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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34화 (34/57)

<-- 오해와 대격변 -->

“로제? 거기 있나요?”

나는 극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여서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문을 잠그는데 성공했다. 와 미친 방문 잠금장치까지 이렇게 매끈하도록 꼼꼼히 관리해주신 일하는 분들께 이 성공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아, 아니 뭐 근데 꼭 양어머니가 날 습격할 거라고 확신해서 잠근 건 또 아니다. 탐정이 오해한 걸 수도 있고 하필 그때 전화가 고장 난 걸 수도 있지. 그래도 소설이라면 장면 분위기라는 게 있는데, 방금 그 타이밍에 전화 끊긴 건 정말 오지게 싸해서 신경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농담처럼 잠긴 문고리가 덜컹덜컹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어머니가 잠긴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시작한 소리는 곧 거친 소음이 되어 방안을 울렸다.

우와악 새, 생각보다 힘이 강하십니다, 양어머님 잘하면 문 부수시겠어요. 그때를 대비해서 혹시 모르니 권총을 꺼내둘래요.

“어머, 왜 문을 잠갔을까요? 이 어미가 반갑지 않나요?”

“......”

“설마, 설마 범인이라고 오해하는 건가요? 로제, 절대 아니랍니다. 절대 아니에요. 내 말을 잘 들어봐요.”

양어머니는 거칠게 문고리를 쥐어뜯던 것과 달리 부드럽고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티스푼 변색이 조작된 거랍니다. 겉으로는 평범한 은으로 보였겠지만, 특수한 처리를 해놨을 거예요. 로제에게 티스푼을 준 그 끔찍한 남자가 일부러 우리 모녀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그런 짓은 한 게 분명해요. 네?”

아니 그러니까 티스푼을 조작해서 우리 사이가 갈라져도 약혼자한테는 하등 이득이 없다니까요? 어차피 유산도 나한테 결국 다 올 건데 뭐하려고 그런 귀찮고 소름끼치는 짓을 했겠어요. 그래봤자 기껏해야 날 이 저택에서 학을 떼게 만들어서 자기 집에 데려가는 효과밖에......

오...... 아냐 잠깐. 이거 일리 있어. 일리가 있다. 이 전개 익숙하다.

이건 계략남주 등장하는 피폐물 로판에서 많이 봤잖아...?

주인공 주변 사람들을 모두 멀어지게 만들고 오직 자기만 주인공 곁을 차지하려는 집착남주가 쓸 것 같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후 중후반부에서 눈물콧물 빼며 절절히 반성하면 후회남주, 계속 비슷한 기조로 가면 쓰레기남주로 가닥이 잡히는 거지.

의심해서 미안하긴 한데 약혼자야, 이게 로판에 빙의한 이상 한 번 정도는 의심해볼 법한 저명한 장르라 정보를 좀 더 수집해보마.

“......혹시 다른 증거 있나요?”

“아, 로제!”

양어머니가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이 몸을 부르며 문을 톡톡 두들긴다.

“물론이에요, 물론. 이 어미와 함께 가면 이 음모를 고발해준 분을 소개해줄게요. 분명 즐거운 만남이 될 거랍니다.”

또 다른 증인입니까...... 아니 뭔 놈의 사건이 다 증인만 넘쳐난다냐. 물적 증거나 상황 증거는 없나요. 나는 짜게 식어 문을 쳐다봤다.

“그러니 문을 열어요.”

“......”

“어서.”

음, 기왕 말문 튼 거, 이 질문은 당연히 하는 게 맞지? 사실 굉장히 상식적이고 맨 먼저 했어야하는 질문이다.

“근데,”

“네?”

“저택에는 어떻게 돌아오신 건가요?”

갑자기 문 밖이 조용해졌다. 짧은 침묵 뒤에서 양어머니의 되물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건 왜 궁금하죠?”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본 모습이 수갑 차고 끌려가는 거였는데요.

“경찰서로 연행되셨잖아요. 풀려나신 건가요?”

“아, 그래요! 증거불충분으로... 네, 풀려났지요. 로제가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온 거랍니다.”

이렇게 수상하게 대답하시기도 힘들겠어요...... 그리고 끝까지 제릴 이야기는 안하시는 것도 엄청 신경 쓰여! 결국 나는 주춤주춤 문 앞에서 물러났다.

이건 열어주면 왠지 납치될 것 같은 각이야. 튀자!

“로제? 로제!”

이렇게 된 이상 창문으로 탈출한다! 에잇!!

나는 몸을 날려 창문을 뚫고 나가...려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얌전히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뒤에서는 계속 양어머니가 나를 불렀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고 빠른 속도로 창문을 넘어 그대로 정원에 포복했다. 후.

좋아. 일단 방에서 나오긴 했군. 이제 뭘 하지? 누굴 믿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겠네. 설마 여기서 누굴 믿느냐에 따라 메인남주 분기점이야?

으윽, 근데 이런 고민할 시간도 없다. 양어머니가 내 탈출을 알고 정원으로 뛰쳐나오기 전에 움직여야하는데... 일단 그럼 일단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우선 정원 안에 들어가서 이동하도록 하자.

몸을 반쯤만 일으켜서 매우 수그린 상태로 스스슥 정원의 덤불 담장을 돌았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맞닥뜨렸다.

“선셋?”

하마터면 중2병 정원사라고 부를 뻔 했네. 정상적으로 호칭이 나온 건 다행이긴 한데, 그것보다 소년 정원사의 상태가 몹시 거시기해 보인다. 무슨 낮술한 사람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허우적대는 중이다. 정면이 아니라 옆모습인데도 이상한 게 느껴진다.

너 설마 장미나무 박살난 거 보고 ‘인생이 쓰.다... 마치라잌 이 빛나는 글라스 속에 담긴... 알.코.올처럼... 쓰고 부질없는 그 맛. 크큭...’ 같은 컨셉 잡았냐.

“오베르... 아가씨.”

심지어 목소리도 있는 대로 긁고 있다. 이쯤 되면 쟤의 10년 뒤를 심각하게 동정하게 되는데......

“오베르... 크히히히히힛.”

와 웃음소리 봐, 저거 일부러 연습한 걸 거야. 이제 흑수룡 드립만 치면 완성인데? 내적 팝콘을 씹고 있는데 소년 정원사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는 씹고 있던 내적 팝콘을 뿜었다.

쟤... 쟤 손에 들고 있는 거.... 저거 엄청 큰 송곳 같은데?

근데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진다.

뭐야? 뭐냐?

“로제!”

그리고 짠 것처럼 타이밍 좋게 정원 한 컨에서 약혼자가 뛰어온다. 반갑지만 아직 거리는 너무 멀다. 그래도 약혼자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정원사를 가리키며 뭐라고 입을 웅얼거리는데, 상황이 급박해서 그런지 뭐라는 건지 안 들려! 와씨!!

그리고 거짓말처럼 소년 정원사가 송곳을 치켜들고 이쪽으로 돌진한다!!

그아아악!!! 나는 반사적으로 권총을 쐈다. 배나 허벅지에 맞아라!!

탕!

짧은 소리와 함께 기적처럼 총알은 옆구리를 맞혔다! 좋아! 살인 전과는 피했어!

근데 소년 정원사가... 터진다.

“......!?”

아니 말 그대로.... 무슨 검은 물이 되어서 후두둑 터져버렸다. 순식간에 소년 정원사가 달려들던 반 미터 앞 지점에 엉망진창으로 튄 검은 웅덩이만 고여 있다.

“으허어어억.”

이게 뭐야 얘 뭐야. 왜 검은 물이 됐어. 아니 잠깐, 검은 물?

설마 진짜 흑수룡이여?

“괜찮습니까?!”

“우어억.”

그 순간 놀라운 달리기 속도로 내 코앞까지 도착한 약혼자가 양손으로 내 머리를 덥썩 잡았다! 나는 내 얼굴이 무슨 깨지는 수박이라도 되는 것 마냥 간곡히 쥐어 잡는 약혼자의 악력에 요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무슨 수박 품질이라도 확인하는 것처럼 내 머리통을 양옆으로 돌려 상태를 확인한 약혼자는 이윽고 그것을 꼬옥 껴안았다.

“......”

아니... 흐름상 뭔가 감정적으로 고조되어야할 것 같은 분위기라는 건 알겠는데요.

일단 숨부터 좀 쉬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숨, 숨이 잘 안 쉬어지는데요.

“수, 숨 좀......”

“죄, 죄송합니다.”

약혼자가 화들짝 놀라 내 머리통을 휙 놓았다. 억, 이번에는 목 꺾일 뻔 했어. 얘는 걱정이 심해지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타입인 가봐.

흠, 그렇다면 정말 계략남주라면 쓰레기보다는 후회로 감정선이 잡힐 것 같긴 한데....., 아냐. 일단 이 생각은 그만 하자. 최소한 지금 걱정은 진심이 철철 느껴졌어.

약혼자가 이제는 머리통 대신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힘이 좀 빠지니까 약혼자의 손이 간헐적으로 떨리는 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누구라도 방금 사람을 쐈는데 갑자기 풍선처럼 터졌다면 그럴 것이다.

역시 드래곤... 아니, 드래곤이 권총에 한방감일 리가 없지. 그러면 드래곤의 분신이었나. 손에 들고 있던 송곳은 드래곤 이빨인 거지. 와, 그럼 지난번에 정원사가 주인의식 어쩌고 했던 말도 중2병이 아니라 담백한 진심이었을지도.

근데 왜 갑자기 날 공격한 거지? 설마 제릴한테 메신저 못 보내게 해서 열 받았나? 으으음, 그것도 가능성은 있군. 그럼 호감도 마이너스부터 시작해서 점점 친해지는 서사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일단은 이 상황부터 수습해보자.

“저, 저거 확인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갑자기 사람이......”

“사람이라니요?”

약혼자가 갑자기 내 눈을 지그시 쳐다봤다.

어우 무슨 눈도 한 번 안 깜박거린다. 속눈썹이 엄청 길어서 먼지가 하나도 안 들어가나.

“사람은 없었습니다.”

“......”

“그렇죠?”

“으음... 네. 뭐.”

약혼자가 너무 충격을 받아서 현실을 왜곡하나보다. 하기야 나도 로판 빙의가 아니라 그냥 생짜 현실에서 이런 걸 맞닥뜨렸으면 현실도피 했지. 우선은 너무 자극하지 말고 천천히 돌려 말해야겠군.

나는 안쓰럽게 약혼자를 쳐다보다가, 애초에 정원에 들어온 이유가 있었다는 게 퍼뜩 떠올랐다.

맞아 양어머니!

그래서 창문을 넘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는 말을 꺼냈다. 충격받은 상태라 혹시 이 이야기도 못 받아들일까봐 살짝 걱정했는데, 이건 현실적인 비상상황이라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약혼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었군요. 걱정 마십시오.”

약혼자가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다.

“제가 잘 처리해보겠습니다.”

음, 방금 그건 좀 계략남주 같았다 약혼자야. 역시 약간은 의심의 여지를 열어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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