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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인 줄 알았는데 괴담이다-38화 (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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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주니까 받기는 했다. 내 손에 들려 가까이서 보는 단검은 여전히 구불구불 이상한 모양새에 어느 샌가 금까지 가있었지만 묘하게 든든한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방금 전에 이 단검을 가지고 키메라 말미잘들을 없애는 장면을 봐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가지고 있으십시오.”

“왜요?”

“만일을 위해서.”

무어 경이 덤덤하게 말했다. 약간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있는 그 모습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얼굴이 돋보였으나 어쩐지 약간 지쳐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방금 그건 정말 말도 안 되게 엄청난 마법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탐정이 휘파람을 불더니 질문을 던졌다.

“댁은 대체 정체가 뭡니까? 해서, 저 사람이 악령이 맞다며? 오히려 괴물들을 퇴치했는데?”

“......적어도 내가 암시에 걸렸던 건 확실해. 갑자기 없던 약혼자에 대한 지식이 생겨났으니까.”

총을 정리하던 해서 화이트가 기가 막혀 하는 탐정에게 대꾸했다. 그리고 탐정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 무어 경을 미심쩍은 눈으로 훑어본 후에, 나를 돌아보며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아니 왜 또 저를 콕 집어서 말을 거시나요...... 이미 무어 경 계략 남주 마일리지는 충분히 적립한 것 같은데요.

“이 저택에 악령 같은 존재가 기생하고 있는 것 또한 확실합니다. 제가 이 집에 사용인이 되자마자 이상한 정신지배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거 혹시 수면기라 정신체만 활동하는 드래곤 아니냐.

“그 악령이 사용인들을..... 자신을 선셋이라고 칭하는 이상한 인격으로 움직이게 만들더군요.”

“헉.”

역시!! 나는 검은 물로 터져나간 정원사 선셋을 떠올리며 경악했다. 이게 이렇게 연결되는구만! 그럼 이집 사용인들이 자꾸 그 이상한 별명을 썼던 건 실은 드래곤 노예로 탈바꿈되는 과정이었다는 말인가. 설마 최종 진화버전이 그 키메라 말미잘인 건 아니겠지. 제발 그 놈들은 그냥 사용인인체 하던 몬스터였으면 좋겠다.

“근데 그때 분명 선셋이라는 사람 모른다고 했잖아.”

“저택 안이라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해서 화이트가 담백하게 인정했다. 으음, 들으니 그럴 만도 하다. 나라도 저게 다 사실이라면 섬뜩해서 말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도리어 증언하러 돌아온 것 자체가 용감할 따름이다.

어쨌든 아무래도 이 드래곤 진짜 성격 더러운 것 같아. 계략 남주에 사이코패스 드래곤 서브남주라니 이 로판 정말 피폐물 맞는 거 아니냐. 역시 진짜 드래곤 나와서 스토리 더 진행되기 전에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그 와중에 탐정이 현관문으로 가서 다시 문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았다. 창문도 마찬가지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일단 뭘 좀 아는 것 같은 사람에게 다시 물어나 보자.

“저기, 무어 경? 어떻게 이 말미잘들을 보내버린 건가요? 혹시 나가는 방법도 짐작 갈까요?”

“말미잘.......”

그래 그 말미잘! 무어 경은 단어만 중얼거린 후 잠시 입을 꾹 다물었지만, 곧 선선히 대답했다.

“문을 막고 있는 걸 제거하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

드래곤이요? 설마 지금 우리 드래곤 잡으러 가자고 하려는 건 아니지?

다행스럽게도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건 저쪽이 아마 알고 있겠군요.”

“네?”

무어 경이 양어머니를 지목했다. 말없이 멍하니 누워있던 양어머니가 눈동자만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무어 경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악령에 사로잡힌 건 저쪽이니까.”

그 말을 듣자마자 양어머니의 수상쩍은 행동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이 저택에 굳이 약혼자라는 명분까지 만들어 들어온 것도, 저 여자를 쫒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어 경이 진중하게 말을 맺었다. 그리고 현관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양어머니에게 집중되었다. 탐정과 해서 화이트가 대충 납득은 된다는 표정으로 양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고, 제릴은 체념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이다.

“하하하...!”

양어머니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추잡하게 구는 구나, 무어 가문의 사생아 자식.”

“.......!”

“놀랐니? 놀랐구나? 분명 내 뇌를 표백하려고 암시를 걸었는데 통하지 않아서 당황스럽고 초조하고 피가 식는 기분을 느끼고 있겠구나. 그래, 좋아. 너 같은 쓰레기도 지옥에 가야지. 역겹고 가증스러운 놈......”

양어머니가 횡설수설 욕설을 내뱉더니, 갑작스럽게 내 쪽을 휙 돌아본다.

“로제. 혹시 오베르 가문이 굳이 왜 이 저택을 사서 들어왔는지 궁금한 적 없나요?”

마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던 때처럼 상냥하고 여상스러운 목소리였다. 가문의 사생아 드립을 듣자마자 계략 남주의 과거 대서사시를 쓰고 있던 나는 놀라서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엄청 쫄았다.

“그, 글쎄요.”

“어머, 잘 들어보세요. 그건 말이죠. 아주 옛날로 돌아간답니다. 원래 이 저택에 살던 다른 가문이 있었어요. 끔찍하도록 탐욕스럽고 절망스럽도록 잔인한 그들은 아주 흥미로운 풍습과 전통을 저 고대 시절부터 이어오고 있었지요. 그 가문은.......”

“닥쳐.”

날선 습기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아는 목소리지만,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감정적이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놀라우리만치 음울하고 격정적인 눈을 하고 있는 무어 경이 보였다.

스, 슬슬 계략 남주의 본심이 나오나요?

“어차피 다 끝날 건데 왜 저렇게 무서워한담? 로제, 이번에는 내 말을 믿어줘요. 나야 소박했지. 저건 정말로...... 대단히 끔찍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지금 저렇게 곰살 맞게 구는 것도 일이 틀어져서 기회를 노리고 있는 중일 거예요.”

양어머니가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끝마쳤다.

“날 죽이고 여기 있는 모두에게 암시를 걸 기회를... 계속.”

양어머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많은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먼저 해서 화이트가 벌떡 일어나서 총을 장전했다. 동시에 계단에서 뛰어내려온 제릴이 내 뒷덜미를 잡아당겨서 자기 뒤로 보낸다. 억, 잠깐. 나 총 있어. 나도 여차하면 쏘면 된다고! 다들 자꾸 날 휙휙 던지려고 하는 것 좀 그만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탐정은 잠시 양어머니와 무어 경을 번갈아보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양어머니 쪽에 권총을 들이댔다.

“...사생아에게 쏠 총을 잘못 쓰고 있는 게 아닌지?”

“마담, 그쪽도 만만찮게 수상쩍거든요!”

탐정이 이를 악물고 대꾸한다.

“저 소름끼치는 놈이 어쨌든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는 했단 말입니다! 근데 당신은 계속 정보도 안 될 이상한 말만 하고 있어요. 마치 무슨......”

탐정이 갑자기 머뭇거린다. 말을 마구 뱉으면서 뭔가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을 깨달은 것 같은 표정이다.

“마치....... 시간이라도 끌려는 것처럼.”

픽.

분명 소리가 있었다면 그런 소리가 났을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없이 현상이 벌어졌다.

갑자기 빛이 사라진 것이다.

“......!”

“하하하하하!!!”

나는 양어머니가 웃는 소리를 BGM으로 취급하려 애쓰며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좀 더 침착하게 확인하니 전등이 전부 나갔을 뿐, 바깥에서 들어오는 빛은 여전히 멀쩡하다.

아니, 멀쩡하지 않다...?

분명 빛이 들어오는 건 맞는데, 타는 것처럼 붉은 햇살이 창밖으로부터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분명 한낮이었는데도!!

굉장히... 왠지 굉장히 나쁜 징조 같은데 내 착각이냐. 말미잘을 퇴치하니까 이번에는 시공간이 비틀어졌어. 혹시 나가보면 이계나 드래곤 수면기 전 과거로 돌아간 거고 드래곤 영역에서 벗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온갖 말미잘과 싸워야하는 거 아니냐고...!

불행회로가 세차게 돌아가는 이 와중에 불쑥 무어 경이 말을 걸었다. 깜짝이야.

“죄송합니다.”

“네?”

“.......죄송합니다.”

무어 경이 갑자기 사과를 한다. 오 그래 지금 계략 남주에서 후회 남주 테크 타려는 건 잘 알겠는데 사과와 후회 전개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지금은 뭐 서로 감정교류할 시간이 아닌 것 같아! 그건 이 위기가 해소된 후에 하자, 응?! 설마 진짜 드래곤이라 위기감 안 느끼는 건 아니지?

고구마 백 개 처먹은 것 같은 답답함이 밀려오지만 무어 경은 기어코 말을 다했다.

“전부... 전부 제 오착입니다.”

그리고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붉은 석양이 찌를 듯이 쏟아지는 가운데, 거대한 석양빛을 역광으로 받으며 누군가 서있다. 그 작고 또렷한 검은 형상이 저택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 본다.

“......?!”

저거 정원사 선셋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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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분명 공포일 것이다. 공포 외에는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감각.

로제의 약혼자였던 남자는 무심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가죽 장갑에 덮인 손등이 떨리고 있다.

남자는 단 한 번도 만약이라는 가능성에 압도된 적이 없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명료한 두 선택지로 나뉘어져 있었고, 남자는 단 한 번도 다른 선택지를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그 단어였다.

만약.

만약에.

그리고 그 가정은 남자가 이 저택에 처음 발을 디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 작품 후기 ==========

남주 시점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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