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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쨍쨍한 오전에 일어나자 저 어디 심연의 다크니스 속에 처박혀있던 내 정신도 좀 회복됐다.
그래, 생각해보니 굳이 사진을 내가 찍을 필요가 없다. 전문가를 고용하면 되잖아. 로판 요정이 내 재능을 가져가고 돈을 준 거라고 생각하자고. 돈으로 각종 금손 분들과 일하면 돼!!
나는 애써 슬픔에서 벗어나려 애쓰며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꼴이 엉망진창이다. 좀 씻고 사람의 몰골을 한 뒤에 움직여야겠다. 일하는 분을 부를 수도 있지만 그냥 이번에는 나 혼자하자......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너털너털 욕실로 걸어가서 씻고 나왔다. 그러자마자 어제 찍었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크흡, 또 다시 밀물처럼 밀려드는 타격감이 장난 아니었지만 참고 그나마 멀쩡한 사진을 하나 뽑았다. 바로 지하실 밑 인디아나 존스 풍 대탐험 동굴에서 찍은 벽이다.
사진에는 신비해 보이는 문자가 빼곡하다. 일단 이거라도 서재에서 좀 찾아봐야겠어. 어쩌면 드래곤에 대한 힌트가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음, 지금까지 남주 후보들이 흑발, 적발, 금발이 나왔으니...... 슬슬 은발이 나올 타이밍인가. 저는 실버 드래곤에 배팅해보겠습니다.
설렘으로 약간 기운을 회복한 나는 툭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기겁했다.
약혼자가 코앞에 서있다. 노크를 하려던 것인지 가죽 장갑을 낀 한 손을 반쯤 들어 올리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쓱 내리고 미소 지었다.
와악 아침부터 충격적인 눈호강...!
“로제, 좋은 오전입니다. 기분은 괜찮으십니까?”
약혼자는 아침보다는 점심에 가까운 시간이라는 것을 참 부드럽게 돌려 말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마 하도 안 나와서 걱정돼서 왔나 보구만.
“네. 푹 자서 괜찮아요.”
활기차게 대답하려고 했지만 순간 알아볼 수도 없이 곤죽이었던 약혼자의 사진이 떠올라 억양을 삐끗했다. 크흡. 후유증이 길 것 같다. 입맛도 사라지는군.
“근데 왜 방문 앞에 서계셨어요? 뭐 하실 말 있으세요?”
“아, 그건...... 네, 그렇죠. 아침식사가 배달됐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습니다.”
헐 아침식사면 꽤 전이었을 것 같은데 너무 오래 기다린 거 아냐? 급격히 미안해진 나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전 괜찮아요. 저 때문에 못 드시고 계셨다면 죄송해요.”
“예...?”
음? 어쩐지 충격 받은 것 같다. 혼자 먹는 걸 안 좋아하나?
“...준비된 식사는 수란을 넣은 칠면조 샌드위치와 레몬주스입니다.”
오 좋은 메뉴다. 저런 맛있는 음식을 박살난 금손 착각 때문에 입맛 없는 지금 당장의 내가 먹는 건 너무나 비효율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먹어봤자 어제처럼 무슨 맛인지도 모를 듯. 두 시간 후의 나에게 양보하자.
“맛있겠네요. 시장하실 텐데 얼른 드세요.”
“......”
그리고 침묵이 흐른다. 뭐야 왜 대답이 없어.
슬슬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같은 대사를 칠까말까 고민할 때 즘에야 약혼자는 입을 열었다.
“그럼... 그래요. 로제, 지난번에 새롭게 나무를 심기로 했었지요. 혹시 생각해보셨습니까?”
갑자기 전혀 다른 화제가 나왔다...? 아, 그 건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있긴 했지. 이번에는 제법 쾌활하게 대답해줄 수 있었다.
“아, 그거 걱정 마세요. 그 장미나무 살아난 것 같은데요?”
“...예?”
“몸통이 아무는 것 같더라구요. 굳이 안 뽑고 좀 두고 봐도 될 것 같아요.”
“......그럴 리가.”
“네?”
약혼자 표정이 굳었다. 자연의 신비에 충격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하기야 본인이 직접 그 박살을 내놨으니 더 안 믿기기도 하겠지.
그래도 나름대로 알아서 납득은 했는지, 곧 방긋 웃으며 다른 화제를 꺼낸다. ‘내 생각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며 네가 잘못 본 게 분명하다’ 어쩌고 하면서 따지려 들지 않고 수긍하는 게 참 좋은 남주의 자세다.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런데 로제, 제가 일이 생각나서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저택 밖으로 외출은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네네.”
“그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식사는 그 이후에 같이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요!”
약혼자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아마 본인이 묵고 있는 방의 전화기를 쓰려는 게 아닐까? 좋아, 난 가려던 서재 쪽으로 도로 가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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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도 서재에는 제릴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봐, 사실 여기가 네 방이지?
“어째 볼 때마다 여기 있는 것 같다?”
“......할일이 있으니까.”
책장에서 바쁘게 책등들을 살피던 제릴이 침착하게 대꾸했다. 혹시 어머니가 체포되기 전에 찾던 뭔가를 본인도 계속 찾아보고 있는 걸까? 그게 도대체 뭔지 나도 궁금하긴 한데 일단 체포원인인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아무튼 그래도 한결 차분해진 분위기에 내 마음이 다 안심된다.
“너는 왜 왔는데?”
“아, 여기 찍힌 게 글자 같아서 사전 좀 뒤져보려고 했어.”
“뭐?”
이건 말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드래곤에 먼저 시달렸던 건 저쪽이니까 별로 놀라지도 않을 것 같다. 나는 드래곤 하트를 발견한 지하실 대탐험을 제릴에게 설명했다. 짧게 요약해서 말하려고 했는데 얘기하다보니 흥이 나서 좀 장황하게 떠든 것 같다.
하지만 의외로 의붓오빠는 말을 중간에 끊거나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하게 내 말을 다 경청했다. 그리고 짧고 단호하게 조언했을 뿐이다.
“절대 거기 다시 내려가지마.”
“안 그래도 그러려고.”
내가 보고 싶은 건 은발미남 인간형 드래곤이지 펄떡거리는 드래곤 하트가 아니다. 그리고 석유왕이 될 테니까 보물도 필요 없어!
“그리고 사진 줘봐. 내가 찾을 거니까.”
“어, 혹시 이 글자 아는 언어야?”
제릴이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어머니가 작업하던 걸 몇 번 도우면서... 본 적은 있어. 완전히 문외한은 아니야.”
“오올.”
“아, 아무튼 줘 보라니까.”
내 손에서 사진을 휙 뺏어든 제릴은 눈살을 찌푸리며 문자를 살펴보더니, 책상 위 작은 케이스에서 안경까지 꺼내서 꼈다. 고풍스러운 디자인의 작은 외눈 안경이다.
와... 안경도 써. 정말 설정이란 설정은 다 해먹는 구먼. 나는 작가의 집요함이 느껴지는 그 모습에 감탄해버렸다.
“저기 그럼 뭐 해야 할 일 있다고 했잖아. 혹시 서재에서 책 찾는 거면 내가 찾아보고 있을까? 그러면 더 효율적이고...”
“정신 사납겠지. 가 봐. ...끝나면 알려줄게.”
“뭐, 그래.”
그렇게까지 본인이 혼자서 무임노동을 해주시겠다는데 거절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서재에서 나왔다.
아무튼 사진 건도 됐겠다, 이제 내가 해야할 건......
“...없네?”
일정이 없군. 약혼자가 돌아올 때까지는 할게 없구만. 해서 화이트(구 하녀 선셋)의 도망소식 때문에 번화가로 나가는 것도 막혔으니 산책이나 좀 하고 있을까. 가는 길에 집사 분께 저택 경비 현황이나 좀 여쭤보든가 해야겠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현관으로 내려갔다. 보자, 집사 분이 현관 근처 방에...
어, 방금 전화기 울리는 소리 나지 않았나?
“맞네, 전화기.”
계단에서 내려오던 발걸음을 멈추자 좀 더 선명히 소리가 들린다. 현관 근처 응접실에서 나는 소리 같다.
아 맞다, 어쩌면 경관에게 온 전화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일하는 분이 받기 전에 내가 직접 듣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편이 좋겠지? 오, 뭔가 진행되는 느낌이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소리가 나는 방으로 뛰어갔다.
신기하게도 지난번에 내가 탐정에게 전화를 걸었던 그 전화기가 있던 방이다. 재밌는 우연이네.
나는 얼른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오, 제길. 감사합니다. 아가씨!
전화기 너머로 다급한 탐정 청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여, 왜 댁한테 전화가 와.
“그쪽 이 번호 알고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그 집에서 나와요!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냐.
“갑자기 왜요?”
-당신 양어머니가 경찰서에서 사라졌단 말입니다!
네...?
너무 물음표 뜨는 싶은 부분이 많아서 어디서부터 말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얘 아무래도 이 몸이 로제 오베르인 걸 눈치 챈 모양이다. 하긴 탐정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내가 서브남이라고 생각해서 너무 안일했던 거겠지.
근데 양어머니 도망소식은 어떻게 안 거지? 아직 경찰한테도 연락이 안 왔다. 혹시 해서 화이트랑 착각한 거 아닐까? 아니 그보다 경찰 말처럼 피의자가 탈출했으면 오히려 저택에서 안 나오고 칩거해야하는 거 아냐?
“저도 어제 해서 화이트 도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혹시 그거랑 착각.....
-그 사람은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탐정의 목소리가 더 다급해졌다.
-제길, 일단 타운으로 나오면 다 설명해줄 테니까 우선 빨리 나오라구요. 그리고 당신 약혼자라고 한 애인한테서 당장......
뚝. 갑자기 탐정의 목소리가 끊겼다.
“여보세요? 이봐요!”
전화기를 툭툭 쳐봤지만 답은 없었다. 심지어 전화가 끊겼을 때 들리는 신호음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그리고 정적을 가르고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선명함은 분명 이 방문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 같다.
“로제? 내 딸?”
양어머니였다.
“......”
와 미치겠네. 이 갑작스러운 싸한 전개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몰라 일단 문부터 잠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