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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37화 (3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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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내내 일하는 분들을 본 기억이 없다.

이게 가능한 건가? 분명 적어도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저택을 관리하고 있었잖아. 낮에는 거의 저택을 다닐 때마다 일하는 분들을 마주치는 게 일상이었다고!

어떻게 이 난리가 나는 동안 한 명도 만난 적이 없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주변인물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설마 오늘 저택에 난입한 이 사람들 중에 누군가가 목격자 없이 모종의 일을 수월하게 처리하려고 지하실에 다들 납치해서 가둬둔 건......

아, 아냐. 괜히 이상한 스릴러 서사 만들지 말자. 일단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잖아. 무슨 수면가스라도 풀지 않고서야 어떻게 수십 명을 다 가두겠어?

그러자 머리에서 로맨스보다 판타지 비중이 높은 로판 덕질을 담당하는 자아가 번쩍 손을 든다.

드래곤이 마법 쓴 거 아니야? 우리 방금 드래곤 분신도 잡았잖아. 슬슬 본격적으로 활동하려는 거지 뭐.

근데 걔가 뭐 하러 일하는 분들을 잡는데?

몰라. 노예로 부리려나보지 뭐. 걔네 막 드워프나 엘프 잡아서 일시키는 거 많이 봤잖아. 저기 팔 내민 분은 탈출한 거 아닐까? 저 분을 도와주면서 드래곤과 임팩트 있게 만나는 거지!

흠, 로판적으로 말은 되는군. 첫 번째 가설로 지정해두자.

그럼 이번에는 로판말고 그냥 현실적으로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추측을 해보자. 이건 간단하다. 지하실에서 일하시다가 지진 때문에 문제가 생겨서 도움을 요청하시는 거지. 팔만 내민 건 다쳐서 움직이기 힘드신 걸 수도 있어.

그럼 일단 어느 쪽이든 빨리 부축해드려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지하실에서 다른 손이 튀어나왔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우두둑 오징어 다리처럼 여러 팔이 허공을 휘적거리고 벽을 더듬는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사람들의 팔이다.

히이이익.

누가 봐도 악령과 엑소시즘이라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일 비주얼이다.

행복회로가 박살나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린다. ‘안녕히 계세요, 행복회로는 이 전개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이만 떠납니다!’

저건 뭐냐. 뭐 드래곤이 너무 오래 자다보니 폴리모프하려다 실패한 거지? 제발 그런 거라고 말해줘!! 행복회로야 떠나지 마!!

“워억,”

누군가 내 팔을 덥석 잡는다. 팔들이 막 저렇게 거미처럼 다닥 거리는 걸 보고 있는 판에 뭔가가 잡으니까 소름이 쫙 끼친다! 반사적으로 뿌리칠 뻔 했으나 내 팔을 잡은 사람이 먼저였다. 나를 질질 끌고 현관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고개를 돌리자 무서울 정도로 표정없는 무어 경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댁은 또 언제 이동했어요.

“잘 들으십시오.”

여전히 이쪽을 보지 않고 지하실을 보고 있는 채로 약혼자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지하실에서 팔들이 더 튀어나오고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실에서 시선을 못 떼고 있고 아주 개판이다. 움직이는 건 무어 경과 나뿐이다.

“일단 현관에서 나가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뛰어야합니다. 최대한 장미가 없는 쪽으로 돌아서 이동하되 외곽에 도착하면 절대로 문을 이용하지 말고 벽을 타고 나가십시오. 알겠습니까?”

이번에는 갑자기 재난영화 클리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말해준 세부사항 몇 가지가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날 대피시키시려는 걸 보니 공략 잘 된 남주 후보는 맞구나.

근데 또 이런 클리셰 중에 하나가 이렇게 혼자 도망친 사람이 제일 먼저 끕살 당하는 거란 말이야.

내가 지금까지는 로판 주인공 보정을 믿고 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판을 보니까 이 로판 너무 이상해!! 작가가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완전 내용이 골로 가고 있어! 유료 연재 중이라 연중이 불가능하니까 열 받아서 그냥 주연들 죽여 버리고 엔딩 내버리려는 건가하는 생각까지 들어!

그리고 안 좋은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다고, 진행은 좀 달랐지만 역시 이 권유는 실행이 불가능했다. 무어 경이 다급하게 현관문을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

무어 경이 현관문을 잡고 있는 손을 놓지를 못한다.

괜찮아, 괜찮아. 이럴 줄 알았어. 남주 후보들이 다 여기 있는 마당에 주인공이 도망치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지. 나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해탈한 기분으로 무어 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손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렸지만 지나치게 충격을 받은 듯 별 말이 없다. 너 계략 남주 치고는 너무 멘탈 붕괴가 빠른 거 아니냐?

그리고 그 와중에 지하실에서 나오는 손이 더 늘어나고 있다. 이제 거미가 아니라 무슨 말미잘 수준이다. 허허.

“......”

슬슬 여기서 죽으면 원래 원룸에서 깨어날지 고민되는구만. 역시 독살시도가 있었을 때 돈 들고 야반도주했어야 했나? 이젠 가망이 없으려나?

아냐, 그래도 뭐라도 해봐야겠지. 미남과 함께하는 석유왕 라이프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 몸으로 살아보려고 노력이라도 해봐야겠다. 어디 보자...... 우선 저 꼴로 아직도 못 움직이는 사람들부터 정신 차리게 해야겠어.

일단 가장 가까운 도자기를 들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현관문 앞 협탁을 장식하던 하얗고 화려한 도자기는 무척 고가로 보였지만 사람 목숨만큼은 아닐 테니 아낌없이 쓰자!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다행히도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주긴 했다. 나는 우선 악령드립을 친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게 악령이에요?! 댁들이 말하던 악령이 무어 경이 아니라 저거 아니에요?!”

탐정이 무슨 욕지거리 같은 것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 같더니, 그제야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 내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모르죠! 우리도 실종된 사람들을 추적해서 온 거지 무슨 악령전문가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자신감 있게 악령 이야기를 꺼낸 거예요!?”

“해서가 이 저택에서 근무하면서 직접 경험했다고 했으니까! 무슨 선셋이...... 젠장!”

탐정이 현관에 발을 디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실에서 나오던 손들이 전부 빨려들 듯이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아까의 엄청난 소음이 거짓말이었던 거처럼, 타는 것 같이 불안한 정적이 흐른다.

이건 절대 수습된 분위기가 아니다. 이건 일 터지기 직전의 분위기다.

탐정은 숨을 고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더니 말한다.

“일단 되는 대로...... 총이라도 잡고 있을까요?”

그리고 지하실에서 괴성과 함께 뭔가가 튀어나왔다.

두 다리와 두 팔이 있는 이족보행의 형체는 맞다. 일하는 분들이 입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도 맞았다.

단지 그 유니폼이 엄청나게 더러웠다. 뭔가 검은 진액 같은 것이 덕지덕지 붙은 그 옷은 결벽증 있는 사람한테 보여줬다가는 기절할 수준의 더러운 찐득거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사람 얼굴이 있어야할 부분에 촉수가 있다.

“......헐.”

아니 정말로 촉수가 있다. 거대한... 말미잘 같은 게 있어.

방금 말미잘 이야기한 건 그냥 드립 친 거였는데 왜 진짜 머리에 말미잘이 달려있냐.

잘 보니 발도 말미잘 같은 질감이다. 사람이 형상을 하고 있는 건 오직 손 밖에 없다.

그리고 이 의식의 흐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동안 그 말미잘은 이상한 소음을 내며 비틀비틀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익그익 거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데, 방금까지 지하실에서 들리던 소리가 저 소리라는 걸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탕탕! 탕!

요란한 총소리가 옆에서 터진다. 이 옆에 해서 화이트가 있었으니까 분명 그쪽에서 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총 세발이 나란히 말미잘에 박혔는데도 속도만 좀 느려졌을 뿐이지 그대로 전진 중이라는 것이다. 으악 시벌!!!

옆에서 탐정이 총을 쏘는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나도 총을 쐈다. 내 총알은 말미잘의 어깨에 맞았지만 점액질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그 부분이 좀 무너졌을 뿐, 별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탐정의 총알은 발에 박혔는데, 이게 그나마 효과가 있었는지 말미잘이 넘어졌다! 대박!!

하지만 쓰러진 말미잘너머로 또 다시 지하실에서 꾸물꾸물 나오는 다른 말미잘들의 모습이 보인다. 어흐흑...... 설마 아까 튀어나온 팔만큼 있는 거야? 그런 거야?

상황을 재빨리 파악한 듯, 뒤에서 해서 화이트가 열심히 발을 노려서 쏘고 있었지만 이건 답이 없었다. 지하실에서 말미잘들이 무슨 출근길 지하철 환승역처럼 계속 나오고 있다.

설마 이대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말미잘과 동료가 되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나......? 망작도 이쯤 되면 경이로울 수준이라 SNS에서 화제가 될 것 같다. 허허. 모르겠다. 난 최선을 다했어. 일단 그래도 총은 계속 쏘자. 크으흡.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자 아직 계단 위에 있는 제릴이 보인다. 솔직히 제릴도 권총을 들고 있을 줄 알았는데, 손에 들고 있는 건 아까 챙겼던 그 번역한 종이다. 정신없이 그 종이에 코를 박고 읽고 있는 제릴을 보자 번개 같은 깨달음이 스쳐지나갔다!

그렇지! 저거 지하실 밑에 비밀동굴 벽을 찍은 거야! 헉, 설마 이 말미잘 퇴치할 무슨 힌트라도 적혀있나? 그런가?

그래 어쩐지 이상했어, 얘네 꼴이 악령이라기보다는 무슨 키메라 같다고! 일단 어쨌든 총알(물리공격)이 통하고는 있잖아! 차라리 드래곤 레어를 지키는 키메라나 뭐 그런 몬스터라고 보는 게 더 납득이 가는 수준이야!

힘내라 제릴, 뭐든 좀 찾아줘! 이렇게 예상치 못한 일들이 맞물려서 힌트를 찾아내며 극적으로 이기는 전개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퇴치의 순간은 내 빅픽쳐와는 상관없이 찾아왔다.

우선 이 모든 사태동안 총 한 번 꺼내들지 않던 무어 경이 요상하게 생긴 날붙이 꺼내들며 일이 시작됐다. 약간 구불구불 비틀린 그 무기는 어쩐지 좀 낯이 익었는데, 무어 경이 무기를 거꾸로 든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중얼거리기 시작하면서 기억이 났다.

저거 정원사 선셋한테 받았다던 공구에서 일부만 떼어낸 것 같은데? 칼날 모양이랑 색이 똑같네.

어쨌든 내 회상과는 상관없이 무어 경의 중얼거림은 계속되고 있다. 듣고 있자니 이거 그냥 말이 아니라 무슨 좀 음울한 시나 노랫말 같은데? 반복되는 어조가 많고 운율 같은 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설마 무슨 마법사라도 되세요?

직후, 정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났다.

무어 경이 주문을 멈추고 거꾸로 들고 있던 날붙이를 위로 향하게 돌리자, 꾸물거리며 덕지덕지 전진하던 모든 말미잘들의 움직임이 굳었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줄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용광로에 들어간 쇠처럼 형체가 무너진 말미잘들은 곧 검붉은 웅덩이와 유니폼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

대박이다. 실은 무어 경이 드래곤인 거 아니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자칭 약혼자를 돌아보았다. 아마 이 현관에 있던 사람들이 다 똑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어 경은 여전히 이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자신이 쥐고 있던 단검을 나한테 건넸다.

“.......?”

이건 왜 주는데? 드래곤식 구애의 행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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