. 제릴은 애써 합리화하며 계속 발을 움직였다. 앳된 애정이 주도권을 잡기에는 묵은 공포가 너무나 거대하고 무거웠다.
그때, 둔탁한 소리가 발 아래로 울렸다.
“......!!”
제릴은 반사적으로 얼어붙었다. 천천히 고개를 내리자, 소리를 낸 물건의 정체가 달빛에 윤곽을 드러냈다.
검은 가죽지갑이다.
제릴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계단 위 층계에 선 인영이 보였다.
검은 머리에 체격 좋은 남성. 자칭 ‘무어 경’이었다. 달빛에 표정 없이 요사스러운 그 이목구비가 그늘진다.
제릴은 이를 악물었지만, 참지 못하고 말했다.
“로제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걔를 어쩔 생각인 거냐고.”
남자가 몸을 젖힌다. 얼굴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 것도.”
“......”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건데?”
느릿느릿한 목소리였다. 제릴은 그 어조에서 겹쳐지는 속삭임에 몸을 떨었다.
“그냥 지금처럼 계속 살게 만들어야지.”
머리끝까지 소름이 올라왔다.
제릴은 고개를 쳐들었다. 남자가 고개를 까닥거린다.
“근데 그런 걸 왜 묻지?”
“뭐......?”
“물어볼 이유가 없는데.”
남자가 적힌 글을 읽어 내리듯 쉼이나 공백 없이 계속 읊조렸다.
“너는 로제 오베르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이 저택에 기생하던 것뿐이지. 그리고 위험이 다가오는 것 같으니 숙주를 떠나고 있군. 아무 사이도 아니니 할 수 있는 판단이야.”
남자의 목소리는 점잖았지만 흐르는 독처럼 어딘지 악의와 혼돈의 냄새가 났다. 마지막에는 거의 감정적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그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날 비린내가 날 것이라고 제릴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담 자우어의 따님, 여비라도 챙겨서 도망가시던가요. 저는 이만.”
무어 경은 마치 아가씨에게 하듯이 정중한 인사로 조롱을 마치고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그 발걸음 소리가 사라졌을 때, 제릴이 움직였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집어 들었지만, 그 눈은 모욕에 대한 울분보다는 어떤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제릴은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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