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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36화 (3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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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난입한 쪽부터 말해보세요.”

할 말 많아 보이는 쪽에 먼저 기회를 줬건만 탐정은 도리어 펄쩍 뛰었다.

“난입이라니! 구원의 손길을 잘못 말한 거겠죠?”

“......그 구원의 손길이 제 약혼자한테 총을 쏘려는데요?”

긴 한숨이 대답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젓는 탐정너머로 해서 화이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가씨, 놀라지 마십시오. 당신은 약혼자가 없습니다.”

“예?”

어... 저한테 약혼자 왔다고 처음 말해준 게 그쪽이었는데요. 제가 그날 약혼자의 얼굴에 엄청난 덕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합니다.

심지어 약혼자 프로필 절반은 당신 덕분에 채웠었다구요!

“저건 만나는 사람을 홀려서 기억과 인식을 조작합니다. 이 저택에 붙은 악령인데, 마치 약혼자인 것처럼 위장해 아가씨께 접근한 겁니다.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으로 이 저택을 완전히 지배하려는 속셈이었겠죠.”

해서 화이트가 긴장을 늦추지 않고 여전히 이쪽대신 약혼자를 쳐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저는 그 악령의 흔적을 쫒아 이 지역에 도착해 추적 끝에 이 저택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실수로 악령에게 잠식되고 말았습니다만, 지금은 사용인을 그만두며 간신히 그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

나 이거 알아. 미남 배우가 출연한다고 해서 봤던 엑소시즘 영화에 나왔어. 막 폴터가이스트 현상 일으키고 네발로 거꾸로 걷는 눈 까뒤집은 놈들 잡으러 퇴마사가 출동하는 장르지?

하지만 그런 장르로 오해하기에는 약혼자가 너무 얼굴천재에 돈이 많고 밥을 잘 먹었다. 나는 짜게 식은 얼굴로 해서 화이트를 바라보았다.

“저기...... 내가 저 약혼자랑 같이 외출해서 쇼핑도 하고 식사도 했는데.”

“......그건.”

“악령이 부자에 잘생기고 외출해서 돈 펑펑 쓰며 밥도 먹을 수 있을까.”

옆에서 탐정이 기침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침 삼키다가 사래라도 들린 모양이다. 그 틈에 불쑥 제릴이 뜻밖의 지원사격에 나섰다.

“......최소한 하나는 사실이야.”

“뭐?”

“너한테는 약혼자가, 없어!”

말하는 제릴이 이를 악물며 약혼자를 쳐다보았다.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걸 이제 와서 말해주는 거야?”

제릴이 울컥했다.

“네가 안 들었잖아!! 나, 나는 몇 번이나 말하려고......”

“미, 미안......”

엄청나게 억울해보여서 나도 모르게 사과가 나왔다. 미안하다. 나는 네가 시비걸려는 건 줄 알았어...... 그 때는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거든. 소리를 빽 지른 제릴이 내 사과에 화들짝 놀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 그리고...... 다들 너한테 약혼자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구는데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나만 미친 사람 취급 받았을 거 아냐!”

이건 듣고 보니 맞는 논리다. 반박할 수 없군.

이번에는 탐정 쪽에서 말을 거든다.

“그러니까, 사용인들에게 전부 암시를 걸어서 자기를 이 저택의 약혼자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겁니다! 아마 외출해서도 같은 방법을 썼겠지요. 식사도 같은 방법으로 ‘먹었다’고 암시를 걸었을 겁니다. 정말 저 약혼자라는 사람이 먹는 장면이 뚜렷하게 기억납니까?”

“흠.”

네. 엄청 잘 기억나는 군요. 커피 마시면서 결국 마지막 크림 타르트 조각을 저한테 양보하는 모습까지 떠오릅니다.

아니 탐정이 이렇게 비논리적이고 초자연적인 주장을 해도 괜찮은 건가? 캐붕 아냐?

이 로판 배경이 근대라 이런 오컬트적인 오해가 생기는 걸까. 아무리 그래도 악령 드립은 심하지 않냐. 독살에 드래곤에 악령에 아주 개판이다. 조금 있으면 드래곤 분신도 악령이라고 주장하겠어.

그래도 제릴까지 저렇게 말하다니, 최소한 정말 이 몸이 약혼자가 없었다는 건 사실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째 티스푼 조작설이 떠오르면서 계략 남주와 함께하는 피폐물로 장르가 기울어진다...?

나는 지금까지 약혼자로 알고 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말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찔려서 아무 말도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어처구니없는 모함이라 말이 안 나오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어 경.”

“......”

“뭐라고 이야기 좀 해봐요. 진짜 악령인 건 아니죠?”

그러니 얼른 약혼자 아니라는 것만 좀 해명해봐라. 네가 어릴 적에 만난 이 몸에게 한 눈에 반해서 약혼자인척 하려고 이 저택 사용인들을 다 매수해서 잠입했다고 해도 용서할 의향이 있다. 물론 깊은 후회의 표출과 금전적 보상이 있어야겠지만.

하지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나는 악령이 아닙니다.”

당연히 그렇지. 그것보다 약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봐라.

“나는 당신을 위해 그 악령을 제거했어요.”

“......예?”

갑자기 본인도 엑소시즘을 한다고 말하기 있나요. 그,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금 실제로 그 악령이 있긴 한데 본인은 오히려 퇴치한 쪽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러나 이 문장을 내가 말하기도 전에 무어 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중얼거림은 점점 느릿해지며 낮아진다.

“나한테는 하등 이득도 없는데.”

슬슬 느낌이 싸하다. 무어 경은 이 대답들을 하는 내내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대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하지만 상관없지...... 그래. 상관없는 일이었어.”

갑작스럽게 고개를 든 무어 경의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떠올라 있다. 대칭미가 돋보이는 그 미소는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상황에 맞지 않아 마치 무덤에 핀 장미처럼 뜬금없고 스산했다. 솔직히 조금 오싹하다. 그리고 여전히 이쪽으로는 절대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어..... 갑자기 티스푼 조작설에 대해 탐정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지는데?

무어 경은 웃는 얼굴 그대로 고개를 돌려 해서 화이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구 하녀 선셋이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으아아!!!

탕!

우어어 어떻게 피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어 경은 멀쩡하다! 나는 여전히 해서 화이트를 쳐다보고 있는 무어 경을 보며 다시 한 번 샹들리에 협박을 상기시켜 줘야하나 고민했지만, 그보다 먼저 누군가 내 뒷덜미를 잡아 당겼다.

“억,”

고개를 돌리니 탐정의 얼굴이 보인다. 도대체 언제 현관에서 여기까지 뛰어온 건지 모르겠다. 내가 무어 경하고 대화하고 있을 때인가?

아무튼 탐정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일단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습니다! 댁들은 정신조작에 저항할 도구도 없잖습니까, 해서가 상대하는 사이에 나가는 게 차라리 도움이 될 겁니다!”

와 미치겠네!

“아니 그 정신조작이라는 게 실체가 없잖아요! 사용인들은 돈 주고 매수할 수도 있구요. 일단 내가 약혼자가 돈 쓰고 운전하고 밥 먹는 게 아주 선명하게 사진처럼 기억이 난다니까요?”

아무리 계략 남주라도 악령이라고 오해받아서 총 맞아 죽는 건 누가 봐도 배드엔딩 각이잖아! 내가 하녀 선셋 공략을 늦게 해서 그래? 조연 친밀도가 부족해서 이 꼴이 났나?!

“아가씨, 아직도 저걸 믿는 겁니까?”

아니 무어 경을 믿는 게 아니라 니들 주장이 너무 뜬금없는 걸 왜 모르냐! 게다가 주장에 빈틈도 너무 많아!

가령 이런 거!

“정말 악령이면 그냥 애초에 결혼했다고 설정하면 되지 굳이 비효율적인 약혼으로 암시를 걸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기왕 조작할거면 편하게 전원 다 암시를 걸어버리면 되잖아요! 왜 오빠는 남겨두고 걸었겠어요?”

“이미 자우어는 다른 것에게 정신을 뺏겼기 때문이지.”

으허억 소리 지를 뻔했어. 방금까지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던 양어머니가 무서울 만큼 차분하고 정확하게 말을 한다. 현관 바로 앞에 있어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어쩐지 목소리가 귀에 꽂히듯 잘 들렸다.

양어머니는 대치중인 해서 화이트와 무어 경이 마치 없는 것처럼 무시했다. 그 대신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제릴을 보며 히죽 웃었다.

“이제 다 끝났구나. 다 끝났어...... 불쌍한 내 아이.”

“......”

“로제, 어차피 죽을 건데 좀 유용하게 죽어주지 그랬니. 왜 날 의심한 거야.”

이제 와서 독살 범행 자백하시는 건가요. 제릴하고 같이 살 집을 타운에 사놨다는 건 날 안심시키려던 뻥카였단 말입니까.

하지만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어마어마한 진동이 저택을 뒤흔들었다.

“......!”

지진인가?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다들 샹들리에에서 떨어져요!!”

하지만 샹들리에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는 게 몇 십초 뒤에 밝혀진다.

갑자기 어디선가 퍽, 하는 짧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엄청나게 녹슨 문이 분명했다. 거의 비명처럼 들리는 경첩소리가 말도 안 되게 요란했다.

계단 위에서 소리의 근원지가 간신히 눈에 걸렸다.

저건 지하실 문인 것 같은데......?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리자마자 모든 진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대신 지하실에서부터 어마어마한 소리가 텅텅 울리기 시작했다.

무슨 공사소리 같기도 하고, 사람들이 악쓰거나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원룸 건물 주인이 갑자기 옥상 리모델링한다고 밤마다 공사를 해대서 기말을 망쳤던 때가 떠올라 기분이 안 좋아진다. 진동 때문에 지하실에서 와인선반이라도 다 쓰러지고 있나보다.

나는 일단 그 소리를 무시하고 현관을 확인했다. 와인이야 나중에 수습하면 되겠지. 그보다 이 천재지변이 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얘들아 대화를 하자! 총의 대화 말고 진짜 대화!

“거기 괜찮아요? 다친 곳 없어요?”

현관에서는 방금까지 총 쏘고 피하던 두 사람이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둘 다 지하실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두 사람만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전부 지하실을 바라보고 있다. 얼결에 나도 다시 지하실을 봤다. 이게 바로 군중심리인가?

그리고 동시에 지하실에서 손이 튀어나왔다. 이 집에서 일하는 분들이 입는 그 유니폼이다.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저택에서 일하는 분들을 마주친 적이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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