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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35화 (3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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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잘 처리해보겠다’는 약혼자의 말뜻이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서 되는 전화기를 찾아 경찰에 연락 넣겠다.’ 같은 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그럼 그동안 나는 먼저 제릴한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일하는 분들 단체 호출하는 법을 알지도 모르니까 만일의 경우 그게 다 같이 도망치는데 낫겠어.’같은 생각을 했지.

근데 아니었다. ‘잘 처리해보겠다(물리)’였다.

우선 약혼자는 먼저 내가 나온 창문 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창문너머 방문을 살폈다.

“방문이 그대로 잠겨있군요. 이쪽으로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말릴 새도 없이 창문을 넘어 그 안에 들어가 버렸다. 내가 따라 들어오려고 하자,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고는 내가 잠갔던 문을 열고 복도로 휙 나간다.

나는 약혼자가 선행으로 먼저 살펴본 뒤 같이 진입할 생각인 줄 알고 신호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양어머니를 포박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약혼자는 양어머니의 전신을 포박하더니 현관에 묶어둔 것이다

“......?”

아니... 이게 가능한가? 무슨 데우스 엑스 마키나야? 들어간 지 체감 상 5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나는 동공지진하며 약혼자를 바라보았지만 무어 경은 그냥 난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압 후 경찰에 연락을 시도해봤습니다만 말씀대로 전화기가 죽어있군요. 아마 전화선이라도 끊은 모양입니다.”

그 와중에 정말 전화기로 연락도 시도했다는 말이야...? 아무리 로판 남주 덕목에 유능함이 선택사항으로 있다지만 심한 거 아니냐.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유혈사태 없이 정리된 거지?

“무기도 소지하고 있지 않았고, 이미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제압을 시도하자마자 정신을 잃더군요.”

약혼자가 담백하게 대답해줬다. 양어머니가 도망치면서 이미 상당히 심력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정신을 잃은 양어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고 퀭하다. 마음고생이 심했나보네.

흠, 분명 독살은 되게 용의주도한 느낌으로 시도한 것 같았는데, 정말 양어머니가 범인이라면 탈출도 좀 더 용의주도하게 하지 않았을까?

슬쩍, 땀 한 방울 없이 멀쩡한 약혼자의 외관을 훑어보았다.

계략 남주라...... 양어머니가 강력히 주장한 ‘티스푼 조작설’은 폐기하지 않고 일단 가설목록에 포함시켜둬야겠어.

나는 일단 되는 전화기도 구할 겸, 약혼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바로 제릴을 만났던 서재로 직행했다. 서재까지 가는 길은 평화로울 만큼 조용했지만 솔직히 좀 걱정됐다. 거 어머니 잡혀간 것도 그럴 텐데 지금 도망쳐서 다시 포박된 걸 보면 너무 충격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 착잡한 기분은 서재 문을 열자마자 당황으로 바뀌었다. 안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깔리고 널린 구겨진 종이와 쪽지, 펜들 때문에 걸어갈 빈자리로 찾기 어려울 정도다. 어후, 결국 방문에서 큰소리로 제릴을 불렀다.

“저기! 문제가 생겼는데?!”

“나중에!”

“아니 비상상황이야!!”

제릴은 서재의 한가운데 바닥에 쌓인 책과 서류 사이에서 뭔가를 휘갈겨 쓰는 중이었다. 이쪽을 돌아보지도 않고 종이에 코를 박고 있던 의붓오빠는 내 거듭된 부름에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류를 발로 대충 차면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쪽을 보는 눈이 충혈 돼있다. 번역을 너무 열심히 했나봐......

“대체 뭔데 그래?!”

“크흠, 그게......”

너희 어머니 경찰서에서 탈출해서 지금 현관 포박당해 계셔... 라는 요지의 말을 돌려서 전달하자마자 제릴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서재에 있던 전화기를 한 번 들어보더니 곧 거칠게 내려놓았다. 안 되나 보네.

“안 그래도 전화가 안 돼서 난리야. 혹시 전화선 관리하는 사람 저택에 있어?”

“잠깐만.”

제릴은 잠깐 전화기에 몸을 숙이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뭔가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 않아 정리가 됐는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적고 있던 종이를 황급히 자기 안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딱딱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일단 현관으로 가자.”

아무래도 전화선 복구시킬만한 인력은 이 저택에 없나보다. 그럼 양어머니를 짊어지고 정문까지 가야하나... 나는 오늘의 예상 노동량이 심상치 않다는 것에 아찔해졌다. 부디 양어머니가 중간에 깨서 몸부림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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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자우어는 꿈을 꾸고 있었다. 겪었던 과거의 사건들이 마구잡이로 접붙이기당해 뱀처럼 늘어지고 교활한 인상적인 괴물의 형상이 되었다.

머리에 달린 것은 죽은 남편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을 전공한 남자. 번지르르한 얼굴과 말솜씨로 좋은 작업을 따와 주면서도, 같은 술수로 엠마의 업적을 자신과의 공동업적처럼 만들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둘의 역량 차이에서 오는 암묵적인 학계의 평판을 견디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과대평가된 자신의 명성에 대한 자만심이 차올랐던 걸까?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남자는 위험한 낌새와 불분명한 원전 탓에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던 전승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건 칼예바 북부 지방에서 민담처럼 전해져 내려오던 미신이었다. 그곳의 버려진 탄광은 채굴량 때문이 아니라 계속되는 끔찍한 사고 때문에 폐쇄되었는데, 사실 그 끔찍한 사고는 어떤 고대의 질병이 채굴 과정에서 퍼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음울한 노래가 지역에 남아있었다.

남편은 엠마와 함께 그 지역을 탐사해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엠마는 그것보다 북부 선원들 사이에서 떠도는 인어와 돌고래 유적에 대한 소문을 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강경했고, 그때까지 엠마는 남편의 정신적 고통을 동정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행했다.

그리고 남편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자기만 생각하는 끔찍한 인간이었는지! 오죽했으면 임신한 아내를 밀치고 폐광 밖으로 도망치려 한 걸까? 엠마는 무너진 폐광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거기에 남겨진 끔찍한 글귀를 혼자 해석해야만했다! 그리고 보름이 넘도록 아무도 구출하러 오지 않았다.

도망. 도망친 사람. 도망친 남자. 엠마의 상념이 덩어리진 뱀의 몸통에 달린 두 번째도 도망친 남자다. 러셀 오베르. 너무 멍청해서 가엽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갑작스럽게 벼락부자가 되자 그 재산이 자신의 능력이라는 착각이라도 했는지, 가당치 않은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이 저택을 사다니! 그의 선조가 한 위대한 일을 확인하며 궁핍했던 유년기를 위로하고 싶기라도 했던 걸까?

엠마는 아직도 그 남자가 남긴 일기장의 내용을 기억했다. 처음에는 선조에 대한 의문과 치기심으로 시작해서 결국 선조에 대한 원망과 공포로 가득 찬 일기장을. 그래서 남자는 자신의 딸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이 저택에서 도망쳤던 것이다. 물론 저택에서 도망치기 위해 이 세상과 자신의 육신에서도 도망쳐야했겠지만.

그 빌어먹을 놈이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엠마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훨씬 더... 훨씬 더 이 형언할 수 없이 알 수 없는 신비하고 이상한 단어의 나열이 속박하며 들러붙는 그 폐광의 주문이 깨어나 밤낮없이 머릿속에서 말하는데.......

오베르를 둘이나 바칠 수 있다면 아무튼 엠마의 고통도 사라졌을 거니까!

“일어나.”

순간 뱀이 사라졌다.

엠마는 고귀한 문양이 가득한 천장을 보며 눈을 떴다. 고귀함? 아니, 왜 고귀하지? 저건 그냥 원뿔일 뿐이다. 그가 고귀하다고 느낄만한 부분이 있는가?

“나를 봐라.”

엠마는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요사스러운 얼굴의 남자가 있다. 아마도 엠마의 뱀 끝에 달려있었을 남자다. 엠마의 계획으로 도망쳤어야했던 남자.

그러나 대신 엠마를 이 저택에서 내쫒은 무어 가문의 사생아.

“사생아.”

“이제 곧 네 머리에서 사라질 단어군.”

남자는 즐거워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초조해보였다. 놀랍도록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엠마는 폭소했다.

“하하하하하하!!!”

“닥쳐.”

엠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

“이 불쌍한 새끼. 넌 실패할 거야. 어쩌자고 가당치도 않은...... 멍청한 놈.”

“완전히 홀렸군. 망령은 분명 제거했는데.”

남자는 감흥 없는 눈으로 엠마를 훑어보았다.

“상관없지. 자, 그럼......”

“열 걸음 떨어지십시오.”

남자는 현관을 박차고 들어온 남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대문에서부터 뛰어온 듯 땀범벅이었지만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둘 중 이 저택의 사용인이었던 여성이 산탄총을 흔들림 없이 자신에게 저격하고 있었다.

그는 자꾸 계단을 돌아보게 되는 자신을 참을 수 없었지만, 그보다 더 이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조금 있으면 그 여자애가 다시 돌아올 것이었다. 그 전에 이 모든 걸 정리해야한다.

정리해서..... 나는,

“이게 무슨......”

그 여자애의 목소리다.

늦었다. 남자는 루카스 무어가 된 후로 처음 경험하는 아찔한 감각에 손을 희게 주먹 쥐었다. 치명적인 실수의 감각이었다.

괜찮아.

괜찮다. 없던 일로 만들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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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제릴을 서재에서 불러내는 사이 갑자기 현관이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솔직히 양어머니가 깨어나는 것까지는 걱정했는데, 인원이 더 늘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그 늘어난 사람이 탐정과 해서 화이트(구 하녀 선셋)이라는 것까지 확인하자 정신이 아득해진다. 심지어 해서 화이트는 굉장히 능숙한 자세로 총을 약혼자한테 들이대고 있다. 저기, 전직 하녀 아니세요? 잡은 폼은 무슨 군복무하신 것 같은데요.

이 급작스런 막장 전개를 어쩌면 좋아. 드래곤 설정만 무리수가 아니라 전개도 무리수야.

“이게 무슨......”

“아가씨, 얼른 이쪽으로 와요! 얼른!!”

탐정이 날 보자마자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자신도 품에서 권총을 꺼내 약혼자를 겨냥한다. 정말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갑자기 왜 약혼자가 희대의 살인마같은 취급을 받고 있으며 왜 탐정과 해서 화이트는 같이 저택에 등장했고 심지어 하녀였던 쪽이 더 총을 잘 쓰는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약혼자를 돌아보았다. 약혼자는 표정 없이 어두운 눈이다. 누명을 써서 너무 충격을 받은 건지 진실이 들통 나서 너무 충격을 받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에는 다시 탐정과 해서 화이트쪽을 바라보았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탐정은 되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보고 있고, 해서 화이트는 흔들림 없이 약혼자를 저격하고 있다.

깨어난 양어머니를 보았다. 기침하면서 흐느끼면서 웃고 계시다. 절대 대화할 상태는 아닌 것 같다.

마지막으로 제릴을 돌아보았다. 제릴은 혼란과 긴장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보고 있다.

음, 정말 개판이군.

결국 나도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마세요.”

나는 권총을 꺼내 현관 샹들리에를 향해 겨눴다.

“......!”

“로제!”

참고로 저거 무지막지하게 크고 장식도 많다. 아마 떨어지면 현관 자체가 박살나겠지? 물론 못 맞힐 가능성이 크고 어쩌면 나도 같이 박살날지도 모르니 절대 쏠 생각은 없지만 다행히 시늉만으로도 모두가 경악하는 것 같다. 좋았어 다들 당황해서 진실을 말해랏.

“이제 순서대로 한 사람씩 할 말 있으면 해봅시다.”

그리고 갑자기 현관은 즉석 재판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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